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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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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최근연재일 :
2015.02.25 07:03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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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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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18,771

작성
14.09.27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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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회색시대-19.젖은.(2)

DUMMY

세이즈는 거처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맥이 탁 풀려버렸다. 아버지 앞에서 그리 당당하게 외쳤지만 실은 몹시 실망스럽고 다 때려치우고 엉엉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기분이 방 안에 가득한 쌉쌀한 술 냄새에.


“오르트 씨!”

“오! 우리들의 문필가! 가족상봉은 잘 했나!”


빈 병 굴러다니고, 아직 따르지 않은 술까지 가득하다. 술에 취해 킬킬거리며 맞이하는 그 모습에 세이즈는 짜증이 치솟아, 답지 않게 척척 걸어가 술 병을 확 잡아 챘다.


“뭐에요, 지금 이 상황에서!”

“큭큭, 이런 상황이니까 마시지. 이런 뒤엉킨 혼돈만큼 씁쓸한 술 안주가 또 있던가!”

“말투 보니까 벌써 다섯 병은 넘…….”


세이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술 병과 술 병 사이에 구겨진 종이와 펜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무얼 쓰다 만 건지 오르트의 손도 꺼뭇한 먹 자국이 흥건했다. 세이즈는 또다시 맥이 풀렸다. 그래, 술 한 잔 하고 글 쓴다는 사람에게 더 무어라 할 것인가.

“글 쓰는 중이셨군요. 미안해요, 흥분해서…….”

“화 날만 하지! 분노할 만하지! 참전! 참전! 참 아름다운 단어, 참전을 종용치 않던가! 우리들의 문사여!”


술에 꼬인 혀로 주절주절 내뱉는 오르트의 말에 세이즈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설마, 오르트 씨도 그런 명령을 받았어요?”

“암, 받았지! 시대의 사상가, 가능성의 저자, 엉터리 시인이니 받을 수 밖에!”


오르트는 마치 배우처럼 양 팔을 번쩍 들고 과장된 태도로 떠벌 거리더니 털썩, 하고 자리에 도로 앉았다. 열렬한 배우는 가고 없고 주정뱅이는 다음 잔을 따르며 킬킬거렸다. 세이즈는 오르트를 말릴 생각 하지 않고, 저도 곁에 앉아 한 잔 따라 마셨다. 독주도 아니건만 술 맛이 쓰다.


“그래서, 쓰실 거에요?”

“암, 써야지. 쓸 거지. 우리는 끝까지 써야지.”

“무슨 말씀이세요!”


오르트는 다시 낄낄거리며 구겨진 종이를 내밀었다. 꼬깃꼬깃한 종이 위에 가득 쓰인 것은 참전 독려문이 아니었다. 시, 오르트의 시, 우리들이 늘 비웃던 그의 시. 그저 그림의 아름다움을 노래 하는 시.


“쓸 거야, 인쇄비가 마땅찮으면 손으로 베껴서라도 배포할 거야. 우리들은 써야 해. 그들이 전쟁을 이야기해도 우리는 끝까지 그림 이야기를 해야 해. 그게 우리가 글을 배운 이유고, 세상에 갚아야 할 빚이야.”

“오르트 씨…… 위험할 거에요.”


아비가 냉혹한 권력자라 하지만 자식에게까지 무언가 저지를만한 사람은 아님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저의 서투른 반항에 모른 척 눈감아 줄 수 있는 사람이기에, 믿고 그리 저지르고 온 참이었다. 하지만 오르트는 아니었다. 후원자도 뒷배도 없는 사람, 그저 홀로 있는 사람. 하지만 오르트는 웃기만 했다. 무언가 벗은 듯, 무언가 쌓인 듯, 시원하면서도 쓰게 웃는다.


“오, 맙소사, 세이즈. 언제는 안 위험한 적이 있었나? 내가 가능성을 쓸 때부터 난 윗사람들이 나를 곱게 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

“예? 가능성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세이즈가 눈을 크게 뜨자 엉터리 시인은 세이즈의 고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가진 자이되 가지지 않은 자였으니 몰랐구나. 그래, 그래서 아비를 만나도 회포의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콧김 한숨 다 숨기지 않고 여기로 돌아온 것이겠지.


“가능성, 누구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했는데. 우리들의 사라진 가능성을 이야기했는데, 그 가능성을 가져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들이 나를 막을 가능성은?”

“맞지도 않은 운율은 관두세요. 그래요, 알겠네요.”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듯이 글이 많으면 잡을 꼬투리도 많지. 지금껏 뿌린 글이 몇 개인데, 내 목 하나 칠 글 하나 못 찾을까. 독려문을 쓰나 안 쓰나, 일이 끝나면 가장 먼저 입에 손에 족쇄 채워 버릴 패가 내가 될 것을 어찌 모를까. 다 알고 썼다네.”


주절주절 늘어놓던 오르트는 다시 한 잔을 쭉 들이키더니 크게 웃는다.


“다 알고 썼는데 입은 왜 쓸까?”

“…알고 있어도, 바꿀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아마도.”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말하고 이야기하고 써야 해. 그날, 기억나? 추모제. 아이사크가 한 말.”


