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절체절명
96. 절체절명
"이야~ 잘 달리는데?"
"아아, 또 토한다."
3학년들이 학교 건물에서 연병장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우리도 1학년 때 저랬던 거야?"
"흐, 당할 때는 힘들더니 보는 건 재미있군!"
"못됐어 정말!"
알리시아가 창밖을 바라보는 소년들을 보며 눈을 흘겼다.
3학년들은 오전 교양수업을 준비 중이었다. 3학년부터는 교양 수업을 남녀가 따로 받게 되었다. 남학생들의 수업은 본격적인 실전 전술학이었다. 이제 3학년들의 수업은 이름뿐인 교양이 아닌 초급 장교로서의 전술 교본과 실제 전장에서 쓰이는 여러 실전 매뉴얼 등을 익혀야 했던 것이다.
"이크, 교수님이 오신다."
한 소년이 알리자 곧이어 소년 소녀들은 각각의 교실로 서둘러 흩어졌다. 펠릭스도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소년들은 작년처럼 서서히 새로운 학교생활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제시 교관은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연병장에는 데미안이 헉헉 대면서도 끝까지 버티며 달리고 있었다.
"휴~ 이 짓도 슬슬 못해먹겠군."
다른 신입생들과 달리 데미안 이라는 소년은 교관들이 배로 신경을 써서 굴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생생한 눈빛이었다.
제시 교관은 어제 교장실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아~!"
데이브 공작에 이어 줄리어스 백작까지 집무실을 떠나자 스튜어트 교장은 그제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제시 교관이 보던 말던 숨겨둔 흑마술 술병을 꺼내 들었다.
"교장 선생님!"
"말리지 말게!"
교장은 제시 교관은 아랑곳 하지 않고 뚜껑을 따곤 술잔을 꺼내들며 말했다. 그러자 제시 교관이 스튜어트 교장의 술병을 낚아채 버렸다.
"제길! 교관! 꼭 그렇게 딱딱하게 나와야 게…."
그러나 스튜어트 교장은 입을 해 벌리고 교관을 바라봐야 했다.
"이 이보게 다 마시진 말게!"
제시 교관은 병째로 들고 꿀꺽 꿀꺽 들이키기 시작했다.
"휴~!"
한껏 들이킨 교관이 술병을 교장에게 넘겼다. 스튜어트 교장은 술을 잔에 따르려다 확 줄어든 술의 양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며 병마개를 닫고 다시 숨겼다.
"대체 무슨 소릴까요?"
"뭐가?"
"왜 교장 선생님이 도움은 필요 없고 저보고는 자기 자식을 마구 굴리라고 한 겁니까?"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나야 데미안 공자가 졸업 할 때쯤이면, 아니 내년 봄 이후로는 이 학교에 아무 힘이 없는 사람일세. 아마도 데미안 공자의 앞으로의 행보는 차기 교장이 책임 질 테니 나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거지."
"그럼 저는요?"
"자네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
"굴려도 된다는 겁니까?"
"공작가의 부모 자식간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나야 총리실 소속이지만 자네는 반은 군에서 파견 나온 몸이 아닌가?"
"…."
"이보게 걱정 말게나. 설마 자기 입으로 굴리라고 해 놓고 나중에 딴소리 하실 분은 아닐 테니."
제시 총 교관은 꺼림칙했다. 자신은 교장처럼 소속이니 귀족들 간의 뒷거래 같은 것은 서툴렀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지금도 명령대로 굴리고 있지만 저 소년의 어제 행동이나 발언으로 보자면 자신의 가치관으로는 이런 처벌이 아니라 칭찬 해 줘야 할 상황이었다. 군 출신인 교관은 상과 벌에 대한 개념이 명확했다.
"피아 구분이 명확한 전장이 낫지.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어…."
슬슬 신입생들이 체력의 한계에 부딪힐 시간이었다. 제시 교관은 휴식시간을 주기 위해 일어섰다. 그동안 학교에 있으면서 굴리는데 도가 튼 덕분에 언제 어느 때 시작하고 그쳐야 할지를 잘 알았다.
