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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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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최근연재일 :
2015.02.2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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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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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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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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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회색시대-21.메마른.(6)

DUMMY

진이 깨어난 것은 전쟁이 종료되고, 왕을 자리에서 끌어 낸지 열흘이 지나서였다. 모든 마력을 다 갖다 부었으니 열흘 만이라도, 깨어난 것이 다행이었다. 진이 마른 입술을 달싹이자 옆에서 지켜보던 혜인이 얼른 달려와 물을 내주었다. 한 모금 겨우 콜록거리며 마시던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전쟁은?”

“이겼어.”


그렇구나. 기쁨도 감격도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전쟁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끝났다는 다행스러움에 더불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걱정들뿐.


“돌아가는 꼴, 엉망이지?”

“응…….”


무엇이 엉망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진은, 이제야 세상사를 조금은 배웠다 생각하는 진은 자기의 신세가 어떻게 될지 얼추 예상 가능했다. 전장에서 꽤 큰 힘을 보여줬다. 힘이었다. 하지만 그 힘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더군다나, 마지막에는 엄청난 군령 위반을 했다. 피해가 컸다. 혜인은 조심스레 설명했다.


“일단 네가 깨어나지 않아서 별 이야기는 안 나오는데, 돌아가는 눈치 보니까 군령 위반 때문에, 그…….”

“말하지도 않아도 알 것 같아.”


진은 말을 꺼내길 어려워하는 혜인을 막았다. 아마도 경계하면서도 원하겠지. 그러니 그를 다시 족쇄 삼아서,


“떠…날까?”


진의 말에 혜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가야 했다. 다시 돌아오더라도, 지금은 가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빠가 아마 인휘 아저씨랑 먼저 떠났을 거야. 지금 전쟁이 막 끝나고 모두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전후 처리 문제로 다들 바쁠 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네가 당장 일어나지 못하니까 감시도 소홀해. 거기에 오늘 마침 파티를 하고 있어.”


혜인은 제 아비에게 지금껏 몰래 받아왔던 소식의 한 축과 이곳의 소식을 진에게 설명했다. 아마 아버지와 아저씨는 준비된 서류와 함께 국경선 바깥으로 피신했을 것이다. 이는 도망이 아니다. 진은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서 그리 말하지 않았다. 몸을 수습하고 정신을 차리고, 더 배우고, 더 익혀서 돌아올 것이다. 돌아와서, 무엇을.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아는 것은 벽을 두드리던 사람처럼, 동아줄을 잡아 끌고 올라가 벽을 두드리리라. 자격은, 자격 따윈 모르지만, 도망이 아니라 다시 돌아와야 할길 이라는 것만은 안다.


“지금, 가자.”


몸은 아직 추슬러지지 않았지만, 지금 말고는 마땅한 때가 없었다. 몸이 나으면 아마도 또다시 이리 휩싸이고 저리 휩싸일 테니. 혜인도 그를 알기에 말리지 않고 회복제를 한 움큼 쥐어 먹이고 준비 된 짐을 챙겼다. 알 아마스 공이 준비해줬던 서류는 품에 넣었다. 겨울 옷 몇 가지가 전부인 도피길. 먼 옛날을 떠올리게 한다.


“가자.”


혜인은 비척거리는 진을 부축해 방을 빠져 나왔다. 모두가 승전의 기운에 취해 감시하는 이들, 둘러보는 이들 모두 기강이 해이해져 밖은 아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혜인은 주변을 잘 살피며 걸었다. 간단하게 마법을 걸어 사람의 시선을 피하게 했다. 여기서 나가면 어디서 마차라도 잡아서, 그렇게. 건물을 빠져 나와 계단을 내려갈 적에, 문득 진이, 아, 소리를 낸다.


“왜?”

“어, 아. 그림, 그림을 안 챙겼네.”

“아아.”


진이 마지막까지 붙들었던 그림, 완성한 그 그림, 혜인도 그 그림을 보았기에, 문득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진은 뒤를 돌아 제가 걸어왔던 길을 보더니 힘에 버거울 것이 뻔해 고개를 젓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시, 다시 그리면 되니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눈에 아쉬움이 가득 넘친다. 혜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가져올까?”

