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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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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최근연재일 :
2015.02.25 07:03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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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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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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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4.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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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회색시대-19.젖은.(4)

DUMMY

진은 순간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을 뻔했다. 이 무슨 황당한 이야기란 말인가. 자신이 언제 그 어린 아가씨를 두고 협박을 했다고. 하지만 그 잠시간에 깨달았다. 말과 말이 부딪혀 생긴 오해. 그는 제 눈으로 보는 세상만큼 타인을 이해했다. 자신이 의도한 것은 단지 말 그대로, 그 아가씨가 그림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그 세상만을 원했던 것인데. 그에게는 딸을 언급한 자체가 협박으로 들렸던게다. 하하, 맙소사. 진은 속웃음을 흘렸다. 평행선. 영원히 닿지 못할 간극. 견고한 성벽, 사각의 선.


진은 지장을 찍었다. 이제 와서 협박이 아니었다 한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아버렸다. 둘은 영원히 이곳에 갇혀있는 게다. 사각의 선 안에. 견고한 성벽 안에. 차라리 그 딸을 두고 협박할 만한 힘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무나. 경계하려무나. 어차피 이리 된 것.


진은 지장을 찍고 말 없이 방을 나왔다. 혜인이도, 아마 비슷한 경고를 들을 게다. 그저 지금은 아버지와 아저씨의 안부를 묻자꾸나. 어차피 하기로 한 것, 마지막에 잠시간 흔들렸던 것으로 생각하자꾸나. 흔들리지 않겠다고, 갈등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비서관이란 놈에게 인주자국이 남은 손을 내밀며 낮게 말하자 그는 말 없이 방 하나로 안내했다. 정갈한 방안에 지키는 이도 없고, 감시하는 이도 없이 아버지는 덩그러니 앉아계셨다. 지키는 이 없고, 감시하는 이 없어도 어디로도 갈 수 없음을 모두가 알고 있던 덕이었겠지. 따스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멍하니 앉아계시는 아버지는 그림 같기만 했다. 그 그림이 자신을 보자 미소 지었다. 아픈, 많이 아파 보이는 미소.


“몸은, 괜찮으냐?”

“예, 아버지. 아버지는요?”

“나도…….”


인휘는 아들을 언급하며 자신을 데려올 때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았다. 떠났어야 했는데. 결국 또다시 족쇄가 되고 말았다. 인휘는 아들 앞에서 어찌 서 있어야 할지 몰랐다. 안아주어야 하는데. 다독여주어야 하는데, 어떤 자격도 없었다. 세상에 날 수 있도록 씨를 뿌린 것 말고는 제가 한 일이 무엇이 있는지. 차라리 죽어야 했는데, 그도 못했다.


“아버지, 미안해요.”


아들의 사과에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족쇄는 저였는데, 저더러 미안하다 한다. 진 역시,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차라리, 어둠 속에 계시게 할 것을. 차라리, 색뿐인 아버지의 그림을 보고 깨달음을 얻고 다 버려버릴 것을. 아니, 우리는 아니어야 해, 우린, 예술과, 세상과, 진은 머리 속에서 날뛰는 온갖 상념들을 갈무리지 하지 못했다. 그저 그래서 튀어나온 말 한마디. 미안해요, 아버지. 진이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진아.”


세상에 아비가 못나서 자식이 제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한다. 이 보다 아픈 것이 세상이 어디 있느냐. 인휘는 제 자격이고 자시고 다 던져버리고 진을 끌어안았다. 식은 땀, 차게 식은 몸에 다시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그러지 말걸. 자격이고 용기고 다 던지고 히르가 도망가자고 할 때 가버릴 걸, 애비가 못나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 모든 말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냐, 미안하다. 미안하다. 인휘는 그 모든 말을 눈물에 담아 보낸다.

.

.

.

전쟁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왕세자 파도, 국왕파와 교황청군도. 심문소의 이단 심문관들도 급히 훈련에 들어갔다. 이단 심문관이 되기 위한 훈련과정 중에 군사훈련도 있긴 하다만, 이리 본격적으로 훈련을 하게 되니 모두가 당황스럽고, 두려웠다. 오, 신이시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검은 옷에 군대식 직위가 달린 견장을 하나 더 차고 열을 서고 사람을 베고 찌르는 훈련을 한다.


새로 정한 신군(神軍)이라는 이름이 우습기 그지 없다. 어디 신을 위한 군대인가, 속세의 왕을 위한 군대가 된 것을. 그 검은 깃발아래서 흰 제복의 사제에게 축복을 받고, 칼을 들고 총을 든다. 누구의 지위를 받아야 하는가에 관해 국왕파 귀족들과 심문관 고위직 사이에 무슨 분란이 있었다던가, 하는 것들 다 훈련 중 흘린 땀 사이에 흘러갈 이야기들. 피 흘릴 사람은 어차피 검은 옷을 입은 개들 뿐.


훈련이 끝나고 여러가지 잡다한 일을 보러 나선 카르는 혼란스럽고 긴장된 거리를 쳐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간간히 있던 시위로 경직되던 거리의 분위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시위는 고개를 돌리고 집안에 숨어있기만 해도 나의 일이 아니지만, 전쟁은 다르니까. 생에 처음으로 겪게 될 전쟁에 저 역시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일방적인 추적이나 살해가 아니라, 똑같이 칼을 들고 싸운다면 자신은 어찌 될 것인가. 남아야 할텐데, 우리가 져서 감옥 안의 모든 이들이 내 살점을 뜯어 가더라도, 진과 혜인이 뜯어갈 살점은 남아있어야 하는데.


