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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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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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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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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회색시대-21.메마른.(4)

DUMMY

중앙 심문소를 앞에 두고 모두가 긴장 하고 있었다. 왕세자 측이든, 신군 측이든. 화력 좋은 마법사들은 뒤로 빠져야 했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해내려면, 섬세한 주의가 필요했다. 다 죽어가는 이들의 생사가 중요했던 것은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생사는 훗날 전쟁의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충분한 뜻이 될지니. 하여, 중앙 심문소 감옥을 지키는 병사들은 전열을 단단히 방비하고 기다렸다. 그들에게도 또한 죄수들은 상징이었다. 악마의 자식들. 우리가 잡았던 어둠의 자손들을 어디에도 놓아줄 수는 없을지니.


“전진!”


지휘관의 지휘에 따라 앞줄의 총잡이들이 척척척 걸음을 걷는다. 시가전인 만큼 그 전열이 길지 않았지만 맞춰 걷는 걸음이 울려내는 소리는 사람을 두렵게 한다. 애초에 공성전 따위는 대비 못한 건물이었으므로 심문소 안에 반, 심문소 밖에 절반 그렇게 배치된 신군들이 두려워하며 그를 맞이 한다.


마법사들이 연좌 시위를 할 때도 이토록 두렵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앉아 소리를 지르고 그 이상 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칼 날은 턱 밑까지 다가오고, 총신이 햇빛에 빛나고 있다. 심문소 안에서 다음을 위해 벽에 등을 대고 대기 중인 심문관들은 덜덜 떨려 오는 턱을 이로 악 물어 견뎌내려 애썼다. 쿵, 쿵, 쿵, 사람들의 발소리.


“발포!”

“발포!”


양측에서 동시에 발포 명령이 떨어졌다. 맨 앞줄, 비싼 총알이 든 이들이 서로를 향해 쏜다. 그런 날이 있었지, 좋은 나날들. 맨 손 맨 주먹 쥔 이들에게 쏘고 베기만 하던 날들. 하지만 그런 날은 가버렸지. 똑같이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하는 날들. 탕, 탕, 총알과 동시에 비명이 날아들고 피가 터진다. 명령에 따라 쓰러지지 않은 사람들은 전열을 정비하며 다시 총을 쏜다. 사람들은 그러더라, 이 피를 흘리는 것을 두고 그저, 시작일 뿐이라고. 서로 힘을 보여주는 것뿐이라고. 이 피를 두고 그러더라.


서로간 총탄으로 대략 힘을 가늠하게 되자 이번에는 칼을 쥔 이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늘 하던 일 그대로다. 살육전, 항복도 포로도 필요 없는 살육전. 그를 통해 힘을 과시하고 사람을 치워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향하여 칼을 꽂는 일, 베는 일, 쑤시는 일, 짓밟는 일, 천년 성벽 안에서 늘 일어났던 일. 그저 잠시 잊고 있던 일. 위가 무슨 생각을 하던, 아래는 이기기 위해서 베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거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심문소 안쪽 문에 기대고 있던 어린 병사 하나가 몸을 떤다. 누군가 문에 통째로 몸이 꽂힌 듯 쿵, 하는 소리와 비명이 동시에 들린다. 지금 문에서 온통 찢어발겨지는 이는 아군일까, 적군일까. 그저 문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쿵, 쿵, 쿵. 그 소리보다 더 빠르게 심장이 뛴다. 그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문에서 더 울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벼. 벽에 몰려있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을까.”

“하지만, 명령이…….”


불안감에 휩싸인 신군 병사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다가 문득 상관의 눈치를 본다. 지휘자인 심문관은 침중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시시각각 자신들을 향한 포위망이 좁혀져 온다. 바깥으로 보냈던 아군은 거의 다 죽어 자빠지고, 골목과 대로를 통해 왕세자군은 끊임없지 추가 병력을 받을 수 있는 상황. 자신들은 바다 위의 섬 같은.


“2진! 총력을 다하여 심문소를 지켜라!”


대장의 명령에 심문관들은 다시 두려움을 턱까지 치솟아 올랐다.


“우리는 신의 종, 악마의 자식들에게 결코 혹하지 않는다! 우리의 승리가 곧 그분의 참된 영광이다!”


깊은 신앙심을 가진 대장이 그리 외치자 신군들은 모두 기도문을 외치며 소리를 내지른다. 두려움을 잊어 버리기 위하여. 다만 그들 중 한 사내만 자신의 칼날을 슬며시 흘려보았을 뿐이었다. 신의 영광과 피에 도취된 열정적인 언어가 귀에 따가워 사내는 귀를 수석거리며 그의 뒤에 다가가 섰다.


“피의 피를 짜내라! 짜내어 그분께…….”

“네 피부터 일단 짜내자고.”


일스의 칼 질에 피가 팍, 튄다. 죽은 이는 놀란 눈 그대로였고 일스는 대장의 시체를 밟고 지나갔다. 모두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일스를 바라보았다.


“신의 영광도 살아야 맛보지? 뭐 어차피 우린 죽어도 지옥 가. 그럴 거면 좀 더 살아도 되지 않겠어?”


배신자, 배신자다. 모두가 그의 배신에 당혹해 마지 않았다. 교황청의 미친개, 가장 깊은 신앙심의 소유자. 그런 자가 지금 신의 영광이 아니라, 살아 남자 말한다. 일스는 턱을 바깥쪽으로 향했다.


