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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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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최근연재일 :
2015.02.25 07:03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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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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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18,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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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04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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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회색시대-19.젖은.(3)

DUMMY

자유예술연맹 회원들도 같은 것을 요구 받았다. 그러나 모임에 들고 나온 그림들 중 참전독려를 주제로 한 그림을 가지고 온 자들은 없었다.


“미친놈들, 그림이 뚝 하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나. 교양 없는 것들 같으니.”

“뭐 어쩌겠나, 그림을 보고 자란 세대들이 아니니 모르는 게지.”


보제르가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리자 프르차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트리며 받아 쳤다. 자신들이 다시 모일 때 가지고 온 그림들은 모두 생명이 없는 그림에 도전하던 와중에 그린 그림이었다. 레스는 마찬가지로 ‘생명’의 흔적이 남은 그림을 몇 장 더 그려가지고 왔다.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그림들, 그날 인휘의 아들 녀석이 한 말이 맞는 것같이 들린다.


손이 없어 연판장에 입술 도장을 찍었던 보제르는 입으로 그림을 그려왔다. 붓을 입에 물어 그리는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정말 입으로. 화면 가득한 입술 도장에 다들 할 말을 잃었다. 처음에는 뭔가 싶었지만, 입이 다양한 색깔로 찍혀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현 시대 같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손이 없는 시브레는 발에 붓을 쥐어 그려왔다. 그래도 몰래라도 간간히 발로 붓을 쥐어 그림을 그려온 연습을 한 만큼 상당히 섬세한 그림이었다. 또한 그 그림에 인체는 해체되어 분열된듯한 모습이었다. 곁눈으로 보자면 사람 같기도 하지만 온전히 생명이라고 칭할 수는 없는 존재들은 언뜻 보면 문양의 집합체처럼 보였다. 모두들 한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들이었던 만큼 빠지는 그림은 없어 보였다. 이들이 대중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느냐는 부차적인 문제로 치더라도.


그 수많은 그림 앞에서, 다들 입을 다물었다. 알 아마스 공은 일년 후쯤 전시회를 열자고, 다들 노력하라 했지만,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것은 내전이었다. 전쟁 중에 무슨 전시회를 열 수 있을 것이며, 전쟁통에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리고 내려온 것은 전쟁독려를 하는 그림이라. 다들 현실적인 이유로 왕세자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마음 내키지 않았다.


어디 예술가가 제 마음에 드는 그림만 그릴 수 있던가. 때론 후원자를 위해서, 때로는 대중의 입맛에 맞게 그려낸 경험들은 있었다. 그러하니 그리고자 나선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하나, 단순히 취향의 문제로, 혹은 후원자를 위해서, 혹은 돈을 위해서 그리는 그림과는 기분이 다르다. 참전 독려. 전쟁을 겪어 본 이도 있고 아닌 이도 있지만, 그 피 바닥 절절 흐르는 전장에 사람을 내보내는 것을 독려하고 칭찬하는 그림을 그리라는 것은 그 기분이 달랐다. 이미 흐른 피가 내 피가 아니라고 다른 피를 어찌 쉬이 흘리게 하겠느냐.


“됐다, 야. 어차피 그림 그려봤자 정말로 그것 때문에 참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값을 쳐주니 참전하겠지. 대충 하나 그려줘, 그럼 입 다물겠지.”


시브레가 투덜 거리고, 다른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거운 한쪽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붓을 잡은 이래로 진지하지 않은 적 없었거늘. 다들 머리를 부여잡고 각자의 그림과 다른 동료들의 그림을 봤다. 이 그림들을 거리에 걸고, 전시장에 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러다 문득 그는 어찌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를 선도한 작가 인휘 일리스비, 이 시대를 만들게 된 근본. 또다시 매우 다른 그림을 내놨다 하는데, 그런데.


“인휘는 왜 안 왔어?”

“인휘는 워낙 감시가 심하니까.”

“하긴, 알 아마스 공께서도 최근에는 엄청 바쁘실 테니, 그 저택 꼴도 말이 아닐 테니, 신경 써줄 사람이 없긴 하겠지.”


화가들은 수군 거리며 참전 독려 그림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떠들었다. 인휘의 새로운 그림을 보았던 레스와 프르차만이 잠시 침묵하며, 지금 그는 어떤 심정일까 헤아려 보려 애썼다. 알 수 없는 노릇임에도, 그럼에도.

