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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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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최근연재일 :
2015.02.25 07:03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219,407
추천수 :
7,304
글자수 :
818,771

작성
14.10.21 00:02
조회
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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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글자
10쪽

회색시대-20.아름다운.(8)

DUMMY

카르가 사라지고 왕세자군 쪽은 한동안 쑥대밭이 되었다. 높은 직위의 누군가가 빼내간 것 이라 확인이 되었는데 그의 흔적은 없었다. 포로 수용소의 감독관은 횡설수설, 그가 가져왔다는 서류 따위를 내보였지만 다 거짓이었다.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마석이 있는 마법사에게 시선이 돌아가기도 했지만, 의심 가는 행적이 있는 이들은 없었다.


카르가 잡힐 때 옷이니 뭐니 다 뺏긴 것들을 다시금 조사했다. 그들이 확인한 결과 같잖은 일기장과 간단한 소지품과 무기가 다였다고 했다. 그 일기장에 진 일리스비의 이름이 간간이 섞여 나왔다고 했다. 진 역시 마법사로 참전했기에, 그리고 일기장에 제 이름이 지나쳐 의심을 잠시 받긴 했으나 그 뿐이었다. 최초의 고발자, 아버지의 원수, 아버지를 끔찍이 여기는 진 일리스비. 그러하니 모두가 진이 카르를 살려줄 일 없다고 생각했다. 해서 그의 물건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가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진의 손에 넘겨주었다.


혜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그날 밤, 제게 마석을 받아가고 서류형식을 묻는 것이 새삼스러워 내버려두었더니 이런 꼴이 났구나 싶었다. 칫,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새끼를 왜, 하면서도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이게 다 카르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아빠의 말이 이제 와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여전히 밉고, 역겹지만 일을 하면서 이해하게 된 복잡한 뒷이야기들. 더불어, 이 상황까지 이어져 온 것에 카르의 잘못은 어디에 있었나. 그리고 혹은 내 선택 중에 그와 같은 것은 무엇이었고, 그와 같지 않은 것은 무엇이었나. 그 녀석, 진과 골목에서 마주쳤을 때 그냥 보내 주었다지. 하지만 내 어깨에 스친 총탄 자국은 아직도 볼 때마다 아픈데. 혜인은 제 생각이 징글맞아 눈을 질끈 한번 감았다 뜨고 진의 방으로 들어갔다. 진은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뭐 해?”


진은 불쑥 말없이 낡은 노트를 내밀었다. 오래 쓴 노트 사이사이에는 종이 쪽지가 껴 있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종이 쪽지들. 거기에는 맞춤법이 다 틀린 쪽지들이 껴 있었다. 오빠, 밥해놨어, 형, 집에 좀 들려, 형, 아무개가 아파, 오빠, 몸 조심해, 오빠 늦지마. 혜인은 쪽지를 주우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카르의 일기장이래.”


일기장에서 나온 쪽지들은 그의 일상이었다. 그의 죄만을 생각하고 그 뒤에 있는 것들 따위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은 그의 일상이라는 것.


“예전에, 시장에서 카르를 본 적이 있었어. 거기에 왠 여자애랑 같이 다니더라. 머리가 빨갛고, 주근깨가 있었는데…….”


나도 머리가 빨간 색이지. 카르는 그 애 옆에서 웃고 있었어. 그 아이는, 저 쪽지를 쓴 아이들 중 하나일까. 진은 카르의 다른 일기장을 만지작거렸다.


“카르는, 카르는 말이야. 아무도 나와 아버지를 둘러보지 않을 때 고기뼈도 가져다 주고, 집을 둘러보기도 했어. 그래, 물론 감시자니까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진은 일기장을 보라는 듯 혜인에게 턱짓을 한다. 혜인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깨끗한 글씨가 가득한 일기장. 아니, 그것은 일기가 아니었다.


“이게 뭐야…….”


그것은 일기가 아니었다. 하루하루, 매일, 그는 편지를 썼다. 진에게, 혜인에게, 인휘 아저씨에게, 히르 아저씨에게. 그 편지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었다. 오늘은 누구를 고문했는데 그 죄가 왜 너희에게 지은 죄보다 작게 느껴질까. 내 주변이 편하길 바랄 뿐이었는데. 매일이 그런 이야기로 가득한 편지.


그 편지는 편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였다. 그 죄는 하나 꾸밈없이 잔혹하게 묘사하고,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쓴 시였다. 그는 자신의 일상에, 하루에, 사는 것에, 삶에 지쳐있었고, 혐오하고 있었다. 그는 그리워하고 있었다. 빛으로 가득하던 색으로 가득하던 어떤 시절을.


“카르를 풀어줬던 건 말이야…… 왜 인지 모르지만, 그냥 나를 구해줘서가 아니라, 나를 돌봐줘서가 아니라, 그냥…….”


주변만 편하면 된다는 그 말이, 편하고 싶었다는 그 말이 왜 그리 가슴에 박혔는지 몰라. 수 많은 선택 앞에서, 내가 답해야 했던 수많은 선택 앞에서,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해야 했던 선택 앞에서, 그 말이 자꾸만 떠올랐거든.


“몰이 말의 맞을 거야. 유명한 아버지, 좋은 스승, 마법 다 그런 것 덕에 난 편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없었어.


“기억나?”

“뭐가?”

“카르는 그림을 잘 못 그렸어. 너보다도 더.”


셋이 모여 앉아 인휘 곁에서 그림을 그릴 때면 늘 카르는 엉망진창으로 그렸다. 그 그림 앞에서 늘 울상이었지만 인휘는 좋은 그림 나쁜 그림 없다며, 혜인을 달래듯 달래었고, 그는 늘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르곤 했다.