"그런데 대체 자기 자식을 왜 죽도록 굴리라는 거지? 귀족들의 생각은 정말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잠시 이유를 생각하던 교관은 고개를 젓고는 서둘러 학생들에게 향했다. 그가 신경 써야 될 소년들은 신입생뿐이 아니었다.
"야! 어떻게 좀 해봐!"
맥스가 세비안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내 내가 뭘 어떻게?"
세비안이 주춤 거리며 답변을 했다.
"무책임한 녀석!"
"너 때문이잖아! 당연히 네가 어떻게 해 봐야지!"
쌍둥이들도 세비안을 책망했다.
"끙!"
세비안은 귀찮은 듯 앞을 바라봤다.
펠릭스는 입학식 때부터 멍하니 저 상태였다. 골똘히 뭔가 생각을 하는 건지 그냥 기분이 우울한 건지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러게 안하던 짓을 해 가지고서는…."
세비안을 탓하던 소년들을 보던 칼이 넌지시 맥티어넨에게 물었다.
"심각해?"
"어! 저 녀석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더라구."
"하긴, 우리 입학식때도 그랬고 원래 좀 소심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지…."
"세비안이 의외로 안하던 짓을 하긴 했지만 사실 펠릭스도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는 거 아니겠어? 게다가 이제 1년 후면 졸업이니 슬슬 장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 할 때가 되긴 했지."
"흠…."
펠릭스의 상태가 점심시간 까지 이어지자 결국 소년들이 부추겨 칼과 세비안이 나서야 했다. 펠릭스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내심 이 일로 알리시아가 화를 낼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이날도 펠릭스는 늘 그렇듯 도서관에서 형 에이드리안에게 보낼 책을 찾아 목록과 대조하고 있었다.
"털썩!"
"?!"
펠릭스의 앞자리에 몇 권의 책이 놓였다. 그리고 두 소년이 펠릭스 앞에 앉았다. 칼과 세비안이었다. 칼은 '진로 상담의 심리학' 이라는 책을 펼쳐 들었고 세비안은 '사과와 용서의 심리학' 라는 책을 펼쳐들었다. 둘 다 책 크기와 두께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제는 펠릭스와 친구들만이 통하는 이른바 책으로 하는 대화방식이었다.
"…."
잠시 두 사람을 쳐다보던 펠릭스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저기 칼, 세비안, 그 책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돼?"
그러자 칼은 책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니, 전혀!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이런 걸 읽고 이해하는 인간이 정말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군."
칼의 질린 표정을 보며 펠릭스는 웃었다. 그리고 세비안을 보며 말했다.
"세비안, 괜찮아, 너 때문은 아니야. 사과할 필요는 없어."
"아니, 그래도…."
세비안은 그래도 미안했는지 책을 내려놓지 못하고 슬쩍 두 사람의 눈치를 봤다.
"사실 나도 한참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그저 가문의 의무 때문에 끌려온 내가 딱히 애국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목적 없이 싸워도 되는 걸까? 그렇게 싸워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돌아가면 가문에서 나와 가족들을 가만 놔둘까…."
"…."
"이미 예전부터 고민하고 있던 것들이니까. 딱히 세비안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 괜찮아. 그리고 고마워 걱정해 줘…??"
펠릭스는 나름 걱정 해준 친구들이 고마웠다.
살짝 부끄러운 마음에 에이드리안의 목록으로 눈을 시선을 감추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칼이 펠릭스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가져갔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세비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
칼이 뭔가 눈짓 손짓을 하며 펠릭스에게 신호를 주는데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칼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세비안이 들고 있던 '사과와 용서의 심리학' 이라는 책을 휙 뺏어 들었다.
"어엇! 칼! 무 무슨 짓이야!"
당황한 세비안이 칼에게서 책을 뺏으려 하자 칼은 서둘러 책을 펠릭스에게 넘겼다. 펠릭스가 받아든 책 뒤에는 무언가 다른 조그만 책이 하나 더 끼어 있었다.
'사랑과 기술! 48가지, 잠자리 테크닉(도판)'
"…!!!"
펠릭스는 책을 접어 표지를 확인하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두 소년의 시선이 세비안에게 향했다.
"세비안 너!"
