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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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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최근연재일 :
2015.02.2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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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25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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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회색시대-21.메마른.(2)

DUMMY

“진아?”


그림 앞에서 집중 하느라 정신 없어 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혜인은 아저씨랑 똑같네 이럴 때 보면, 하고 중얼거리며 진의 어깨 너머로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았다. 모자란 재료, 안료 따위는 구할 수 없어 괴물을 그리기 위해 준비된 종이 위에 잉크로 그리는 그림. 참 똑같이 어두운 색인데 이토록 달라 보인단 말이지. 차암 신기하다.


“어, 왔어?”


피곤한 어깨를 풀기 위해 잠시 고개를 들었더니 보이는 혜인의 모습에 진이 살짝 웃으며 맞이했다. 그를 보는 혜인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정신적으로는 예전보다 꽤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힘이 달리고 있는 게 날이 갈수록 보였다. 꺼멓게 죽은 눈가와 바싹 말라가는 몸, 진은 지쳤는지 의자에 기대 눈을 반쯤 감고 가쁜 숨을 색색거리며 쉰다. 아마도 마력 소진 때문에 그런 듯하다. 진의 괴물이 전장에서 대단한 효율성을 보이며 이 전투 저 전투 안 끼는 판이 없다. 마력이 조금 회복된다 싶으면 어느 마차에 태워서 어느 전장으로 보낸다. 그게 일상이다. 조금이라도 더 쉬는 것이 좋을 텐데, 진은 틈만 나면 책상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좀 쉬었다 해.”


혜인은 간단하게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먹을 거리를 하나 진의 손에 안겨주었다. 진은 다른 손으로 피곤한 눈을 비비며 그걸 덥썩 베어 물었다. 참 맛없는데, 참 좋다. 진은 그리 생각하며 옆에 앉아 같은 것을 먹고 있는 혜인을 힐끗 보았다.


“이거, 또 몰래 가져온거야?”

“뭐, 내가 훔치는 건 좀 잘해서. 취사병들이야 개가 먹었다고 생각하겠지 뭐.”


혜인의 농담에 진은 풋, 웃음이 터졌다. 별거 아닌 말에도 요새는 간간이 웃음이 터진다. 살면서 웃을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다면 지금 다 웃어버리겠다는 듯.


“그림은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네?”

“응, 잘 그린 건 아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지금은 더 기술적으로 높고, 더 뛰어난 구도를 가지고, 더 뛰어난 색감을 가진 그림은 꿈도 꾸지 못한다. 지금은 단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그림, 내가 나로서 있는 그림만을. 진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혜인이 이해 못할 거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껏 해온 맹세들 잊기도 했고, 어기기도 했고, 제대로 지켜온 것 하나 없어 부끄러울 따름이었으니.


“음, 근데…….”


혜인은 조심스럽게 그림 더미를 들춰보며 말했다. 그려진 종이보다, 흰 종이가 많다. 검은 괴물의 그림이 많지 않다. 매일 같이 쌓아 올리던 거였는데. 그리는 양보다 이제 전장에서 쓰이는 양이 더 많다.


“괴물이 많지 않네.”

“응.”


응, 하고 진은 여상 하게 답하려 하지만 실은 그도 불안하다. 단순히 괴물 조정이 어려워지는 것만 것 문제가 아니었다. 괴물을, 그릴 수 없었다. 자신의 분노와 공포를 담은 괴물을 그릴 수 없었다. 그것이 혼과 감각적인 공유를 이루려면 그림도 진심, 자신도 진심이어야 했다. 하지만, 과연 괴물이 진실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를 바라보고 주문을 외우는 자신이 진심이 아니었을까.


아직 나는 분노하고 있고, 혐오하고 있고, 고통스러워 하는데, 그와 동시에 이제 나는 동정하고 있고, 연민하고 있고, 치유되고 있다. 어느 것도 쏠리지 않게 이분된 감정이 섞여서 흐르고 있다. 온전히 그것만이 쏟아낼 수 없는 그런 혼합된 감정. 진은 통속에 고이 숨겨져 있는 아버지의 그림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그 고통을 모두 표현하셨다. 온전한 어둠으로. 어둠에 숨어도 보셨고, 마음에도 품어보셨던 분. 그러고도 잔잔히 웃었으며, 그러고도 색을 그려 내셨다. 그리고, 빛을.


