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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능선의 서재입니다.

광검사 狂劍士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완결

좌능선
작품등록일 :
2020.02.18 15:35
최근연재일 :
2020.04.16 16:33
연재수 :
3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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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34
추천수 :
249
글자수 :
140,352

작성
20.04.1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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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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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8쪽

광검출도 (狂劍出刀)

DUMMY

처음 정주성을 지키던 초병들이 목도(目睹)한 것은 하얀 곰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눈앞으로 다가선 기괴한 물체는 온통 눈을 뒤집어쓴 거대한 체격의 사내.

게다가 그 사내의 등에는 함께 눈을 뒤집어쓴 여인의 시체가 있었다.

시퍼렇게 얼어붙은 사내의 눈에서는 도깨비불 같은 안광(眼光)이 번뜩였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의 눈빛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 멈춰라! 여기 정주성에 무슨 일이냐! ”

제법 결기가 있어 보이는 사내가 성문 앞에 도달한 괴인을 향해 낭랑한 음성으로 물었다.

성문을 지키는 수문 조장이었다.

눈을 허옇게 뒤집어쓴 사내는 바로 척준경이었다.

동굴을 벗어나 정주성으로 오기까지 별다른 추적은 없었다.

설중매가 자신의 목숨과 바꿔 준 마지막 선물.

준경을 집요하게 추적해오던 청랑대는 설중매와 함께 이승에서 사라진 터였다.

그러나 청랑대가 아니어도 준경에게는 가장 강력한 적군이 있었으니.

요동벌판을 가득 메운 눈과 시시때때로 불어닥치는 거센 눈보라였다.

이미 굳어버린 설중매를 등에 업어 동아줄로 꽁꽁 묶은 상태로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눈밭을 기다시피 걸어오기를 며칠.

준경의 손과 발, 얼굴은 이미 시퍼렇게 얼어붙었고,

끼니 한번 먹지 않고 걷는 길은 얼음 지옥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죽어버린 준경에게 육체적인 고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목적과 이유와 슬픔도 다 꽁꽁 얼어붙어 버린 채,

거의 무의식적으로 정주성을 향해 걷고, 또 걸어온 것이다.


아무 말없이 성문 앞에 웅크린 사내를 보고 재차 소리를 지르려던 수문 조장은

그 사내의 오른손에 쥐어진 짤막한 언월도를 보는 순간,

초병들과 동시에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고,

부들부들 떨며 성의 책임자인 이관진을 향해 앞다투어 달려갔다.

이관진 장군의 앞에 도달한 준경은 아무 말 없이 굳어있는 얼음 동상 같았다.

그는 준경을 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안다.

그런 사내가 이미 죽은 지 한참 지났을 여인을, 꽁꽁 얼어버린 강시(僵尸)를 둘러업은 채로 군례를 올리고 보고를 다 했을 때, 과연 어떤 마음 일지를 헤아렸다.

“ 척 중랑장. 인제 그만 설낭장을 내려주게나.

그녀도 이제는 그만 쉬어야 하지 않겠나.

그게 그녀가 바라는 것일 테니. ”


준경이 문득 눈을 쳐들고 이 장군을 바라보았다.

순간 이관진은 소름이 쭉 끼쳤다.

지금 그가 마주한 것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일찍이 앞서 전장에서 그는 준경의 무용과 그 처절한 투쟁심을 목격 한 바 있었다.

그래서 고려군 들조차 준경을 일컬어 미친 호랑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그런데 지금 장군을 바라보는 준경의 두 눈은 전혀 빛이 없었다.

마치 돌부처의 눈처럼 완전히 타 버린 눈.

모든 감정이 사라져서, 빛도 무엇도 없는 눈.

오랜 전장을 통해 아주 가끔 장군은 그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대개 엄청난 피폐(疲弊)를 겪은 전쟁고아라던가,

차마 말 못 할 몹쓸 짓을 겪었던 여인네들의 눈이 그러했다.

그런데 광검 이라 불리는 준경의 눈이 그와 같았다.

모든 것을 초월한 자의 눈.

그 때문에 준경은 마치, 커다란 칼 같았다.

두꺼운 쇳덩이로 만들어진, 다듬어지지 않은 거대한 칼.

그 누구도 들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는 칼.


이 장군은 길게 말 않고, 준비에 반나절은 소요될 것이니 어서 가서 쉬라 일렀다.

오느라 고생했다, 상처가 심한 듯하니 출정은 알아서 처리하겠다, 라고.

준경이 쩍쩍 갈라진 입술을 열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지휘하기를 간청 드립니다.”

간청.

준경과 같은 사내의 입에서 절대 나오기 힘든 말.