“아니, 아니야, 괜찮아. 다시 그리면 되는 걸.”

“그래도, 통 속에 아저씨 그림도 있잖아. 내가 얼른 다녀오면 그렇게 위험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아빠와 함께, 라며 주었던 어둠이 담긴 그림도 잊고 있었다. 사각 바깥의 것들이 담긴 그 그림을. 그 어둠이 담긴 그림으로 그토록 많은 것을 깨닫고도 몸이 급해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나 보다. 그럼, 부탁해도 될까, 하고 진이 말하자 혜인은 한쪽에 진을 앉혀두고 얼른 뒤돌아 뛰어 들어갔다. 너 여기서 나오지마, 하고 말하자 진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차가운 벽에 기대어 하늘을 보았다. 하얀 눈이 사락, 사락 내려온다. 눈이 더 내리면 도망치기 힘들 텐데, 그 생각을 하면서도 그 눈은 참 고와 보였다.


그래서 비틀거리며 조금 몸을 밖으로 내밀어 손을 뻗어보았다. 손 위에 하얀 눈이 내려 앉았다. 차가운 눈이 손에 내려 앉는 순간 녹았다. 그 순간을 잡아내 그림 위에 그려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두고 화가라고 부르지.


“아.”


하고 또 깨닫는다. 사각 바깥의 것만 아니라 시간 바깥의 것들 마저 잡는구나, 화가들은. 진은 살며시 웃었다. 그래서 한 걸음 또 내디뎠다. 어릴 적에, 눈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 혜인아, 너는 하얀 종이 위에 눈을 그려본 적이 있니? 그 옛날 아버지께서는 어느 날 내게 하얀 종이 위에 눈을 그려보라 하셨어. 난 어린 마음에 잔뜩 울상을 짓다가 아버지께 그냥 하얀 종이를 내밀었지. 이게 전부 눈이에요. 하고 말이야.


그때 아버지께서는 어찌하셨더라. 멍한 머리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하셨더라. 기억을 더듬으며 내리는 눈을 보았다. 하얀색, 하지만 온전하지 않은 하얀색. 진은 웃었다. 그래, 그러셨어. 겨우 떠오르는 기억 한 자락에 빙그레 웃음이 져진다. 아프고, 힘들어도 그 고운 기억에. 그래서 다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잔뜩 흐려진 회색, 하지만 그 색이 밉지 않았다. 이 세상을 두고 회색시대라 불렀지만, 밉지 않았다. 형, 오르트 형, 형이 틀렸어요. 이 세상을 회색시대라 부르기에는 회색도 고운 색이에요. 그 아이의 눈처럼. 세상 모든 색처럼.


“진 일리스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진은 흠칫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한 사내가 내리는 눈 사이로 어렴풋이 보였다.


“이 쓸모 없는 개새끼.”

“큭!”


몰이 칼을 들어 달려들고 진은 그를 겨우 피했다. 하지만 아무런 힘이 남지 않은 진은 곧장 비틀거렸다. 너는 무엇이, 나의 무엇이 그리도 밉니, 하고 묻지 못한 채 그를 보았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악을 썼다.


“이 개새끼. 네가 마지막에 마법을 쓰지 않았다며? 이 개새끼. 네 에비 새끼의 그림을 가지고 마법을 썼다면 몇 명이나 살렸을 것 같아? 내 친구도 거기서 죽었어. 너 때문에 이 시발새끼야.”


몰은 다시 칼을 휘두르고 진은 다시 피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 마법을 쓰지 않아 죽은 이가 저 사람만의 친구가 아니겠지. 하지만, 그 많은 사람이, 내가 없었더라도 살았을까. 그는 아무도 모르는 일. 세상이란 질문에 정답은, 찾기가 어렵다.


“그림, 때문에 사람이 죽어선 안 되니까.”

“무슨 개소리야! 그게 네 힘이라며!”


다시 칼날이 달려들었다. 피해보지만, 옆구리를 스치고 만다. 진은 피가 흘러나오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자리에서 쓰러졌다. 쓰러진 채로 벌게진 그의 얼굴을 보았다. 석류, 석류보다 못한 색.


