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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능선의 서재입니다.

광검사 狂劍士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완결

좌능선
작품등록일 :
2020.02.18 15:35
최근연재일 :
2020.04.16 16:33
연재수 :
37 회
조회수 :
24,539
추천수 :
249
글자수 :
140,352

작성
20.03.18 11:31
조회
434
추천
7
글자
8쪽

춘설난분분 春雪亂紛紛

DUMMY

여인이 밤안개처럼 뿌옇게 일렁이는 목간통의 김 위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곤 자신의 나신을 바라보는 준경을 의식하고 있다는 듯 몹시 완만한 자세로,

천천히 목간통에서 벗어나 곁 탁자에 놓아둔 수건으로 몸을 천천히 닦아 내었다.

난로가 후끈하게 데워진 방이라고는 하나,

추위가 매섭기 짝이 없는 최전선의 한겨울이다.

그런데도 그토록 천천히 몸에 젖은 물기를 닦아내는 여인의 모습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지만,

그런데도 그것이 음탕하거나 부러 상대방을 유혹하려고 하는 행동으로 보이지는 않는 게 재주였다.

희고 긴 목덜미, 달걀처럼 매끄러운 어깨, 그리고 버선코처럼 오뚝 솟은 가슴,

버들가지처럼 휘어진 허리를 지나 풍만한 둔부를 언뜻언뜻 보이며 물기를 꼼꼼히 닦아 나간다.

이내 그 동작들이 끝나자 여인은 탁자에 놓인 매미 날개처럼 얇디얇은 나삼(羅衫)을 걸치곤,

촉촉하게 젖은 까만 눈망울을 들어 준경을 지긋이 건네 본다.

눈에 핏발이 곤두선 상태로 군침을 꿀꺽꿀꺽 삼켜가며,

상처투성이 몸뚱이를 드러내고 앉아 유녀(遊女)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준경의 입에서 문득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 항아(嫦娥)라고 했더냐? 너희들은 언제부터 여기서 영업을 하고 있었던 게냐?”

항아라고 불린 계집은 젖은 눈을 크게 홉뜨고 준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눈꼬리가 샐쭉하니 올라가며 몽롱했던 시선이 또렷하게 바뀐다.

“ 이미 수년 되었다 들었습니다. 소녀가 이곳에 온 것은 지난해 여름이고요.”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귓전을 울리는 것이 오히려 은근히 음욕(淫慾)을 돋우지만, 준경은 끄덕 않고 다시 물었다.

“ 하면, 이미 여진 군이 석성을 장악하고 있을 때도 영업을 했겠구나? 몸도 팔고?”

여인은 준경의 사나운 말투에 흠칫하더니,

침상 맞은편 탁자 앞 의자에 나긋하게 내리 앉는다.

입으나 마나 한 나삼 속 여인의 가슴이 도발이라도 하는 듯 준경을 향해 내밀어져 있다.

“ 하면, 저희가 무엇으로 이런 전방에서 먹고 살리까?

장군. 저희 직업은 바로 이런 겁니다.

이곳 북방의 경계는 한 달이 멀다 주인이 바뀌는 곳,

여기서 오는 객을 마다할 이유가 있습니까?

마다한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


그녀의 당당한 답변에 준경은 잠시 멍청해졌으나, 이내 말을 이어간다.

“ 그래도 너희는 엄연한 고려 백성이 아니더냐?

오랑캐에게 몸을 팔면서까지 살아야 하겠더냐?”

갑자기 까르르 유녀가 높은 웃음을 흘린다..

한참을 그리 웃더니 유녀가 다시 반듯하게 준경을 바라본다.

그 검고 큰 동자 가득 물기가 배어있다.

“ 백성 말입니까? 저희의 원래 고향은 서라벌입니다. (신라의 수도 경주)

일찌감치 나라를 빼앗겨 멀쩡한 신분에서 비로 신분이 정해지고,

점령군에게 몸을 파는 신세가 된 게 처음은 아니지요.

게다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최전방 북단.

그들이 여진이라고는 하나, 우리와 마찬가지 말을 쓰고 있는 고구려의 후예들,

무에 그리 다르단 말입니까?

굳이 따지고 들자면 이번 전쟁을 시작한 것도 고려 아닙니까?

허면 고려의 군사들이 저희를 지켜주지 못하고 일찌감치 도망하고 했을 때,

저희 같은 민초(民草)들은 모두 목을 내밀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아무것도 지켜주지 못하며 필요할 때는 요구만 하는 게 조국입니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전 신라였을 때는 저도 귀족의 신분이었고,

고려로 나라가 바뀌며 기녀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일반 백성들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 없이 거기서 거기. 나라가 바뀌었다고 세금이 적어졌다거나 먹고 사는 게 편해졌다는 것은 없습니다.

윗전이 바뀌었다고 아랫것들의 삶이 무에 그리 달라지겠습니까?

하물며 그것이 여진이라는 이름이라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그녀의 논리정연한 말에 준경은 얼굴이 붉어졌다.

어찌 보면 이런 곳에서 명분을 찾으려는 자신이 문제일지도 몰랐다.

“ 물론 네 말이 옳다.

그렇다곤 하지만 같은 말을 쓴다고 해도 여진과 우리는 다르다.