세이즈는 입을 다물었다. 그날, 치안대에서 총을 탈취하러 달려가던 다르나 대학 학생회장 아이사크 템멜은 자신을 말리던 오르트에게 욕을 했다. 겁쟁이 새끼들, 뒤에서 글 줄이나 적으면서 모든 걸 다 한 것이라 생각하는 쥐새끼 놈들이라고, 그리 욕을 했다. 세이즈는 눈을 감았다. 살아 돌아온 목숨값, 내 목숨만이 아니라며 안전한 곳에서 일신을 보중했다.


“적에게 내지르는 글을 쓰는 것만치 용기가 필요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 내부에서부터의 비판이지. 아이사크, 그 녀석 어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녀석에게도 보여줘야지.”

“…….”


오르트는 답 없는 세이즈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네가 그랬잖아. 용기를 내라고, 두려운 만큼 용기를 내라고.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니까.”


세이즈는 슬며시 제 머리를 잡아 당겼다. 술 냄새 배요, 하고 중얼거리자 오르트는 다시 웃는다. 웃으며 제가 쓴 시를 읊는다. 소녀여, 나 그림을 보았노라고. 눈물로 그린 그림을 보았노라고 시를 읊는다. 세이즈는 오르트의 시를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과 자신은 선택을 했다. 가던 길, 무너지고 흔들리지 않고 계속 가겠노라고. 그러하나, 다른 이들은 어찌 할까.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아닌데.


다들 얽혀있을 텐데. 함께 일을 한 이들 중 누군가는 후원자의 압박을 받을 것이고 또한 누군가는 가족의 강요를 받을 것이며, 강요와 협박이 아닌 자신들의 판단으로 글을 쓸 이들이 있을 것이다. 글뿐만 아니라 사람의 눈과 귀를 현혹시킬 재주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아니다.



거리에서 몰과 청년들은 깃발을 휘두르며 뛰어다녔다. 참전, 참전, 백성을 위할 왕이 되실 왕세자를 위한 참전, 교황청과 결탁하여 백성의 곯은 배를 취한 왕을 쫓아내고 우리들의 왕이 되실 분을 위한 전쟁, 지금도 그 더러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백성의 피값을 똥값으로 아는 이를 위해서 가 아니라 금값으로 아는 이를 위하여 싸우자, 싸우자, 명료한 언어로 이루어진 노래를 부르며 깃발을 휘두른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다닌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에 같잖은 수사는 필요 없다. 단순한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이 가슴과 머리를 때리고 눈 앞의 돈이 손을 들어 지장을 찍게 한다. 참전을 노래 부르는 이를 착잡하게 바라보던 이들 중에는 네쉐도 있었다.


그 날, 예술해방전선의 시위가 있던 날, 어찌어찌 도망쳐 겨우 살아남았다. 끌려간 이들도 여럿, 도망친 이들도 여럿, 분분히 흩어졌던 이들이 겨우 다시 만났던 날, 세상은 혼란스러웠다. 아무도 그림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한지, 저들이 도망치기를 도와준 이들이 요청을 해왔다. 참전을 독려하는 그림과 조각을 하고 글을 써달라고. 예술해방전선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모여 앉아 그 일을 의논했다. 누군가는 의리로, 인정으로, 혹은 돈 때문에 해야 한다 말하고 누군가는 그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네쉐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래서, 마야크가 후원자가 있으면 조직의 독립성이 무너진다고 한 것이겠지. 오, 마야크, 우리들의 혁명가, 우리는 너무 빨랐고, 우리는 너무 서툴렀어. 그래서 닥쳐온 것은 분열이고, 와해였어.


-대중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목적 아니오? 예술은 대중에 봉사하여야 하오!

-우리가 봉사하는 대상은 대중이지 권력자가 아니오!

-우리는 자유로워야 하오!

-권력자가 아니오! 참전을 통하여 스스로 이루어낸 것으로 대중 스스로가 해방되는 것이오!


말, 말, 말, 말과 말이 맞부딪혀 박살 난 것은 조직이었다. 대중에의 봉사를 모토로 삼아 예술해방전선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갔다. 중심이 되던 마야크가 감옥에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던 것일지도. 뭐라더라, 새 조직의 이름이, 대중예술운동단였던가. 네쉐는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대중 예술을 한다고 이름 지은 놈들이 기껏 한다는 것이 참전 독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이. 하지만, 이제 자신들은 어찌 해야 하나.


멀리 보이는 파아란 가을 하늘, 네쉐는 고개를 들어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 참전 독려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쟁이 끝나고 왕세자가 왕이 되어도, 우리의 손 발은 보이지 않는 재갈로 묶일 것이다. 하하하, 부러 소리 내 웃어본다. 그래, 언제는 손 발이 자유로워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했더냐. 언제는 내가 소속된 곳에 이름 붙여가며 그림을 그렸더냐. 시작은 망치와 정을 가지고 깨고 부순 것뿐이었다. 그러하므로, 끝도 그럴 것이다. 다만 많이 죽지를 않기를, 다만 많이 다치지를 않기를, 다만 다치고 죽은 자들의 피가 허망한 것이 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조각을 할 뿐일지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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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76 ACHT.W
    작성일
    14.09.27 15:21
    No. 1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개인적으로는 오트르라는 캐릭터가 호감이 생겨서 오르트와 세이즈가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어떻게 될 지가...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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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회색시대-18.뒤엉킨.(5) +2 14.08.31 915 3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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