카르는 제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자꾸 불길한 생각만이 든다. 누군들 아니겠냐마는. 어서 가서, 나르와 라프, 다른 동생들에게 주의할 점을 알려주고, 집안일을 마무리 해야 한다. 사람 죽이고 살리는 일을 하면서 모았던 돈이 충분치는 않아 어디 피난 보낼 곳이 마땅치 않네. 이제 아이들도 클 만큼 컸으니까 저들 장담하던 것처럼 어디 전쟁이 끝나도 무사히 살아갈 수 있겠지.


“하.......”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왜 자꾸 불길하게 나 죽은 뒤를 상정하는 것일까. 카르는 뒤돌아 제가 걸었던 길을 보았다. 긴 길, 피흘리며 걸어온 길, 당연하니까, 그게 합당하니까. 멀리 보이는 심문소 건물, 신의 축복도, 벌도 믿지 않아. 인과응보라는 세상의 원리도 믿지 않아. 그저 개니까. 나는 수 많은 검은 개들 중 하나니까, 개가 어디서 죽든 간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 어쩌면 그게 가장 당연한 세상의 원리일테니까. 그래도 가장 쓸모 있고, 가장 사냥을 많이 하던 개여서, 새끼들은 먹여 살렸으니, 그걸로 충분하겠지.


다들 각오는 하고 사는 것이니까. 이미 윗선의 지시로 참전하는 이들은 유서를 쓰고, 심문소에서 취합 했다. 집과 얼마 안 되는 재산 모두 아이들 몫으로 이미 돌려두긴 했다만, 전쟁이 끝나고 그게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한줌 아이들 몫이 남기라도 하면 다행이겠지.


“너희들은 어디 있니…….”


카르는 홀로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려본다. 진과 혜인은 이 전쟁에 참전할까. 전장 어디에서 혹여 총칼 마주하지는 않을까. 왜 그게 두려울지. 내가 할 일은 자명하고, 네가 할 일도 자명한 것을. 왜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여러분, 우리는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거리에서 어느 사내가 크게 외치고 사람들이 바라본다. 카르는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제 칼에 손이 갔지만 곧 그를 내려놓았다. 전쟁이 임박하면서 거리에 온갖 종자들이 쏟아져 나와 제 외치고 싶은 말을 외쳐도 심문소는 더 이상 신경 쓸 수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겠지. 윗사람들이 하는 말로는, 어차피 전쟁이 시작되면 저런 놈들 그저 쓸어 박아 버릴 것이라며. 쓸어 박히는 쪽이 어느 쪽이 될지 모를 일이라며 이죽거리던 일스 같은 상관도 있긴 하지만. 그 이 심정이 내 심정이다.


카르는 거리를 뛰어다니며 시를 노래하는 사내를 멍하니 보았다. 미친 놈이로구나, 이런 시국에 시라니. 미친 놈이로구나, 이런 시국에 이 시를 듣고 있는 나는. 그 시 들으며 먼 북쪽 마을 회색 집을, 그 보다 멀리 있는, 멀리 있던 어린 시절의 세상을 떠올린다. 빛과 색으로 가득하던 그곳, 다시 갈 수 없는 시절.


시끄러운 거리에 낭랑하게 읊어지는 시에 그냥 지나치는 이도, 귀 기울이는 이도 있다.


우리는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 때문에 피를 흘린다.

눈물로 그린 그림.

슬픔 한 방울

두려움 한 방울.


한 소녀가 말했다.

두려워 하세요.

두려운 만큼 용기를 내세요.

소녀여

나 두려운 만큼 용기를 내면

나 두려운 만큼 눈물 흘리면


내 눈물로 저 하늘만한 화폭을

가득 채울 것이다.

비둘기 날개죽지 회색 그림이겠지.


나 어느 화가의 그림을 보았다.

눈물로 그려도

파랗고 하얀 그림이었다.

먼 과거

먼 미래

우리가 꿈 꾸는 세상

색으로 가득한 세상

그 세상

투명한 눈물로 그려낸 그림을 보았다.


소녀여.

내 눈물로 그린 그림도

화가의 그림처럼 그랬으면 좋겠더라.


투명한 눈물이 회색 세상 위에 얼룩지지 않고

눈물이 색이 되어

화가의 그림처럼 회색 위에 덧칠했으면 좋겠다.


그러하다면

쏟아낸 눈물 어찌 아까우랴.





1714년 9월 21일.

내전 발발.


작가의말

저번 회 저를 믿어주시는 댓글들을 보고 감동받았습니다. ㅠㅠ 감사합니다. 조금, 빠른 속도로 달려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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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Personacon Rainin
    작성일
    14.10.06 00:30
    No. 1

    문피아의 보석, 보증수표, 숱한 멋진 완결작을 쓴 작가.
    지금까지 쌓아오신 것들의 절반만 고려한다해도
    신뢰치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건필하소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4.10.06 22:30
    No. 2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6 ACHT.W
    작성일
    14.10.06 23:09
    No. 3

    혼란 속에서 진과 혜인이 어떻게 될지가 궁금합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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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회색시대-20.아름다운.(3) +1 14.10.11 818 29 9쪽
160 회색시대-20.아름다운.(2) +3 14.10.09 825 35 9쪽
159 회색시대-20.아름다운.(1) +1 14.10.08 1,078 35 9쪽
» 회색시대-19.젖은.(4) +3 14.10.06 1,050 25 9쪽
157 회색시대-19.젖은.(3) +4 14.10.04 880 27 11쪽
156 회색시대-19.젖은.(2) +1 14.09.27 760 34 10쪽
155 회색시대-19.젖은.(1) +2 14.09.21 701 2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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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회색시대-18.뒤엉킨.(6) +2 14.09.03 922 21 10쪽
151 회색시대-18.뒤엉킨.(5) +2 14.08.31 915 3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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