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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능선의 서재입니다.

광검사 狂劍士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완결

좌능선
작품등록일 :
2020.02.18 15:35
최근연재일 :
2020.04.16 16:33
연재수 :
3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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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4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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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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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전신강림 戰神降臨

DUMMY

혜승은 계도(戒刀 불가에서 사용하는 상징적 칼. 보통은 날이 없이 항마의 목적으로 쓴다)에 묻은 피를 칼을 크게 휘둘러 털어냈다.

성벽 위 내 탁(內托 성벽 위 사람이 움직일 공간) 은 산에 쌓은 터라 보통의 성곽보다 훨씬 비좁은 1장 (1장 = 10자[尺] = 3.03m ) 가량밖에 안되었다.

그것이 오히려 혜승의 입장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일단 내 탁 위에 오르고 나자, 그가 상대할 적 들은 앞, 뒤 두 군데뿐이었다.

그 협소한 공간에서 혜승을 동시 공격할 수 있는 인원도 앞뒤 두세 명 이상은 곤란했다.

일단 무기를 휘두르면서 둘 이상이 공격하긴 어려운 공간.

모처럼 혜승은 전장의 특성과 다른 비무 비슷한 것을 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일반적 의미의 비무와는 다른,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긴 하지만.

혜승은 내 탁에 오르자마자 십여 명의 목을 베었다.

문자 그대로 전광석화.

여진의 병사들이 우수하다고는 하나, 수저를 들 기운이 있을 때부터 무공으로 단련된 혜승의 적수는 아니었다.

혜승은 덤벼드는 적들을 마치 칼춤이라도 추듯 앞뒤로 빙빙 돌아가며 정확하게 목을 베었다.

대부분 칼 혹은 검으로 덤벼들던 적들은 마치 수숫단 베듯 가볍게 목과 팔 등을 쳐내는 혜승의 칼질에 질려서 잠시 멈춘 상태였다.

그리고 그 찰나의 틈을 타 혜승의 앞뒤로 돌격대 여남은 명이 솟구쳐 올라왔고,

이내 쇄도하는 적 수비병들과 미친 듯 칼부림이 벌어졌다.


잠시 전장에서 눈을 돌린 혜승은 이십 여장 건너에서 살육전을 펼치고 있는 준경을 보았다.

준경이 일전의 전투에서 하사받았던 청룡언월도는 너무 길어서 마상이 아닌 일반적인 접전에서는 들고 다니기도 불편했다.

그래서 기병은 아니었던 준경은 언월도의 손잡이를 늘리고 줄일 수 있게 만들어 단창처럼 바꿔 어깨에 둘러메고 다녔었다.

그 기형적 언월도는 지금 준경의 한 손에 들려서 마치 커다란 칼처럼 휘둘려지고,

거기 부딪치는 적들의 칼, 검, 창 할 것 없이 두 쪽을 내고 있는 판이었다.

원래도 도신의 무게가 상당한 언월도에 준경의 타고난 용력, 거기에 사나운 기운이 더하여 언월도는 전장의 작두처럼 앞에 걸리는 모든 것을 잘라낸다.

자기 자신도 조금 전까지 인정사정없이 적들의 목을 쳐냈지만,

지금의 준경이 벌이고 있는 살육의 장은 목불인견이었다.

마치 풍차가 돌아가듯 언월도가 핑핑 돌고,

거기 걸린 모든 것이 잘리고 으깨어지며 성곽 밖으로 쏟아지고 있는 눈발처럼 흩날리는 것을 보며 혜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혜승 자신이 적들의 목을 한칼에 잘라내는 것은 일종의 ‘배려’였다.

불살 계를 깨고 적이지만 사람을 죽인다는데 일말의 가책이 없지 않다.

어차피 상대를 해하는 것이라면 고통에 몸부림치지 않게,

가장 덜 고통스럽게 저승으로 보내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혜승이다.

하지만 그의 사제, 준경은 이런 순간에 보면 그냥 살생을 즐기는,

어쩌면 전장에서야 사는 맛을 느끼는 전장의 신 같았다.


준경과 혜승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성벽 아래.

그 아래 팔 장 밑에는 앞서 떨어져 내린 공유의 시신이 언뜻거리는 눈발을 맞고 있다.

승려치곤 지나치게 잘 생겼다고 여신도들에게 칭송받던 그의 머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문득 혜승은 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 과연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지 회의가 들었다.

따지고 보면 여진족 그들도 한때는 부여라는 국가의 일원으로 요동을 호령하던 백성들.

고구려의 후예들로 이루어진 국가가 부여였으니 근본을 더듬어보면 자신들과 다르지 않은,

한 핏줄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오랜 세월 동안 만주의 유목민들과도 합쳐져 여진이 된 것이라,

꼭 한민족이라 하기도 어려운 것은 있었으나, 말이 통하고 관습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 윗사람들이 잘만 협조했으면 이런 전쟁은 필요 없을 수도 있었다.

고려 또한 고구려를 따르고자 국호를 고려라고 한 것 아니었나.

여진의 주된 세력들이 대부분 고구려의 먼 후손이라 생각하면 그리 먼 관계만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뿌리가 어찌 되었건 서로 조금의 땅 이라도 빼앗기 위해 끝없이 싸운다..

그리고 전장에서 마주치는 적들과는 그런 거창한 대의명분조차도 없다.

그저 살기 위해서,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악귀가 되어가는 것이다.


잠시 한가한 생각에 빠졌던 혜승이 정신을 차려보니,

그를 따라 오른 승병들에 의해 이미 주변의 여진 군은 모조리 정리되었다.

그 뒤를 다시 채우기 위해 내 탁에 연결된 계단으로 여진 병들이 뛰어오르는 게 보였다.