.

.

.

.

.

“어서 오게.”


진은 홀로 라인 공자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혜인은 따로 만나야 한다며. 온갖 서류들로 어수선한 방안, 꽤 피곤해보이는 라인 알 틸리 공자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빙그레 웃는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죠, 아저씨는요, 오는 내내 물었지만 비서관이란 사람은 답이 없었고, 자신은 힘이 없었다. 회복 하려면 한참 더 걸릴 텐데. 그 분함에 꽉 쥔 주먹이 떨려왔다.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침착하게 말하려 애쓰지만, 긴장과 불안과 분노가 뒤섞여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만다. 공자는 여전히 그 미소를 지우지 않았고, 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에 담긴 뜻을 가늠하려 애썼다. 그저 짙고 짙은 색 말고는 읽을 수 없었지만. 틸리공자는 서류 하나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내전이 곧 시작 되지. 참전을 요청하려 하네.”

“그걸, 말씀하시려 부르신 겁니까?”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분명 떠나려 했지만, 그를 이 사람이 알 턱이 없을텐데. 그런데 왜 아버지까지 모셔가고, 이렇게 협박처럼.


“그렇지. 왕세자 저하께서도 자네의 능력을 귀히 여기시고 마탑 소속도 아닌 바에야, 따로 청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겠는가?”


과연 귀히 여겼던가. 그렇겠지. 그랬겠지. 그 날 그리도 모든 것들을 박살내가며 앞서 나가는 괴물을 보았으니. 그러나 그건 내 분노를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닌 게지. 그것은 그저 괴물의 힘만을. 당연한 것인데, 왜 이리도 토악질이 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는지.


“아버지는 왜 모셔가셨습니까?”

“알 아마스 공께서도 바쁘시고, 자네도 어차피 이쪽에 머물게 될 것같은데 부자가 따로 있는 것보다는 나을 법해서 말일세.”


진은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가 한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어 뵈니까. 그러나 자꾸 아니라 한다, 짙고 짙은 저 사람의 색이 이는 아니라 한다. 아버지, 아버지는 또 틀리신 것 같아요, 세상에 나쁜 색은 없다 하지만, 저 색은 자꾸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서류는 참전 동의서일세.”


진은 공자가 내미는 서류를 받았다. 긴 문장은 여전히 어렵고, 정중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문장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 지장을 찍어야 하는 부분만을 이해했을 뿐이었다. 지금, 떠나야 하는데, 아버지와 아저씨, 혜인이와 함께 떠나야 하는데. 눈 앞의 서류를 거부한다면, 참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아니, 거부할 수 있는가? 차라리, 지장을 찍고 모른 척 도망을 갈까.


“여러가지 생각이 있겠지?”


라인 공자는 진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한다. 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한다고 냉큼 지장을 찍지 않는다면야, 기다 아니다 당장에 답이 없다면야, 누군들 모를까. 저 어리고 순진한 얼굴에 덮인 갈등의 색을.


“하지만 말일세, 자네가 안 한다면, 자네 아버님은? 여자 친구는? 동지들은 다 버릴 참인가?”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그 행태에 진은 놀라면서도 으르렁거렸다. 그들을 건들지 마십시오. 하지만 라인 공자는 길가던 개가 짖는 꼴을 보는 모양새로 픽 웃었다.


“자네도 바보가 아니라면야 이 전쟁을 두고 여러가지로 말이 많은 것은 알 것이야. 하지만, 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인데 무엇 때문에 갈등하는 것인가? 신념? 정의? 애초부터 그런 것이 있었던가?”


예, 있었습니다. 나를 구하고 돌아가신 스승님, 고문을 당하고 겨우 살아난 세이즈 아가씨, 목숨 걸고 글을 쓰는 오르트 형, 아버지와 나를 먼저 보내고 소식 없는 어느 교수님, 견디지 못하고 조각을 한 네쉐 아주머니, 도움이 될 거라 믿고 제 몸은 던진 혜인이, 내가 기억을 못하는 수 많은 또다른 이들이 거리에서 죽어가는데 당신은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세상은 그것만으로 돌아가지 않네. 자네는 이해 해야 해. 그것을 알아야 해.”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하라고 거짓말 하는 사람을 믿지 말아라. 아무도 세상을 이해할 수 없지. 다만 이해하는 척 하는 것 뿐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기 눈으로 본 세상일 뿐이란다.