반면,


제 괴물은 감정의 산물이다. 감정 없는 그림은 없겠으나 절제한 저만의 표현이 아니라 세 살 먹은 아이가 성이 나 흰 벽에 마구 그린 것과 다름 없다. 아버지, 그리하여 그 분은 화가이실테고 나는 여기에 쏟아내느라 바쁜 아이일 뿐이다. 맙소사, 그런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그림은 사각의 선 안에 갇혀 있다고 악을 쓴 제 자신이 바보 같다. 그저 그것은 종이 위의 사각일 뿐이었는데. 현실적인 한계가 아니라, 그저 색과 함께 존재한 것뿐인데.


진은 제 괴물 그림을 손에 쥐어 보았다. 전장에서 나갔다 들어와 그림을 보기보다는 이 놈들을 그려내야 했다. 그래야, 그래야,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림 따위로 무엇을 할 수 있을 지 두고 봅시다.


지금 나를 붙들고 동시에 나를 옥죄고 있다. 그게 그림이 하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림의 죄가 아니다. 진은 잠시 숨을 고르며 전장에서 괴물을 다룰 때의 기분을 떠올리려 애썼다. 물컹거리며 터지는 그림, 자신이 힘을 가졌다고 착각하고 벌레를 짓밟듯 사람을 밟는 감각. 치어오르는 욕지기, 가라앉는 마력, 끔직한 자신, 존재하지 않는 자신.


진은 펜을 들고 종이 위에 괴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늘 그리 던 것들, 형체도 무엇도 올바르지 않지만 오로지 감각을 공유하여 혼을 담게 되는 그림.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리면 그릴수록 자신이 좀먹어 들어간다. 자신이 썩어간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다. 이것은 내 감정의 소산일 뿐이다. 이것은.


“에이, 씨!”


진은 그리다 말고 펜을 집어 던졌다. 뒤에 서 있던 혜인이 잠시 흠칫 한다. 진이 씩씩거리며 책상을 발로 차고 머리를 구겨 잡는다. 자신이 자신이고 싶었을 따름이었는데, 자신이 자신이 아니어야 한다. 자신이 자신으로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자신이 아니어야 하는 모순. 그 간극, 그게 분노를 일으키지만, 처음의 그 분노 같지는 않다. 그게. 다행일까, 불행일까. 짜증을 내며 책상에 쿵, 하고 머리를 박는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혜인은 가만이 진의 등에 손을 올렸다.


“진아, 아직 더 몇 장 남았잖아. 초조해하지마.”


그러고는 뒤에서 살포시 끌어안으며 체온을 전해주고 진은 가쁜 숨을 가라 앉히려 애썼다. 볼에 비벼져 오는 체온에 진은 킥, 하고 웃음이 다시 터졌다. 예전, 아버지의 어둠 속에서 봤던 광경과 비슷하다. 아버지는, 어머니께 화를 내었지. 아마도 이럴 때가 아니었을까. 아마도, 아버지도 이런 괴로움이 있지 않았을까. 최고의 화가였고, 늘 인자하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자라고 난 뒤, 제가 그린 그림을 보고 질투도 하시며 그림을 그리는 것도 꺼려 하는 모습도 보았다. 또 얼마나 보지 못한 모습이 있을 것인가. 그러하니, 그 분께서도 제 성질에 못이겨 어머니께 화를 내신 일이 있었을 게다.


알 아마스 공께서는, 아버지는 결여되었기에 완벽해질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하니, 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되겠지.”


진은 중얼거리며 다가오는 체온에 저도 볼을 비볐다. 혜인은 헤헤 웃는다. 그러다 그 회색 눈을 곁눈질로 훔쳐보다 문득 말했다.


“아버지도 가끔 어머니께 이런 식으로 성을 내신 적이 있으셨나 봐.”