준경은 순식간에 이십여 명에 이르는 적을 다 날려버리고 거꾸로 계단을 타고 내성으로 돌입하고 있고, 그제야 그쪽의 승병들이 성벽을 오르는 게 보였다.

지금의 준경은 마치 꼬리에 불이라도 붙은 호랑이 같았고,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이 처음 무공을 가르친 사제이긴 하나, 저처럼 분노한 준경은 선사조차 감당이 안 된다는 걸 혜승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무공으로는 젓가락을 사용할 수 있던 나이 때부터 무공을 배워온 혜승을 준경이 감당할 수 없다.

준경이 타고난 신체조건이 우월하고, 그 힘과 함께 장바닥에서 배워온 온갖 잡술들이 꽤 대단하다고는 해도 아예 어릴 때부터 불가의 칼로 정련된 혜승에게는 못 미쳤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무술 대련의 문제.

생과 사가 엇갈리는 전장.

그 무엇도 장담할 수 없는 전장의 난장판에서는 단연 준경이 혜승을 압도했다.

혜승은 어쩌면 그것은 자신에게 남은 불자로서의 일말의 측은지심.

불살 계를 깰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인명을 덜 해치고 싶은 마음과는 아예 다른,

준경이 타고난 사나움 때문일 거라 막연하게 생각하곤 했다.

혜승이 잘 훈련된 사냥개라고 한다면 준경은 그냥 들판에서 자란 늑대.

싸우는 법을 따로 배우지 않았더라도 만약 생사가 달린 전장에서 준경과 적으로 마주쳤다고 생각하면, 혜승 자신도 꼭 이길 수 있으리라는 자신은 없다.


한참이 지나도록 비명과 욕설이 성 밖까지 난무하는 걸 본 이관진 장군은 어찌해야 하나 망설여졌다.

원래대로 라면, 일단 돌격대의 성곽 진입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면 자신이 본대에 신호해야 했다.

그건 최소 성문이 열릴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난전이 벌어지면 자신이 들고 있는 돌격 깃발을 휘두르고,

그에 맞춰 본대가 함성을 지르며 성으로 돌입한다.

최소한 화살 벼락을 맞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면 적들이 동요하면서 다시 성벽으로 오르려 할 것이고,

돌격대는 성문을 지키는 적들을 제압해서 성문을 개방한다는 게 이 작전의 요지였다.

이를테면 동성서격 동성서격이요, 허허실실이다.

그러려면 지금쯤은 돌격 기를 휘둘러야 시점이 맞는 것인데, 이관진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굳이, 저 미천한 놈이 전공을 더 높이 세우게 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적들이 농성한다고 해도 그뿐, 병력의 격차 때문에라도 성에 들어간 진입 병들은 곧 항복하고 말 것이다.

자신이 지휘할 성 밖 병사들의 호응이 없다면 말이다.

어차피 상황판단은 현장의 지휘관인 자신이 하는 것.

그런데 굳이 이렇게 피튀기게 다퉈가며 준경이란 놈이 전공을 세우는 건 마뜩잖았다.

미천하고 사납기만 한 준경이 일전의 전투에서 대장군 눈에 든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런 일로 더 승승장구하도록 날개를 달아줄 필요는 없다.

여기서 준경과 돌격대가 다 죽고, 성 공략이 실패한다고 해서 고려가 전쟁에 지는 것도 아니다.

그냥 조금 물러갔다가 다시 대군을 끌고 오면 그만이고 그렇게 여진과 일진일퇴를 하다 보면 봄이 온다.

그동안에 자신도 다시 다른 곳으로, 좀 더 편한 자리로 갈 수도 있다. 귀족이니까.

그러하니 이곳에서 저 살벌하고 미천한 자에게 한 손을 보태줄 일은 없는 것이다.


잠시 이관진이 갈등을 빚으며 머뭇거리는 사이 삐걱 소리를 내면서 성문이 슬그머니 열리는 게 보였다.

이관진은 흠칫했다.

혹시 역습하러 여진놈 들이 튀어나오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성문이 활짝 열리도록 아무런 큰 기척이 없었다.

이관진 장군은 주저주저하는 사이 성문이 크게 열렸다.

굵어진 눈발에 잘 보이진 않지만, 민머리 들이 희끗거리는 것이 승병으로 보여 일단 안심했다.

그런데 그들은 분명 회색빛 등갑을 입고 출전했는데, 눈발 사이로 보이는 옷이 벌겋게 보여서 뭔가 싶었다.

그리고 더 가까이서 본 그들의 모습, 그리고 성안의 모습.

전장을 두루 겪은 역전의 용사라고 자부하는 이 장군도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열 명이 채 안 되는 승병들은 붉은 옷을 입은 게 아니라 피 칠갑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더는 승려가 아니라, 지옥을 지키는 아수라들 같았다.

그리고 아직도 더운 김이 솟아오르는 성문 앞 안쪽.

그곳에는 여진 군으로 보이는 시체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그 처참한 정경 앞으로, 혼자 멀쩡히 피도 그다지 묻지 않은 상태의 혜승과,

온몸에 피를 두른 악귀처럼 보이는 준경이 희게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이진관 장군은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짐승 같은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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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광검출도 (狂劍出刀) 20.04.10 296 2 8쪽
33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8 274 2 6쪽
32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7 274 3 8쪽
31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6 307 2 14쪽
30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2 343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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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4 658 9 9쪽
12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3 709 9 8쪽
11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2 766 9 9쪽
10 적반하장 賊反荷杖 20.02.29 766 9 8쪽
9 오합지졸 烏合之卒 20.02.27 862 1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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