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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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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최근연재일 :
2015.02.25 07:03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219,423
추천수 :
7,304
글자수 :
818,771

작성
14.10.23 04:19
조회
878
추천
28
글자
8쪽

회색시대-21.메마른.(1)

DUMMY

“내가 내 친구를 보겠다는데, 네 놈들이 뭔데!”

“이러시면 곤란하시지 말입니다.”


왕세자군 지도부가 있는 건물, 히르가 어느 방 문 앞에서 무인들과 시비가 터졌다. 무인들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전장에서 환상 마법으로 적을 매혹하는 귀한 마법사, 하지만 윗사람이 시킨 바가 있으니. 강하게 나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못한다. 그러니 땀 뻘뻘 흘리며 그저 밀어내기에 바빴다.


“놔 둬. 여기에는 대마법진이 깔려있어 저 놈도 어찌 못 한다. 그 대마법진 내가 설치한 것인데 나를 무시하나?”


그 꼴 벌어지는 와중에 나타난 이가 마탑주라면, 무인들도 결국 물러설 수 밖에 없으니. 그리 바라던 문 앞에 사람이 뒤로 물러섰지만 히르는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안 하고, 깡마른 늙은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리히스였다.


“꼴 좋다.”

“스승님!”

“지 딸에 지 친구에, 친구 아들 놈, 거기에 자신까지 팔아 먹은 꼴이 참 보기 좋다.”


히르는 옛 스승의 비아냥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권력에의 굴종이라며 마탑에 등록하는 것 조차도 거부 했던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친구는 감시하에 갇혀있고, 딸은 이미 몸을 굴렸다. 그리고 그 아이는, 친구의 착한 아들은. 옛적 같으면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대들었을 옛 제자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리히스는 툭 내뱉었다.


“힘들지?”

“예…….”


힘들다, 거대한 힘 앞에 홀로 선 다는 것. 아무도, 아무것도 다치지 않게 홀로 선다는 것은.


“힘들어도 가치가 있는 일이니 해 봐. 끝까지.”


옛 스승의 뜻 밖의 충고에 히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리히스는 그런 히르의 모습에 지팡이를 휘둘러 머리통을 내려치고 히르는 악, 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마법사란 도전이다. 불가능에 도전 하는 것이 우리 일이지. 제대로 하라고 이 새끼야.”


그러고는 등을 돌리고 가버린다. 노인네 아직도 기력이 좋아 마법이 없어도 맨손으로 사람 셋은 잡겠다 싶어 히르는 픽 웃고 말았다. 무인들은 마탑주의 기세에 못 이겨 이미 세 발짝 물러난 차, 히르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전쟁과는 상관없이 해는 뜨고 진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인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인휘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입에 붓을 물고 색을 칠하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색을. 히르는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리히스가 잠시 만들어 준 이 기회, 잠시간의 틈을 놓치지 말아야 했다.


“인휘야.”

“히르?”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이 부르자 인휘가 흠칫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히르의 위 아래를 샅샅이 훑어본다. 전장에 나갔던 벗이 혹여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지, 혹여 어디 상하지는 않았는지.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에 인휘는 겨우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괜찮아 보여 다행이다.”

“어, 그렇지.”


그리 말하는 히르는 힐끗 인휘가 그려내는 것들을 보았다. 온통 색뿐인 것, 어느 것은 처음의 그림처럼 자유롭고, 어느 것은 어둡기 한이 없다. 완전히 분리된 색들. 예술 따위 잘 모르는 얼치기가 무엇을 평하고 하지는 못하겠으나, 중요한 것은 소위 말하는 ‘위’가 좋아할 그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다. 손이 없어 예전만큼 자유로이 그릴 수 없다는 것을 핑계 삼아 전선 참전 독려화를 거부했다. 하지만 히르는 인휘가 저 정도로 색을 다룰 수 있다면, 전선을 향해 마음 들끓게 하는 색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문제가 그 점이다. 때문에 전후에 인휘가 어떤 상징성으로 선전도구로 이용될 가능성도 있지만, 또한 버려질 패가 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인휘야, 항상 준비해둬, 어느 날 밤이 될지도 모르니까 항상, 긴장을 늦추지마.”


히르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인휘에게 속삭였다. 인휘는 잠시 흠칫하지만 곧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혜인이에게도 혹시 우리가 갑자기 없어지거나 하면 찾아 올 곳을 말해뒀으니까, 진이 걱정은 하지 말고.”


족쇄였다. 아비가 되어 자식의 족쇄가 될 뿐이었다. 그러니 그 족쇄를 끊기 위해서는 자신이 사라져야 했다. 아들의 약점이 되지 말아야 했다. 참전 동의서, 구조, 권력, 온전히 벗어나긴 이미 서로간에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최소한 폭풍의 바깥에서 잠시간 몸을 숨길 정도라면.


“그래, 알았어. 너도 몸 조심해.”


인휘가 결연한 얼굴로 끄덕이자 히르는 툭툭, 인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방에서 나섰다. 아이들아, 너희들도 조심해라. 어제든, 어디에 있든, 정신이 썩고 곯아 가도 바로 잡기 위해서라면 몸이 무사해야 한단다, 얘들아.

.

.

.

.

“진 일리스비!”

“예, 옛!”