“인휘 아저씨도 사람이니까, 그러셨겠지.”

“그래, 그럼, 음, 우리가 결혼하면 너도 이해해 주겠네?”


진의 말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곱씹던 혜인이 얼굴이 빨갛게 변해 철썩 하고 진의 등짝을 후려친다. 진짜 여자애가 힘도 좋아. 혜인은 넌 또 그 소리니, 하고 소리를 빽 지르고 씩씩거리며 나가버린다. 그 빨간색. 석류와 같은 그런 색. 석류를 갈아 낸 색보다 고운 빨간색. 그 색이 보기 좋아 진은 웃는다.


현실은 버겁다. 고통은 곁에 다가와 있다. 변한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내일 어디서 사람을 밟아 죽여야 하는지 모른다. 죄는 그대로다. 그럼에도 저 회색에, 저 붉은 색에, 저 웃음에, 저 모든 것에 위로를 받는다. 색을 잃어버렸던 눈이 색을 담기 시작한 이래로 쉬이 둥글게 휘어진다. 이러니 괴물이 움직이지 않는 거겠지.


하지만 지금 만큼은 이대로, 이 느낌을 충분히 즐기고 싶다. 내일 또 어느 전장에 나가 같은 짓을 반복해야 할지 모르니. 그때 되어 다시 이 끔찍함을 온전히 가져올 터이니, 괴물아, 내가 잠시 쉬도록 도와주려무나.


진의 괴물은 잠시 진을 휴식하게 둘 줄 몰라도, 세상의 괴물은 가만이 있지 않았다. 그는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일, 아마도.


“꺄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여자가 아이를 안은 채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있다. 무엇에 취했는지 모를 사내가 아이를 뺏어 들려 한다. 아이가 무슨 소용, 바둥거리는 애새끼 내쳐버리고 계집 치마 속 사정을 알아보려 했던 것, 여자는 질린 안색으로 아이를 안고 벌벌 떨었다. 사내는 침을 흘리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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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회색시대-21.메마른.(4) +2 14.10.28 809 24 11쪽
169 회색시대-21.메마른.(3) 14.10.26 737 25 9쪽
» 회색시대-21.메마른.(2) +1 14.10.25 1,613 104 9쪽
167 회색시대-21.메마른.(1) +1 14.10.23 878 28 8쪽
166 회색시대-20.아름다운.(8) +3 14.10.21 923 27 10쪽
165 회색시대-20.아름다운.(7) +2 14.10.19 1,310 48 9쪽
164 회색시대-20.아름다운.(6) +2 14.10.17 789 23 7쪽
163 회색시대-20.아름다운.(5) +1 14.10.15 1,032 25 10쪽
162 회색시대-20.아름다운.(4) +2 14.10.13 809 23 9쪽
161 회색시대-20.아름다운.(3) +1 14.10.11 818 29 9쪽
160 회색시대-20.아름다운.(2) +3 14.10.09 825 35 9쪽
159 회색시대-20.아름다운.(1) +1 14.10.08 1,079 35 9쪽
158 회색시대-19.젖은.(4) +3 14.10.06 1,050 25 9쪽
157 회색시대-19.젖은.(3) +4 14.10.04 881 27 11쪽
156 회색시대-19.젖은.(2) +1 14.09.27 760 34 10쪽
155 회색시대-19.젖은.(1) +2 14.09.21 701 25 10쪽
154 회색시대-18.뒤엉킨.(8) +1 14.09.15 1,565 3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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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회색시대-18.뒤엉킨.(6) +2 14.09.03 922 21 10쪽
151 회색시대-18.뒤엉킨.(5) +2 14.08.31 915 31 11쪽
150 회색시대-18.뒤엉킨.(4) +2 14.08.24 1,113 33 11쪽
149 회색시대-18.뒤엉킨.(3) +1 14.08.17 912 22 11쪽
148 회색시대-18.뒤엉킨.(2) +1 14.08.10 1,414 23 10쪽
147 회색시대-18.뒤엉킨.(1) +2 14.08.04 810 2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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