네쉐는 저 사람을 위해 저 말을 했던가. 분했다. 멀끔한 얼굴로 비단옷에 몸을 감싸고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 자가 세치 혀로 세상을 부린다. 세상을 안다고 떠든다. 수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뜻을 저 혀로 농락하고 깔아 뭉갠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체력도, 마력도, 지금 저 사람을 없앨 수 있을 만큼의 어떤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은. 그렇다면, 힘이 돌아온다면. 라인은 진의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보고 픽 하고 웃었다. 그래, 그럴 것이야, 화가 날 것이야, 세상이 제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어린아이들이란 늘 그렇지.


“구출 작전에 꽤 힘을 써서 지금 마력이 다 돌아오지 않아 지금 보고만 있는 것이겠지. 그래, 두렵게도 내가 어떤 방비를 해도 자네는 나를 죽일 만큼 실력이 있어. 내 지위 정도 되면 밤길 조심해야 하지.”


그런 어린 아이들이 저 아이뿐이었던가.


“하지만 말일세, 내가 죽더라도 자네 상황은 변할 것 같은가? 좁게는 내 가문, 넓게는 귀족사회, 그를 적으로 돌리고서?”


아이들은 덩치가 커지고 힘을 얻지만, 그 속에서 굴복이란 것을 배운다.


“아니, 그보다는 구조라 말해야겠지. 세상의 구조. 내가 죽어도 나를 대신할 이 체계가 자네가 떠나도록 도와주리라 생각하는가?”

“그럼…… 그 구조를 바꿔야겠군요……”


굴복을 배우지 않은, 아니, 굴복하며 살아왔지만, 가능성을 보았던 아이는 그리 말한다. 허나 진의 말에 라인 알 틸리는 유쾌하게 웃었다. 방 안에 가득 울리는 웃음 소리에도 색이 묻어나온다. 짙고 짙은 견고한 색이.


“자네가? 언제? 어떻게 말인가?”


진은 아무 답을 할 수 없었다. 천년의 망치질로도 깨지질 않을 거대한 성벽. 넘어 서지 못할 사각검은 선. 라인 알 틸리는 여전히 웃기만 하며 지장을 찍을 수 있는 인주가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황금꽃으로 장식된 상자는 몹시 아름다웠다. 저기에 새 한 마리가 있다면, 그렇더라면.


미동 없이 인주 통만 바라보는 진에게 라인 공자는 조금 쓰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네. 자네가 무리수를 두지 않았더라면.”


진이 슬며시 고개를 들자 라인 공자가 차가운 얼굴로 말한다.


“이건 경고야. 내 딸을 두고 협박만 하지 않았어도, 나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거야.”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Girdap입니다. 제가 주간 연재로 돌리고 연재한지 어언 1년이 넘었습니다. 이 느린 글을 따라와주시는 독자분들께 먼저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저 간격을 줄여보려 애썼는데, 이제서야 그게 가능할 듯합니다. 약간 넉넉한 분량을 쌓은 만큼 이제 조금 빨리 올려볼까 하는데, 어느 정도가 좋으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1-2일에 한번. 

2-2일에 한번은 너무 빠르다. 3일에 한번. 

3-그냥 하던대로 주간연재. 

4-알아서. 

 

여러분들의 답변을 취합해, 가장 적절한 연재주기를 찾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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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76 ACHT.W
    작성일
    14.10.04 03:37
    No. 1

    희망은 1입니다만 작가님 사정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3번으로 하시면서 비축분을 쌓아두시는게 좋을 것 같네요. 언제나 그렇듯 잘 보고 갑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Rainin
    작성일
    14.10.04 05:14
    No. 2

    4.
    언제고 원하시는대로 하심이 옳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2 지나가는
    작성일
    14.10.04 06:43
    No. 3

    완결만 내주신다면 상관없습니다 고로 4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8 벼이삭
    작성일
    14.11.12 01:07
    No. 4

    헐. 바보. 멍청이. 말미잘. 해삼. 정치적 인간아.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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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회색시대-20.아름다운.(1) +1 14.10.08 1,079 35 9쪽
158 회색시대-19.젖은.(4) +3 14.10.06 1,050 25 9쪽
» 회색시대-19.젖은.(3) +4 14.10.04 881 2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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