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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능선의 서재입니다.

광검사 狂劍士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완결

좌능선
작품등록일 :
2020.02.18 15:35
최근연재일 :
2020.04.1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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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4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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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3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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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옥오지애(屋烏之愛)

DUMMY

영주 성에서의 하룻밤 이후, 설중매는 스스럼없이 준경의 처소에서 함께 지냈다.

처음 준경은 승려 동문에게도 민망하기도 하고,

전장의 한복판에서 보일 모습이 아닌 듯하여 졸자들에게도 계면쩍었으나,

오히려 그들은 거의 무관심한 행색 이어서 자신도 곧 그냥 적응하고 말았다.

왈패 시절에도 항상 부하들과 함께 진창을 뒹굴던 그에게 갑자기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따로 숨기듯 한다는 것은 준경의 성품에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그로서도 사내들이 득시글거리는 전쟁터에서의 나날을 보내면서,

설중매와 함께 지내며 심신의 위로를 받는 것이 무척 크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주변 동료들이 시샘은커녕 거의 무관심한 시선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 실은,

설 낭장으로부터의 우격다짐들로 비롯되었었다는 것을 준경이 알 리 없었다.

설중매가 휘하의 군사들을 모아놓고 했던 일장 연설은 준경만 빼곤 다 아는 사실 이었다.

“ 난 어젯밤 이후로 척 장군의 수신호위 이자, 장군의 여인이 되었다.

여인이기도 하고 낭장으로서 너희들의 상관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앞으로는 장군의 숙소에서 기거할 것이니 이 사실에 불만이 있거나,

뭔가 구시렁구시렁 거리며 뒷전에서 소리를 하는 자가 눈에 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그놈의 양물을 잘라서 성 밖 승냥이 먹이로 던져 줄 것이니 명심하라. “

휘하의 군졸 중에 설중매가 익히 그러고도 남을 여자라는 것을 믿지 않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준경과 설중매가 어느 날 아침 숙소에서 함께 나서는 것을 보더라도,

모른 채 묵례만 하고 도망치듯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곤 했다.


1108년 2월 임진일 에 여진의 군사 수만 명이 웅주성( 雄州城 : 함경남도 길주군 동해면)을 포위하였다.

윤관이 동북 9성에 병력을 분산 배치한 상황이라 당시 웅주성에 정규군은 불과 이천여 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를 파악한 여진 군은 압도적 군세로 웅주성을 삼켜 남방 개척의 돌파구로 삼고자 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무장들의 승급에 따른 진지 이동이 있던 터라,

웅주성의 최고 지휘자는 행정 관료인 주수(州守) 외에 최고무장은 척준경밖에 없었다.

최초 여진 군의 침공에 대해 고려군과 성내 주민들은 합심하여 치열하게 싸웠다.

성내 병력의 열 배가 넘는 여진 군의 포위 공격에서 그나마 성을 지켜 낸 것은 수적으론 적어도 그동안의 숱한 전투를 통해서 단련된 정예병이라는 점이 컸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은 제아무리 용맹한 군사라도 어쩔 수 없는 법.

때는 2월.

성에 비축해 놓았던 식량은 성내 주민을 위한 것 외에 갑자기 불어난 군사 이천 명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물론 군량이 군사를 따라 오는 법이지만,

때가 겨울이고 빙판이라 우마차로 실어오는 군량은 늘 보병들보다도 느려서,

보통 일주일 정도 차이를 두고서야 성에 공급이 되곤 했는데 포위가 일주일을 넘어 열흘이 넘어가자 당장 식량난이 성안에 닥쳐왔다.

게다가 화살 등 무기들도 점점 동이 나서, 더 버티기가 어려워지는 상황.

여진 군은 다수의 병력으로 밤낮없이 공성전을 펼쳤다.

그들의 전략은 단순했다.

지속적인 공성 사다리 걸치기.

방패를 내세운 사다리를 통한 공격.

고려군이 장거리에서 할 수 있는 건 화살 공격과 사다리에 투석하거나 끓는 기름을 붓는 방법이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모든 재료가 소진될 지경이 되었다.

숫자에서 밀리는 고려군이 만약 여진 군의 진입을 조금이라도 허용하는 순간,

성내 전 인원이 옥쇄(玉碎)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돌아가는 형세를 판단하면 이미 웅주로 군량을 가져오던 보급대는 궤멸 했을 것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문제는 그 상태를 본대가 주둔하고 있는 정주성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적의 포위망이 군량 보급 이후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 충분히 한 달여는 버틸 것이라 오판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웅주의 군사들은 올지 안 올지도 모를 구원병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보름이 지났다.

이제 군량은 바닥이 드러나서, 성내 백성들이 개인적으로 비축해 놓은 식량들을 공출해서 근근이 한 끼를 채우는 상황이었다.

제아무리 만부부당(萬夫不當)의 용력을 지닌 준경이라 할지라도 이런 경우는 남감했다.

그럴 때 주수(州守)가 준경을 불렀다는 소식이 들렸다.

문관 출신 주수(州守)가 마땅치는 않았으나 엄연한 상관.

