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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습니까? 토레스 백작님."
레이턴 자작은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백작에게 물었다.
"자작은 아이샤양의 그 말을 믿소?"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예! 저는 아이샤양의 말이라면 고기로 치즈를 만든다고 해도 믿습니다."
"허…. 두 가문이 그 오랜 세월 원수지간 이던 게 사실이오?"
"허허허. 그동안 중재역을 해 오신 토레스 백작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것참…."
토레스 백작영지는 남으로 레이턴 자작가와 접하고 두 가문은 공히 랜스필드 후작령과 접해 있었다. 지리적인 영향도 있고 인적 영향도 있어서 랜스필드가와 레이턴가가 분쟁이 날 때마다 두 가문을 조율하던 이가 토레스 백작 이었다.
지금 토레스 백작은 남동부 몬스터 토벌대 대장으로 약 50여기의 나이트급 고램과 2만5천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남하 중이었다.
레이턴 자작은 부관으로서 토레스 백작을 옆에서 따르고 있는 중이었다.
올해 첫 남부 탈환작전을 시행하기 전, 아이샤의 발언으로 남부 연합회의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몬스터, 특히 오크가 지성을 가지고 사회를 이루고 있다는 아이샤의 말 때문이었다. 토레스 백작은 그 의견에 대해서 레이턴 자작의 견해를 물어 볼 심산 이었는데 레이턴 자작의 반응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작년겨울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하하하 예기하자면 길지요. 아무튼 저는 그날부터 무조건 아이샤양의 편입니다."
"허허…."
토레스 백작은 그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작년 겨울 대원정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레이턴 자작은 부관의 연락을 듣고 부랴부랴 전 병력을 이끌고 영지의 북동부 경계로 들어섰다. 50여기의 마이티를 앞세운 일단의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아이샤와 랜스필드가의 기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행여 자신의 영지로 쳐들어올까 바짝 긴장한 레이턴 자작에게 아이샤가 다가오더니 말했다.
"제대로 연락도 취하지 못하고 이런 결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작!"
"흥! 랜스필드 가문이 하는 짓이 늘 그렇지. 그래 오늘로 두 가문의 악연을 끝내볼 생각이냐? 비록 우리 레이턴 가가 힘으로나 무엇으로나 랜스필드가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절대 그냥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야!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자!"
레이턴 자작은 무례하게 아이샤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그러나 아이샤는 흥분해 나서려는 자신의 호위 기사들을 만류하며 자작에게 다가가 편지를 내밀었다. 레이턴 자작은 낚아채듯 편지를 뺏어서는 눈으로 빠르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자세한 얘기는 지금 할 상황이 아닌 듯 합니다. 한 가지만 확실히 해 두고자 합니다. 사과를 원하신다면 지금 이자리에서 제가 무릎을 꿇어서라도 사과를 드리지요. 그러니 지금은 저 행렬이 자작의 영지를 지나가게 허락 해 주셨으면 하는군요."
편지를 읽어나가던 레이턴 자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신의 표정이 만연했다.
"지나가게만 해 달라? 허면 저것은 무엇인가? 저것은…!"
레이턴 자작이 편지를 구기며 한쪽을 가리키자 5기의 마이티와 야크 몇 마리가 행렬에서 빠져나와 레이턴 자작의 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작의 말은 곧 끊어졌다. 공격을 하는 줄 알았던 마이티가 자신의 기사단 앞에서 무릎을 꿇더니 라이더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레이턴 자작가의 기사 하나가 빠르게 자작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자작님, 저기…. 저쪽에 한번 가 보셔야 하겠습니다."
다가온 기사가 아이샤의 눈치를 보며 자작에게 말을 전했다.
"기사단장! 경계를 풀지 말도록 하게!"
레이턴 자작은 여전히 불신에 찬 표정으로 아이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곤 서있는 마이티 다섯 기를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아이샤와 거리가 벌어지자 레이턴 자작이 호위기사 한명을 호출했다.
"가서 숀을 불러오게."
숀은 레이턴 자작의 오른팔 이었다. 군무에 용병생활까지 마치고 돌아온 노련한 기사였다. 현 레이턴가의 기사단장의 아들로 차기 기사단장으로 일찌감치 눈도장을 받은 상태였다.
"부르셨습니까?"
"숀, 기사 100명을 대기시키게, 신호를 하면 아이샤를 공격하게."
"옛!"
아이샤는 호위기사 몇 명과 이동하는 무리에서 떨어져 있었다. 레이턴 자작은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흥! 호랑이 아가리에 겁도 없이 들어오다니, 어디 맛 좀 봐라."
그러나 자작은 마이티에 도착하고도 신호를 할 수 없었다.
"에인 헤인즈?!"
"엇, 주군!"
고램의 라이더는 레이턴 자작가의 기사였던 에인 헤인즈였다. 군무와 용병생활을 몇 년간 경험하고 슬슬 돌아올 때가 되어 레이턴 자작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자네,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자작님 그게 사연이…."
그 사이 무릎을 꿇고 있던 다른 4기의 마이티 고램에서도 라이더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놀랍게도 어린 학생들 이었다.
"이게 대체…?!"
적이라고 생각했던 레이턴 자작은 의외의 고램 라이더들을 황당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레이턴 자작의 영지에는 나이트급 1기와 마이티 2기가 있을 뿐이었다. 작년에만 마이티 2기를 잃었었다. 레이턴 자작의 영지는 남부의 북쪽에 있지만 몬스터의 공격이 심한 영지 중 하나였다. 영지를 지키려면 최소한 마이티 4기 정도는 필요한 참이었다.