나 역시 멀게는 신라의 유민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라 이름이 바뀌어도 우리는 같은 민족이고 같은 겨레.

그와 달리 문화도 사는 방식도 완전히 다른 저들 여진이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부류가 있다 해서 우리의 겨레는 아니다.

너 또한 그것은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굳이 저들에게 술을 팔고 웃음을 팔아 연명하는 게 옳다는 거냐? ”


준경의 힐난에도 유녀는 피식 웃으며 코웃음 친다.

“ 그토록 겨레, 겨레 하시는데 그 겨레는 늘 윗전의 양반들만 살리려 애를 쓰는 법이지요.

정작 우리 같은 떨거지들이야 몇이 나가 죽건 별로 상관 않는 게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뭔가 궁하면 우리 같은 것들에게 찾아와 술을 찾고 웃음을 찾고.

심지어 소갈머리까지 다 빼놓고 위안을 받기 원하곤 합디다.

그런 판국에 우리라고 고려, 여진 가려가며 손님을 받으란 말입니까?

최소한 저 오랑캐들은 그런 명분 같은 것은 안 찾더이다. ”


유녀는 말을 마치자 나삼 자락을 슬며시 열어젖히며 준경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장군, 이 짧은 밤에 무에 그리 불만입니까?

이미 장군의 창봉(槍棒)은 하늘이 높다 곤두서 있을 게 아닙니까?”

그녀의 지적질에 준경은 끙, 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밤은 깊고, 새로운 전투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 고려가요-작자 미상


<원문>

어름 우희 댓닙 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어러주글만뎜

어름 우희 댓님 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어러주글만뎡

정둔 오ᄂᆞᆳ밤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


耿耿孤枕上에 어느 ᄌᆞ미 오리오

西窓을 여러ᄒᆞ니

桃花ᅵ 發ᄒᆞ두다

도화ᄂᆞᆫ 시름업서 笑春風ᄒᆞᄂᆞ다 笑春風ᄒᆞᄂᆞ다


넉시라도 님을 ᄒᆞᆫᄃᆡᆧ

녀닛 景 너기더니

넉시라도 님을 ᄒᆞᆫᄃᆡᆧ

녀닛 景 너기더니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뉘러시니잇가


올하 올하

아련 비올하

여흘란 어듸 두고

소해 자라 올다

소곳 얼면

여흘도 됴ᄒᆞ니 여흘도 됴ᄒᆞ니


南山애 자리 보아 玉山을 벼여 누여

錦繡山 니블 안해 麝香 각시를 안나 누어

南山애 자리 보아 玉山을 벼여 누여

錦繡山 니블 안해 麝香 각시를 안나 누어

藥든 가ᄉᆞᆷ을 맛초ᄋᆞᆸ사이다 맛초ᄋᆞᆸ사이다


< 현대어 >

얼음 위에 댓잎 자리 펴서

그대와 내가 얼어 죽더라도

얼음 위에 댓잎 자리 펴서

그대와 내가 얼어 죽더라도

정든 오늘 밤 더디 새소서, 더디 새소서.


뒤척뒤척(근심어린) 외로운 침상(잠자리)에

어찌 잠이 오리오

서창을 열어젖히니

복숭아꽃 피어나도다

복숭아꽃은 근심이 없이 봄바람에 웃는구나 봄바람에 웃는구나.


넋이라도 그대와 함께

지내는 모습 그리더니

넋이라도 그대와 함께

지내는 모습 그리더니

우기시던 이 누구였습니까 누구였습니까


오리야 오리야

어린(연약한) 비오리야

여울일랑 어디 두고

못(沼)에 자러 오느냐

못이 얼면 여울도 좋거니 여울도 좋거니


남산에 자리 보아

옥산을 베고 누워

금수산 이불 안에

사향 각시를 안고 누워

남산에 자리 보아

옥산을 베고 누워

금수산 이불 안에

사향 각시를 안고 누워

약 든 가슴을 맞추옵시다 맞추옵시다


아! 그대여 평생토록 헤어질 줄 모르고 지냅시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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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7 275 3 8쪽
31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6 307 2 14쪽
30 백척간두 百尺竿頭 20.04.02 343 3 9쪽
29 옥오지애(屋烏之愛) 20.03.31 365 3 9쪽
28 옥오지애(屋烏之愛) 20.03.30 357 3 8쪽
27 만부부당 萬夫不當 20.03.27 357 4 9쪽
26 만부부당 萬夫不當 20.03.26 356 3 8쪽
25 만부부당 萬夫不當 20.03.25 367 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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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전화위복 轉禍爲福 20.03.20 415 5 8쪽
22 춘설난분분 春雪亂紛紛 20.03.19 445 7 7쪽
» 춘설난분분 春雪亂紛紛 20.03.18 435 7 8쪽
20 춘설난분분 春雪亂紛紛 20.03.16 468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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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오비이락 烏飛梨落 20.03.12 479 6 8쪽
17 오비이락 烏飛梨落 20.03.11 527 6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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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6 583 6 9쪽
14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5 614 7 9쪽
13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4 658 9 9쪽
12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3 710 9 8쪽
11 무신출림 武神出林 20.03.02 766 9 9쪽
10 적반하장 賊反荷杖 20.02.29 767 9 8쪽
9 오합지졸 烏合之卒 20.02.27 862 1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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