진은 대답을 하며 괴물을 다시 조정하려 애썼다. 하지만 주변 마법사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진을 바라보았다. 최근 몇 번의 전투 동안 괴물의 움직임이 불안불안했다. 지금도 자칫하면 아군에 피해를 줄뻔했다. 진은 그 원인이 대강 무엇인지 느낌이 들었다. 하여, 있는 힘껏 몸 안에 남아있는 분노와 혐오와 공포를 끌어올리려 애썼다. 전투에서 사람이 터지는 감각, 전장에 참여해야 했던 자신, 사각 속의 나.


“움직여! 오른 쪽으로!”


쿵쾅쿵쾅 괴물이 움직이며 오른 쪽 벽을 박살을 내고 벽 안에 숨어있던 신군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바닥에 떨어진다. 이미 움직이지 못하여 벌레처럼 바르작 거리기만 하는 육신을 괴물이 밟고 지나갔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에게는 축복. 비명이 지속 되자 상관들은 안심하며 전장을 지켜보지만 전투는 이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째 불안불안 하네. 마력 회복이 덜 된 건가?”

“예.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일부로 꾀를 부리는 것이 아니란 것 정도는 마법사들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식은 땀 창백한 얼굴, 비틀거리고 하루하루 말라가는 몸, 아마도 어린 마법사가 자신을 추스르는 법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어 그런 것이라 여겼다. 하여 회복제 양도 늘려가며 마법사들은 진이 마력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지만, 진은 그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그림 때문이겠지.”


진은 제 숙소로 돌아와 홀로 중얼거렸다. 혜인이 그림을 가져다 주고, 그를 보고 울고 난 후에 조금씩 괴물이 흔들렸다. 그때는 자신도 마력 조절을 실패해서 그랬다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래로 그 흔들림은 명확해졌다.


어둠, 증오, 혐오, 분노, 공포. 이런 것들이 모두 괴물을 움직이는 원동력.


어둠이 아직 빛이 되지는 못했어도 증오는 반감으로 약화되고, 혐오는 동정으로 치환된다, 분노는 반성의 기반이 되고 공포는 용기가 된다. 물론 이것은 그림을 볼 때, 그림을 그릴 때 잠시간 뿐이었다. 다시 전장에 나가면 솟아오르는 어둠, 증오, 혐오, 분노, 공포 그런 것들. 하지만 천년 성벽이 망치질에 조금씩 깎여나가 듯, 그 또한 조금씩 깎여 나간다.



“그림 때문일까, 정말?”


그림 때문일까 정말로. 아니다. 정말로 그림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거면 지난 천년 그림이 있던 시절 동안에 전쟁은 왜 있었을까. 과장이고 오해일지도 모르고, 혹은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그림을 보는 것을 멈추거나 그리는 것을 멈춰야 한다. 이렇게 괴물 조정을 위해 억지로 동조하고 감각을 공유할수록 몸이 축나는 것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지금 자신에게 이것 밖에 없었다. 내가 나로 있고,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천년 성벽에서 떨어지지 않게 나를 붙들 동아줄이다. 하여, 진은 손을 들어 그리다 만 그림을 이어갔다. 별것 아닌 엉터리 그림이라 생각 들 때마다 카르의 일기장을 들여다 보았다. 누구에게 보여주고, 비교하고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위한 단어들처럼, 자신을 위한 그림이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4.10.23 08:04
    No. 1

    정말 처절하네요.
    몰이 볼 땐 타고난 힘 더절로 휘두르는듯 보여도
    저 마법은 다자기 생명을 갉아먹는 짓을 뿐...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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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회색시대-21.메마른.(2) +1 14.10.25 1,613 104 9쪽
» 회색시대-21.메마른.(1) +1 14.10.23 879 28 8쪽
166 회색시대-20.아름다운.(8) +3 14.10.21 923 27 10쪽
165 회색시대-20.아름다운.(7) +2 14.10.19 1,311 48 9쪽
164 회색시대-20.아름다운.(6) +2 14.10.17 790 23 7쪽
163 회색시대-20.아름다운.(5) +1 14.10.15 1,033 25 10쪽
162 회색시대-20.아름다운.(4) +2 14.10.13 809 23 9쪽
161 회색시대-20.아름다운.(3) +1 14.10.11 819 29 9쪽
160 회색시대-20.아름다운.(2) +3 14.10.09 825 35 9쪽
159 회색시대-20.아름다운.(1) +1 14.10.08 1,079 35 9쪽
158 회색시대-19.젖은.(4) +3 14.10.06 1,050 2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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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회색시대-19.젖은.(2) +1 14.09.27 761 34 10쪽
155 회색시대-19.젖은.(1) +2 14.09.21 701 25 10쪽
154 회색시대-18.뒤엉킨.(8) +1 14.09.15 1,565 3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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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회색시대-18.뒤엉킨.(6) +2 14.09.03 922 21 10쪽
151 회색시대-18.뒤엉킨.(5) +2 14.08.31 915 31 11쪽
150 회색시대-18.뒤엉킨.(4) +2 14.08.24 1,114 33 11쪽
149 회색시대-18.뒤엉킨.(3) +1 14.08.17 912 22 11쪽
148 회색시대-18.뒤엉킨.(2) +1 14.08.10 1,415 23 10쪽
147 회색시대-18.뒤엉킨.(1) +2 14.08.04 810 2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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