레이턴 자작의 기사단 앞에서 에인 헤인즈는 자작에게 그랜빌 마을에서의 일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이티 5기가 자작에게 무상으로 공여되었다는 얘기를 듣자 자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멀리 아이샤를 쳐다봤다.
"자작님, 청이 있습니다."
"뭔가?"
에인 헤인즈는 레이턴 자작 앞에 갑자기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아무래도 기사단 합류는 늦어질 것 같습니다. 아이샤양을 따라 원정을 다녀오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뒤에서 지켜보던 레이턴 자작가의 기사들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헤인즈, 돌아오자마자 무슨 소린가?"
"미친 건가?"
"배신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들 중에는 헤인즈의 친우도 있었고 오랜 동료도 있었다.
"이보게들 그런 게 아니야. 난 죽어도 레이턴가의 기사로 있을 걸세! 단지…."
에인 헤인즈처럼 군무와 용병 생활을 마치고 다시 영지로 돌아온 기사들은 실력이나 경험이 월등이 높아졌다. 고램이나 마법사를 구하기 어려운 남부의 많은 영지에서 가장 흔한 기사 전력을 극대화 하는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영지의 자금이나 노력을 들이지 않고 기사들의 훈련, 특히 라이더로서의 경험을 쌓게 하는 방법이었다. 당연히 몬스터의 습격이 잦은 레이턴 자작도 오래 전 부터 자신의 기사들을 이렇게 단련시키고 있었다.
반면 그만큼 한명의 기사 전력도 아쉬운 것이 남부였다.
기사단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그때였다. 다급하게 전령이 달려왔다. 전령이 전하는 말을 들은 레이턴 자작과 기사들의 얼굴이 크게 변했다.
"그래 그 후, 자네 기사들의 말만 믿고 그렇게 사람이 변했단 말인가?"
얘기를 들은 토레스 백작이 웃으며 말하자 레이턴 자작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훨씬 빨리 변했습니다."
"음?"
"갑자기 몬스터가 영지 남쪽경계에서 나타났다는 전령이 온 겁니다."
"그렇게 일찍?"
"아시잖습니까? 작년엔 좀 극성이었죠."
"그랬지. 그래, 그래서?"
"영지의 거의 모든 병력을 고램 행렬이 있는 곳에 끌고 온 참이라 큰일 났다 싶었는데 아이샤양이…."
"아이샤양이?"
"두말 않고 모든 고램 행렬을 그쪽으로 이동 시키더군요. "말보다 고램이 빠릅니다."라면서."
"허!"
"더욱이."
"더욱이?"
"우리 레이턴가 기사들에게 고램 조종을 몽땅 맡겨 버리더군요."
"그런?!"
작년 남서부가 생각보다 몬스터의 침공이 심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50기씩 마이티를 분배 했지만 남동부가 북쪽에서부터 고램들과 병력들이 영지 경계를 기준으로 몬스터의 침공을 쓸고 내려가자 남부의 몬스터 상당수가 그쪽으로 몰려든 탓에 남서부는 상대적으로 득을 봤던 것이다.
토벌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50기가 넘는 고램과 모여 있던 기사들의 병력은 영지를 급습한 작은 오크 무리들이 감당 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토벌이 끝난 레이턴 자작은 아이샤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딴 맘을 품는다면 어찌 할 텐가? 50기의 고램 전력이라면 지금의 랜스필드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을 텐데 걱정되지 않는가?
그러나 다시 대열을 정비하기 시작한 고램들을 바라보며 아이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가요? 하지만 그러지 않으실 거잖습니까?"
"지금이라도 내가 명령만 내린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저는 자작님을 굳게 믿고 있는걸요."
"아이샤…."
두 사람은 어느새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서서 고램 대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서히 출발하는 고램 대열을 뒤로하고 레이턴 자작이 자신의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잠시 고민하던 레이턴 자작이 에인 헤인즈와 숀을 불렀다.
"원정에 따라갔다 오게."
"주군!"
"안될 말입니다. 자작님!"
에인 헤인즈에게 허가를 해 주자 기사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레이턴 자작은 손을 들어 논쟁을 중단 시키더니 한술 더 떴다.
"숀!"
"옛! 주군."
"기사 50명과 병사 500을 줄 테니 따라가게."
"주군?"
"자작님, 함정 일수도 있습니다!"
"아니! 숀, 그냥 헤인즈와 같이 가게. 가서 보고 오게."
자작은 자신이 구겼던 랜스필드 후작의 편지를 기사단장에게 넘겨줬다.
편지를 읽던 기사단장의 눈썹이 크게 올라갔다.
"어디 그 편지가 진심일지 한번 확인 해 보자구."
그 후 3차 대원정이 있은 다음 레이턴가의 기사들의 평가는 아이샤와 랜스필드가의 평판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하하, 그런 일이 있고나니 어쩌겠습니까? 더 이상 아이샤양을 향해 적대 할 자신이 없어지더군요."
레이턴 자작은 얘기를 마치고 토레스 백작을 보며 털털하게 웃었다.
"허허허. 자네가 변할 만도 했구먼."
레이턴 자작은 토레스 백작과 웃으며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마치 그때 아이샤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던 것처럼.
남부의 영지들이 수세에서 공세로 들어서는 첫 해였다. 처음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의 분위기는 상당히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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