“너는……. 네 아버지의…… 그림을 본 적 없니?”


그게 몰을 더 화나게 했다.


“봤는데. 왜? 그게 뭐? 씨발 시장 화가 아들 따위는 그런 거 이해 못한다는 거냐?”


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통 때문에. 몰은 진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컥, 하며 피가 터져 나왔다. 고통에 고통이 더해진다.

.

“좆 같은 환쟁이들, 남 죽고 사는 문제 상관없이 제 일에 빠져있는 좆 같은 환쟁이 새끼들.”


증오를 담아 노려보는 눈은 저를 담고 있지 않았다. 어디의 누군가를 바라보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몰, 그는 내가 아니야. 하지만 몰, 너도 봤어야 했어. 색을 말이야. 올바로 직시했다면, 그렇다면 이렇게 방향 없는 분노만을 담지 않았을 거야. 이렇게 메마르지 않았을 거야. 진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말 대신 나오는 것은 거품 머금은 피뿐.


“이 개새…… 칫.”


몰은 인기척에 몸을 감추고 도망가버렸다. 이미 제법 내린 눈에 발소리도 잘 나지 않았다. 세상 천지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도 자신은 이제 그를 듣지 못하리라. 진의 눈은 온통 회색만을 담고 있다. 하늘, 눈(雪), 그리고 눈.


“진아! 진아! 정신차려!”


회색 눈동자가 물을 담고 외쳐도 듣지 못한다.


“진아! 누구 없어요! 누가 도와주세요!”


도망치려던 길이었던 것 따위는 상관없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승전에 기쁨에 취한 건물의 한구석, 누가 눈에 물 머금은 채로 도움을 요청하는지 듣지 못한다. 술을 마시고 기쁨에 취한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입을 맞춘다. 그 뒤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사각의 바깥. 우리에게 이곳이 사각의 내부인데.


“누구 없어요? 누가 도와주세요!”


그 목소리 마저 눈이 덮어갔다.



혜인.

이 모든 예술이 금지된 시대를 사람들은 회색시대라 부른다더라.

히르 아저씨의 마법이 성공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역사 어느 곳에서 이런 시대를 찾아볼 수 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살고 있구나.


혜인.

하얀 종이 위에 눈을 그려본 적이 있니?

그 옛날 아버지께서는 어느 날 내게 하얀 종이 위에 눈을 그려보라 하셨어.

난 어린 마음에 잔뜩 울상을 짓다가

아버지께 그냥 하얀 종이를 내밀었지.

이게 전부 눈이에요. 하고 말이야.


아버지는 웃으시며 옅은, 아주 옅은 회색을 꺼내드셨지.

작게, 점점이. 그래서 점을 찍는

흰 종이 위에는 곱디고운 하얀 눈이 쌓인 것 같았어.


혜인.

회색에도 다양함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잊는 것 같아.

눈처럼 보이는 아주 옅은 회색부터,

저기 보이는 바위의 회색,

너와 함께 걷던 길, 돌담의 회색.


그리고, 너의 눈동자.



천으로도 만으로도 나눌 수 있는 회색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


단지 색이, 예술이 금지된 세상이라 회색시대라 불린다는 것은

그 어여쁜 회색들에게 미안한 것 같아.


혜인.


이 시대를 회색시대라 부른다면,

그 회색을 이름 지어 주어야 할 것 같아.

메마른, 모든 것이 메마른 그런 회색이라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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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색시대-21.메마른.(6) +2 14.11.01 821 23 11쪽
171 회색시대-21.메마른.(5) +1 14.10.30 722 19 11쪽
170 회색시대-21.메마른.(4) +2 14.10.28 809 2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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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회색시대-21.메마른.(2) +1 14.10.25 1,613 10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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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회색시대-20.아름다운.(3) +1 14.10.11 818 29 9쪽
160 회색시대-20.아름다운.(2) +3 14.10.09 825 35 9쪽
159 회색시대-20.아름다운.(1) +1 14.10.08 1,079 3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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