“카르는, 그림을 못 그려서 시를 썼나 봐.”


붓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물감으로 그릴 능력도 재주도 없고, 세상 조차 허락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단어 단어 엮어서 이토록 슬프고 아름다운 시를 그림 대신 썼나 봐. 그림이 세상에 남아 있어도, 글이 세상에 남아있는 이유는, 그토록 많은 글이 있어도 시가 남아있는 이유는 아마 그 애 같은 사람 때문이겠지.


“있잖아, 카르를 볼 때마다 참 이상했어.”

“뭐가?”

“까만 옷을 입었는데도 어딘가 하얗게, 그런 게 보였어. 이번에 봤을 때도 그렇게.”


혜인은 진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여전히 카르가 미웠다. 그리하여 시로 가득한 일기장을 찢어버릴 기세로 손에 힘을 쥐지만, 찢을 수 없었다. 일상의 단어로 이루어진 그 시들이, 죄악으로 가득 찬 시가 이미 마음에 박혀서. 혜인은 눈 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런 짓, 이런 거 쓴다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거 아닌데!”

“맞아, 그래. 네 말이 맞아.”


진은 쉽게 수긍했다. 그도 인정했다. 용서 받아서 안 되는 것이라고. 그 말을 하는 그는 하얗게 보였지. 이제야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아.


“아마도, 시를 써서 그랬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몰라…….”


진이 킥, 하고 웃는다. 그렇게 말하는 진은 어딘가 슬프면서도 기뻐 보였다. 그의 수 많은 시 앞에서, 끔찍하게 그려낸 일상과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시 속에서 무엇을 찾았는지 기뻐 보였다. 하여 혜인은 내던 화도 맥이 빠져 내지 못하고 진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카르가 써내려간 시를 하나씩 하나씩 읽어내려 갔다. 오르트 보다 시 못쓰는 놈 처음 봤어, 라고 심술궂게 중얼거리며 읽어내려 가지만 왜 그 거칠고 조악한 시들이 마음에 앉아버리는 걸까. 색처럼. 그림처럼.


“카르, 그냥 보냈어?”

“그냥 보내지 않으면?”

“죽을 만큼 팼어야지!”


혜인의 짜증 어린 말에 진은 다시 킥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그럴 걸 그랬나 봐. 정신 없었거든, 진의 웃음이 참 맑아 보여 혜인은 어이없어하면서도 곧장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에 만나면 때려버려야지. 죽지 않을 만큼 말이야.”


진은 웃음 끝에 기분 좋게 덧붙였다. 혜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음이란 것, 누가 어디서 죽을 지 모르는 전장에서 그런 바람은 참 슬프지만 서도, 바라기에 바람인 것을.


“전쟁 끝나면 어디선가 볼 수 있겠지?”

“응. 그럴 거야. 나쁜 새끼들은 오래 살잖아?”


둘은 한참 동안을 키득거렸다. 어렸을 적처럼 그렇게. 진은 카르의 일기장 속의 시를 눈에 담았다. 색을 담듯 그렇게 담았다. 그가 여전히 하얗게 보였던 것은, 아마도 이것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아, 하고 진은 깨달았다. 그가 여전히 하얀 부분이 남아있었던 것이 시를 썼기 때문이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른다, 고.


그 시 속에 낯선 너와 낯익은 네가 있었노라고.


그러하다면, 전장 속에서, 괴물그림으로, 그 것이 파괴되고 만들어지고, 명령만을 받아야 하고, 선택 앞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던 내가, 이곳에서 나를 잃지 않고 내가 나로서 남을 수 있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진은 책상 위의 가득한 괴물그림을 옆으로 치우고 빈 종이를 꺼냈다. 거칠고 강한 그림을 그리도록 날카로운 펜만이 있었고, 당장 붓은 곁에 없었다. 구하기도 어려우리라. 하지만, 상관없었다. 태초에 사람들이 그림을 그릴 적에, 붓이 있어서 그린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저, 그리고 싶었을 테니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마음으로.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름을 드높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도록. 진은 손 끝에 먹을 묻혀 종이 위에 그리기 시작했다.



카르.

혜인이가 그러더라.

쉽게 무너질 수 있어도,

무너지면 그 위에서 다시 쌓으면 되지 않느냐고.

그 말 들었을 적에 나는 맹세했어.


밤하늘 하얗게 박힌 별 하나,

길에서 지지 않는 꽃 한송이.


저 끝까지 올라서지 못해 무너져 내려도

저 바닥에서 끌어안고 울 수 있는

꽃 한송이 그리겠노라고.


오랫동안 잊은 맹세였지만.


너에게 시는 그 꽃 한송이였겠지.

올라서지도 않았지만

맨 밑바닥에서 무너졌던 너에게

시는 그 꽃 한송이였겠지.


카르,

새 일기장을 사줄게. 꽃을 쓰렴.

난 구겨진 종이 위에 꽃을 그릴 테니.


끝의 끝에서.

너는 너로 있고

나는 나로 있게, 그렇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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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58 李神
    작성일
    14.10.21 00:28
    No. 1

    꽃은 별을 그리면서 지는 걸까요.
    아름다운 밤입니다.
    올려다봐야 구름 밖에 보이지 않는 밤이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밤입니다.
    구름 위엔 별이 꽃처럼 피어있겠지요.
    정말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밤이 되겠군요.
    좋은 꿈 꾸십시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4.10.21 08:09
    No. 2

    카르가 죽었다는걸 진은 모르겠지요.
    그래도 카르의 일기장으로 진이 위안 받았으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도테라짱
    작성일
    14.10.21 13:09
    No. 3

    너무 아파서 눈물이 계속 나네요.잉~~불쌍해서리...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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