“ 하나 더 간청 드립니다. 전장에서 매우 어려운 일인 줄 아오나,

가능하시다면 비단을 좀 내어 주실 수 있으시다면 간청 드립니다.”

최전방에서 비단이라.

준경의 몰골을 보고 익히 짐작 가는 바 있던 이관진이 답했다.

“ 안타깝구나. 이곳 사정상 비단 같은 귀물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내 처를 위해 준비했었지만, 아직 전달 못 했던 비단옷들이 있으니 그걸로 어찌 해 보겠느냐?”

준경은 말없이 깊이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병사에 의해 준경은 잠시 쉴 수 있는 숙소로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서서 한참 걸음을 재촉하던 병사는 준경이 들어간 숙소로부터,

마치 호랑이가 울부짖는 듯한 커다란 울음소리가 나는 걸 들었다.

그 사내의 울음은 너무 절절하고도 비통하게 들려서,

전장에서 감각이 무딜 대로 무뎌진 병사의 눈에서조차 한줄기 눈물이 또르르 굴러 내렸다.

그날 밤 정주성의 성내에서는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밤을 새우도록 울려 퍼져서,

모든 병사와 백성들이 잠을 설쳤다.


정주성을 나서는 구원대는 전체 기마병으로 구성되었다.

거리가 멀고, 적지 한가운데 놓인 아군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빠른 기동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선발 기병의 수 이천.

뒤를 따라갈 본대는 일만 명이지만 속도가 느렸다.

본대는 성을 구원할 식량과 무기까지 호송해야 하기에 더 그랬다.

선발대로 꾸려진 기병들은 눈밭에서 달리는데 익숙한 몽골말을 탔다.

그들은 두꺼운 갑주가 아닌 가벼운 솜옷으로 지어진 경 갑옷을 입었고,

무기들도 가벼운 것으로 준비되어 먼 거리를 단시간에 좁힐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그 선두에는 준경이 있었다.

그리고 준경의 등 뒤에는 비단옷으로 몸을 감싼 설중매의 시신이 묶여 있었다.

항마군의 일원이자,

앞서 전투에서 죽은 공유의 사제 이자,

설중매의 사제이기도 한 젊은 승려 음유가 준경의 부장으로 나섰다.

음유는 서서히 말을 몰아 선두에 앞서 말을 달리고 있는 준경의 곁으로 다가가 말을 붙였다.

“ 사형, 죄송하지만 병사들의 눈도 있고 말 에게도 무리가 될 터이니 사매는 다른 말에 옳기는 게 어떠한지요.”

사람 좋게 생긴 음유 승려는 둥글고 원만하게 생긴 얼굴만큼 말도 듣기 좋게 하는 재주가 있다.

굳이 설중매의 ‘시신’을 두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것이.

준경은 곁을 따라 달리는 음유의 눈을 돌아보았다.

무저갱처럼 깊고, 일체의 감정이 다 타버린 죽은 눈.

음유는 파르라니 깎인 머리지만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 간다. ”

준경은 짧게 음유의 말을 끊어내고는 앞으로 말을 달려나간다.


영주 성을 둘러싸고 있던 여진의 무리는 눈사태처럼 닥쳐드는 고려 기병을 막지 못했다.

막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치 살육에 굶주린 겨울 들판의 늑대 떼 같았다.

미친 듯 공격하고 또 공격하며 멈추지 않았다.

자신들의 무리가 죽어 넘어가도 개의치 않고 여진 병사들을 도륙(屠戮)했다.

천지를 메운 하얀 눈벌판이 붉게 물들 정도로.

그리고 그 앞에는 늘 ‘미친 호랑이’ 라 불리던 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 미친 호랑이는 이전에 그들이 들어왔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길게 뽑아낸 거대한 청룡 언월도.

그리고 그 칼만큼이나 아무 감정도 소리도 없이 이어지는 무참한 참격(斬擊).

그것은 이미 사람이 아닌, 거대한 칼의 도래(到來)일 뿐이었다.

그렇게 여진군에 새로운 악몽이 닥쳐왔다.

흰 눈이 덮인 들판이 여진의 붉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영주 성의 얼어붙은 성곽에서 그 모양을 내려다보던 고려군들에게는 아름다운 꽃이 엄동설한에 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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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7 274 3 8쪽
31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6 307 2 14쪽
30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2 343 3 9쪽
29 옥오지애(屋烏之愛) 20.03.31 365 3 9쪽
28 옥오지애(屋烏之愛) 20.03.30 357 3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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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6 583 6 9쪽
14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5 614 7 9쪽
13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4 658 9 9쪽
12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3 709 9 8쪽
11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2 766 9 9쪽
10 적반하장 賊反荷杖 20.02.29 766 9 8쪽
9 오합지졸 烏合之卒 20.02.27 862 1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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