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좌능선의 서재입니다.

광검사 狂劍士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완결

좌능선
작품등록일 :
2020.02.18 15:35
최근연재일 :
2020.04.16 16:33
연재수 :
37 회
조회수 :
24,501
추천수 :
249
글자수 :
140,352

작성
20.03.19 12:46
조회
443
추천
7
글자
7쪽

춘설난분분 春雪亂紛紛

DUMMY

준경은 해가 중천에 뜬 이후에서야 주막을 나섰다.

오랜만에 군영이 아닌, 뜨끈하니 데워진 방에서 잠을 잔 덕에 몸이 가뿐했다.

간밤 항아와의 시간은 길고도 짧았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젊디젊은 남녀의 시간이란 늘 그렇듯 스쳐 지나는 순간이다.

준경이 잠을 깨었을 때 이미 항아는 없고 탁자에는 귀한 인삼 죽이 놓여있었다.

죽이 식지 않도록 누비 솜으로 감싼 것과 차가운 동치미 국물이 놓인 것이 세심함 항아의 마음 씀으로 보였다.

잠시 마음이 울적해진 준경이 창호지로 감싸진 창문을 열었다.

제법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진 창문은 소리 없이 열리고 창밖에 야트막한 능선들이 보였다.

산야에는 간밤에 눈이 더 많이 내려 온통 흰 꽃 천지였다.

겨우내 마주하던 눈 쌓인 산야도 병영에서 바라본 것과 달랐다.

춥고 늘 삭막한 병영에서 바라보는 눈 쌓인 풍경은 이가 갈리는 고난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따뜻한 방에서, 따뜻한 죽그릇을 두고 지분 냄새가 아직 감도는 아침에 보는 산야는 완벽하게 다른 풍경이었다.

” 올해는 눈이 잦아 풍년이 들겠구나! “

저도 모르게 노인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감탄하는 준경이였다.


준경이 나서는 길 문간에 지난밤을 함께 잠들었던 여인 항아가 나와 있었다.

누비옷에 값비싼 담비 목도리까지 두르고 나섰건만 여인은 아침의 추위에 가볍게 떨고 있었다.

노류장화(路柳墻花) 라고 했던가.

기실 이 머나먼 북방의 이름 모를 조그마한 산성 뒤에서,

뭇 사내들의 목숨값으로 명을 부지하고 있는 논다니 란 입장에서 ‘정’ 이란 허울 좋은 장식 같은 것이리라.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가 없어지면 그냥 버리면 그뿐 인 그런 것이다.

최전방에서 오늘이건 내일이건 언제 죽을지 기약이 없는 병사의 입장도 그리 다르지 않다.

어제든 언제든 죽었을지도 모르고, 앞으로도 그리 죽을 일이 부지기수일 터.

애써 노류장화 같은 여인에게 정을 둘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하룻밤 풋정이라곤 해도 남녀 관계라는 것이 그리 간단한 것만은 아닌 게 또 현실이니.

얼굴을 마주한 게 한나절이 채 안 된다고 할지라도,

게다가 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맺어진 관계라고는 해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최전방 북단, 것도 한겨울의 삭풍 아래 뜨거운 몸을 나눈 사이고 보면 어딘가 남 같지 않은 감정들이 솟는 것 또한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도리.

게다가 서로 과거 패망한 한 나라의 귀족 출신 유민이었음을 간밤에 확인한 까닭에,

동병상련이라, 두 사람은 짧디짧은 만남에도 마음에 깊은 인상이 새겨졌다.

고작 하룻밤 인연인 준경을 굳이 나서서 배웅하는 항아의 마음은 그런 탓에 심란했다.


“ 이제 가시면 이짝으론 다시 올 일 없으시겠습니다.”

간밤의 끈끈하던 교성은 온데간데없이 쌀쌀맞을 만큼 착 가라앉은 항아의 음성.

준경은 더벅머리를 긁적거렸다.

제아무리 거칠고 막 돼먹은 그지만 그녀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 못 할 일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계집의 마음을 두고 다 내려놓고 주저앉거나 할 만큼 세상이 맘먹은 대로 되지 않는 터.

가볍게 정이 들었다고 마음이 흔들릴 만큼 만만한 세월을 살아오지 않은 것은 준경이나 그녀나 다르지 않다.

“ 여진 군들이 이곳에 다시 쳐들어온다면, 그리된다면 다시 오지 않겠느냐?”

항아는 추위에 파래진 입술 꼬리를 말아 올리며 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 그리해서, 그 녘의 모가지라도 나뒹굴면 날랑 그 모가지 주워다 제사라도 지내리까?

참 태평한 소리 하시는구려.

결국, 수라장이 벌어져야 다시 온다는 말 아니오? ”

모진 말을 뱉은 항아의 고개가 휙 하니 모로 꼬인다.

준경은 큰 덩치를 숨길 길 없이 거북스러워 다시 더벅머리만 긁적인다.

“ 미안쿠나. 허나 나는 나라에 매여있고, 무(武)에 뜻을 둔 자.

안온한 살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들판의 승냥이다.

어찌하겠느냐? 네 모진 말에 더 가슴이 아프구나. “


항아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곤 뒤돌아서서 가만히 노랫가락을 읊조린다.