"아 아니, 저 그…. 나는 말이야. 하하하!"
세비안은 필사적으로 뭔가 변명할 말을 찾으려했다. 그러자 칼이 펠릭스에게서 책을 받아 펼쳐서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이런 게 있으면 진작 알려야 할 거 아냐!"
“그러게, 치사하게 혼자만 보고 있었단 말이지?”
"그래 48가지 중에 어떤 게 제일 괜찮은 거 같은데?"
"응?"
칼과 펠릭스의 의외의 물음에 세비안이 답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자 칼과 펠릭스가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대체 어디서 이런 걸 찾은 거야? 난 그동안 형님 심부름 하면서 도서관의 책이란 책은 몽땅 뒤졌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이런 건 눈에 띄지 않던데."
"아니 그보다 이거 대출이 될까?"
두 사람은 이미 세비안은 안중에도 없었다.
"펠릭스 너 설마 이것도 형에게 보낼 생각은 아니겠지?"
"무슨 소리야? (도판) 이라는 글 안 보여? 이런 건 필사 하는데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구. 그냥 대출하고 반납하지 않으면 안 될까?"
"오!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과연 도서관에 줄 창 박혀있더니 이런 걸 생각 하는 것도 뭔가 다르구나!"
펠릭스도 언제 고민했냐는 듯 책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칼과 펠릭스 두 사람은 가운데에 책을 펼쳐놓고 책상 위에서 머리를 맞대었다.
"오! 역시, 그림이 있으니 이해가 확 되는 걸?"
"자 잠깐만! 너무 빨리 넘기지 마. 나 아직 못 봤다고."
"뭐야, 펠릭스. 너 너무 밝히는 거 아냐? 흐흐."
"밝히다니 무슨! 자세히 봐 둬야 나중에 알리시아랑…."
"휴~ 녀석들! 험!"
두 사람은 완전히 책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 바람에 세비안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두 사람을 아무리 흔들며 주의를 줘도 반응이 없었다.
"저기 친구들? 이보게나. 커험!"
"왜 그래 세비안? 넌 이미 충분히 봤잖ㅇ…. 헙!"
펠릭스가 고개를 돌리다 숨을 꿀꺽 삼켰다.
언제 왔는지 알리시아가 세비안의 앞에서 세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우와~! 이거 대단한데? 이게 대체 사람이 가능한 자세야?"
그 순간 칼이 눈치 없이 책을 펼쳐들고 두 사람에게 보란 듯 돌아섰다. 책에는 어마어마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쳐다보기도 전에 알리시아가 순식간에 칼의 손에서 책을 낚아챘다.
"헛!"
뒤늦게 알리시아를 발견한 칼이 당황해서 헛숨을 삼키자 순간 알리시아는 뺏어든 책과 소년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펠릭스, 나랑 뭘 어쩐다고?"
펠릭스를 보며 말하는 알리시아의 목소리에는 한기가 돌았다.
"아니 그 알리시아, 오해야 오해! 그렇지?"
펠릭스가 필사적으로 다른 두 소년에게 도움을 구하며 알리시아를 보며 말했다. 그러나 칼과 세비안은 필사적으로 펠릭스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칼? 세비안?"
눈치 빠른 두 사람은 이미 알리시아의 타겟이 펠릭스로 고정된 것을 알아챈 것이다.
"따라와!"
알리시아는 펠릭스의 귀를 비틀어 도서관 입구로 끌고 갔다.
"아!아! 알리시아 귀는 놓고 말로하자! 말로! 칼! 세비안! 도와줘, 이봐? 친구들?"
그러나 두 소년은 도움을 구하는 애절한 펠릭스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 외면하고 있었다.
도서관 입구에서 사서가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자 알리시아는 오히려 책을 안내 대스크 위에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무시무시한 알리시아의 박력에 사서는 움찔 놀랄 뿐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했다. 책을 반납한 두 사람은 그대로 도서관을 나서고 있었다.
"… 저기 칼, 펠릭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저 말주변 없고 눈치 없는 소심한 녀석이?"
"…."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세비안과 칼은 펠릭스가 끌려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저 명복을 빌어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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