보름간 거의 씻지도 자지도 못해 수척해진 준경이 주수의 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주수(州守)가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을 지킨 지 날이 오래되어 군량이 다 끊겼고 밖으로부터의 구원병은 이르지 않았으니,

공이 만약 성을 나가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 구하지 않는다면 성안의 군사는 살아남는 자가 없을 것이다.

공이 외부로 나아가 정주성에의 본대에 구원 요청을 하라 " 하였다.

좀 난감한 일이었다.

최초에 성이 포위되기 직전에 많은 적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챈 준경이 주수에게 아뢴 일이 있다.,

” 지금 여진의 무리가 성을 포위할 목적으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들의 포위망이 구축되기 전에, 정주성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파발을 띄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윤관처럼 문관 출신이지만 전시인 만큼 웅주성주로 지휘권을 가진 주수는 준경의 진언이 마뜩잖았다.

” 척 공은 일찍이 소수의 병력으로 적들을 격멸한 전과가 혁혁하지 않소?

그런 귀 공이 아직 적들이 도착도 하기 전에 정주성에게 가서 우는소리를 하자고 하니 의외구려. “

뭔가 삐딱한 주수의 말을 들은 준경은 심사가 꼬였으나,

그렇다고 상관의 말에 대놓고 반박을 하기는 어려웠다.

” 적도들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게 되면 서너 겹의 포위망을 구축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아무리 돌격대를 조직해도 그 포위망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데다가,

웅주성의 위치가 여진족이 사는 땅에 깊숙이 들어와 있어 백성들의 도움을 받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게다가 식량이나 무기들이 아직 충분하지 않고 정주성으로부터 보급을 통해 받기로 되어있는데 지금 척후의 말을 들어보면 보급대가 오기도 전에 적도의 포위망이 구축될까 두렵습니다. “

” 거참, 그렇다고 해도 내가 이곳의 주수로 온 게 아직 채 일 년이 안 되었단 말이오.

내 힘으로 성 한 개를 오랑캐로부터 지키지 못해 미리 겁을 먹고 정주에 붙어 우는소리를 하라고? 귀 공은 내 출셋길을 아예 막아놓을 셈이오? “

이 지경에서도 자신의 진급과 중앙으로의 진출을 생각하는 주수가 어처구니없다.

하지만 준경도 그렇게까지 주수가 말을 하는데 더 진언하기도 어려웠다.

계급은 계급이니까.


그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

주수는 낯 간지러운지도 모르고 오히려 준경을 힐책했다.

” 어찌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일찌감치 구원 요청을 안 했단 말이오? “

” 주수 어른. 제가 적이 포위망을 조여오기 전에 구원 요청을 진언한 바 있습니다만. “

억울한 음성으로 입을 여는 준경의 말을 주수는 단칼에 자른다.

” 뭔 소리! 물론 내가 주수이긴 해도 실제로 무과 출신은 귀공 아니오. 내가 귀공에게 지시한 것은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면에서 말을 하는 것이고,

전장에 경험이 많은 귀공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던가 다른 수단을 취해야 하는 거 아니오? “

기가 막혔지만 그런 게 어찌 보면 정치로 구나 싶은 생각이 든 준경은 ‘알았노라’ 간단히 대답하고 휘하 부장들을 모아놓고 주수의 지시를 알렸다.

예견했던 대로, 휘하 부장들은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 장군! 지금 여진 군이 포위한 병력만 해도 우리의 열 배가 넘습니다.

게다가 이 성은 이미 여진 땅에 들어와 있는 성.

온 사방이 적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정주(평안북도 정주)까지의 거리는 이리저리 길을 잘 찾아도 무려 500리 (200km) 가 넘습니다. 또한, 한겨울.

피할 곳 몸 숨길 곳 하나 없고 민가라곤 모두 여진의 민가 일터,

지금 주수께서는 장군을 사지(死地)로 들어가라 하는 게 아닙니까?

이곳에서 버텨야 합니다! “

대표로 입을 연 부장의 말에 모든 부장이 입 맞춰 ‘그렇습니다! 장군’ 이라 복창을 한다.

준경은 일어서서 말을 꺼낸 부장과 자신을 향해 안타까운 눈길을 보내고 있는 휘하의 부장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답지 않게 수척해진 얼굴, 그리고 보기 드물게 침중해진 표정으로.

준경이 천천히 갈라 터진 입술을 열었다.

“ 나 말고, 무려 오백 리 길 첩첩산중으로 쌓인 적의 무리를 뚫고 정주로 가서 구원 요청을 할 수 있는 무력(武力)을 지닌 자 있더냐? 나오라.”

준경의 말에 부장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그것은 그들의 용맹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 누구라도 준경의 武에 필적할 사람이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부장들의 눈에 준경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부장들이 일제히 울분에 찬 통곡을 터뜨렸다.


삭풍이 이는 동북의 밤. 사나이들의 거친 울음소리가 늑대 소리처럼 메아리쳤다.

먼 데서 다시 공성전을 시작한 여진 군의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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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2 343 3 9쪽
» 옥오지애(屋烏之愛) 20.03.31 364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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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3 709 9 8쪽
11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2 764 9 9쪽
10 적반하장 賊反荷杖 20.02.29 766 9 8쪽
9 오합지졸 烏合之卒 20.02.27 862 1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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