『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저를 버리고 가시렵니까?


저는 어찌 살아가라고

저를 버리고 가시렵니까?


붙잡아 두고 싶지만

다시는 오지는 않을까 두려워


사랑하는 님 보내 드리니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그녀의 처연한 노랫가락에 준경은 멍 하니 먼 산야를 바라보았다.

차갑게 솟은 성벽의 곁으로 간밤이 벌여놓은 하얀 눈 천지의 세상이 보였다.

온통 흰색으로 가득한 세상은 늦은 아침 햇살에 수정처럼 반짝 이는데,

삭풍은 뺨을 베어갈 듯 차갑게 인정사정없다.

하늘은 호수라도 엎어 놓은 듯 시퍼렇게 밝은데, 먼 창공에 송골매 한 마리 빙빙 돈다.

준경은 뒤 돌아선 항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리곤 홱 돌아서서 석성의 후문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품속에 있던 군표 여남은 장을 모두어 항아의 손에 쥐어주곤 돌아서며 준경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 그 돈으로 어림도 없겠다만, 날 풀리면 가능한 개경으로 가거라.

그곳 뒷골목에서 내 이름 석자를 댄다면 아마 가게 하나쯤은 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 해봐야 그정도겠구나.

나는 가정이나 여인보다는 군문에 몸을 바친 사람이다.

평화로운 집안 보다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 더 익숙한 전쟁귀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할 수 있다면, 가능한 네 삶의 새로운 터전을 찾아 보려무나. “

” 그럼 당신은 전장에서 평생을 전전하다 죽기를 바란다는 말 입니까?

하물며 우리같은 천한 것들도 내일이라는 믿지못할 희망이나마 붙들고 사는데 말이오. “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항아는 파르라니 눈초리를 곤두세웠다.

” 그런게 아니다.

내 천성이 전장을 좋아하고, 그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있어야 사는 느낌을 가지는 탓 이다.

옳고, 그른 그런 문제가 아닌 내 타고난 천성이 그렇다는게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은 멀쩡한 가정을 꾸려 평화로이 사는게 안맞는 다는 말이지. “

준경은 몰랐다.

자신의 그러한 천성으로 말미암아 먼 훗날 평화의 시기가 왔을때도 결코 자신은 그 평화를 누릴수 없는 운명에 휘말린다는 것을.

모름지기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살아가게 된다고 할까.

뒤돌아 말없이 눈길을 걸어가는 준경의 귓가에 항아의 억눌린 흐느낌이 들린다.

햇볕이 눈부시게 밝은 아침인데, 때 없는 눈발이 다시 흩날리며 반짝였다.

아직은 이른 아침인데 이따금 불어오는 최전방의 삭풍 바람소리 사이로 간간이,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가 섞여 떠나가는 준경의 발목을 휘감았다.




‘ 가시리 ’ 고려가요 원전 (악장가사 수록)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는

버리고 가시리잇고 나는

위 증즐가 대평성대(大平成代)


날러는 어찌 살라 하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나는

위 증즐가 대평성대(大平成代)


잡사와 두어리마는

선하면 아니 올세라

위 증즐가 대평성대(大平成代)


설온 님 보내옵나니 나는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나는

위 증즐가 대평성대(大平成代)』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광검사 狂劍士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사망유희(死亡遊戲) 20.04.20 237 0 -
37 일장춘몽 (一場春夢) 20.04.16 350 2 7쪽
36 광검출도 (狂劍出刀) 20.04.15 289 2 12쪽
35 광검출도 (狂劍出刀) 20.04.14 269 2 9쪽
34 광검출도 (狂劍出刀) 20.04.10 296 2 8쪽
33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8 274 2 6쪽
32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7 273 3 8쪽
31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6 307 2 14쪽
30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2 343 3 9쪽
29 옥오지애(屋烏之愛) 20.03.31 363 3 9쪽
28 옥오지애(屋烏之愛) 20.03.30 356 3 8쪽
27 만부부당 萬夫不當 20.03.27 355 4 9쪽
26 만부부당 萬夫不當 20.03.26 355 3 8쪽
25 만부부당 萬夫不當 20.03.25 366 3 7쪽
24 전화위복 轉禍爲福 20.03.23 407 6 9쪽
23 전화위복 轉禍爲福 20.03.20 414 5 8쪽
» 춘설난분분 春雪亂紛紛 20.03.19 443 7 7쪽
21 춘설난분분 春雪亂紛紛 20.03.18 434 7 8쪽
20 춘설난분분 春雪亂紛紛 20.03.16 468 7 9쪽
19 천방지축 天方地軸 20.03.13 498 6 8쪽
18 오비이락 烏飛梨落 20.03.12 478 6 8쪽
17 오비이락 烏飛梨落 20.03.11 527 6 10쪽
16 전신강림 戰神降臨 20.03.10 538 6 10쪽
15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6 579 6 9쪽
14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5 614 7 9쪽
13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4 658 9 9쪽
12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3 709 9 8쪽
11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2 764 9 9쪽
10 적반하장 賊反荷杖 20.02.29 766 9 8쪽
9 오합지졸 烏合之卒 20.02.27 862 10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