“죽고 싶으면 내가 문 열어줄게, 칼 들고 설쳐봐.”

“배, 배신자!”

“어, 그래. 그런데, 여기 살고 싶은 사람들?”


바깥에서는 승기가 굳혀져 진 것을 예감한 듯, 노래 소리와 북소리가 들린다. 왕세자 군의 나와라, 항복하라, 포위되었다, 하는 그 목소리가 드높다. 죽어 신의 영광을 맛 보느니, 살아 삶의 치욕을 맛보길 바라는 이들이 여기 있다. 여기 그 누구가 그리도 신앙심이 깊었느냐. 다들 칼 하나 쥐고, 금 푼 하나 손에 쥐니 사람들 모두 고개를 숙였다지. 누군들, 아니었을까.


“배신자! 죽어!”


아닌 이들 있지. 신의 영광이 그토록 소중한 이들. 하여 누군가 일스를 향해 달려들지만, 살고 싶은 이들이 그를 붙들고, 방금까지 함께 두려움을 나누던 이를 찌른다. 그리고 서로간에 눈치를 보며 살아 남아 삶을 선택하고 싶은 이들이 영광을 부르짖는 이들을 찌른다. 다들 알지 않느냐, 살기 위해서는 찔러야 한다. 아군이란 허명은 삶 앞에서 적이 된다.


난투가 벌어졌다. 살고 싶은 자들과 배신에 치를 떠는 자들 사이에 피 튀기는 난투를 일스는 느긋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어디든 배신자가 있다. 용기와 정의를 부르짓던 이들 사이에도 있었고, 신의 영광을 부르짖는 이들 사이에도 있었다. 그것은 세상의 법칙. 당연한 것. 온통 검은 것과 온통 하얀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최소한 사람은 그렇다. 그렇게 믿는다. 그것이 자신이 세상을 사는 법칙.


“난 근본부터가 배신자야. 뭐래.”


일스는 비죽거리며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끌고 중앙 심문소의 거대한 문을 열었고, 이미 삶을 선택한 심문관들은 어찌 할 바 모르고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중앙심문소는 너무도 어이없게, 쉬이 문이 열리고 말았다.


일스가 바깥을 향해 무어라 외치고, 이미 중앙심문소 주변을 둘러싼 병사들이 다가온다. 심문관들은 그 기세에 못 이겨 하나 둘 총칼을 내 던진다. 저기 삶의 길이 있다. 더러운 삶의 길이. 세상 목숨 어디 더러운 목숨이 있겠느냐, 가장 중요한 것은 숨을 쉬는 것.


왕세자 군은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 일스는 내버려두고 사람들을 하나씩 붙들기 시작했다.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묶고 발로 차며, 기게 만들었다. 나가라, 이곳에 나가라, 너희들이 신의 이름을 빌러 불의를 행하던 이곳에서 나가라. 병사들은 포로들을 이끌어 한쪽에 묶어두고, 심문소의 신군 깃발을 내리고, 왕세자군의 깃발을 올렸다.


둥, 둥, 둥, 왕세자 군 측에서 북을 두드리고 병사들은 달려들어가 감옥 문을 열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열린 감옥 사이로 사람들이 기어 나왔다. 누구는 그림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누구는 그림의 자유롭게 그렸다는 이유로, 다른 종교에 관한 책을 본다는 이유로, 누구는 심문관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누구는 신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갖가지 이유로 잡혀왔던 이들이 기어 나왔다. 그들 중 사지 멀쩡한 이는 없어 보였다. 모두가 낡은 옷자락에 피를 묻히고 기어 나왔다.


“으, 으아아!”


그들 중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자신들을 맞이하는 왕세자 군을 향해서가 아니라 기어 나온 벽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의미인지, 무슨 소리인지 아무도 그 뜻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벽에서 기어 나왔던 이들은 공감했다. 하여 다들 비명을 지르며 벽을 향해 달려갔다. 왕세자군은 그들의 행태에 당황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하고 불러봐도 그들은 벽을 향해 달려갔다. 쿵, 쿵,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을 두들겼다.


울분으로, 분노로, 벽을 두드린다. 맨 주먹, 멀쩡하지 않은 사지로 벽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제 주먹이 피로 적셔져도 부순다. 어차피 몸이 온통 다 피이거늘,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비, 비켜봐 씨발!”


누군가 공병대에서 뺏듯이 가져온 망치를 질질 끌고 온다. 그 망치에 사람들이 달라 붙었다. 멀쩡치 못한 사지들이니 홀로 그 거대한 망치를 어찌 들랴. 망치에 둘러붙은 사내들은 하나, 둘, 하나, 둘, 셋, 한다.


쾅, 소리가 나며 한 번 울린다. 하지만 그로 부족했다. 하나, 둘, 셋, 쾅, 쾅, 쾅, 망치가 벽을 두들긴다. 그를 본 사람들은 자신들도 공병대를 찾고 망치를 찾는다. 그럴 정신도 없는 이들은 손으로 벽을 두들겼다. 병사들은, 왕세자 군은, 왕세자 군의 마법사들은, 왕세자 군의 지휘관은 그를 지켜보았다. 문을 열었던 일스도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포로가 된 심문관들 역시, 그를 지켜만 보았다.


“으아아아아!”


쾅, 쾅, 쾅, 같은 곳으로 지속적으로 두들겼던 벽이 부서지고 사람들은 다시금 달려들어 벽을 부수려 애썼다. 망치가 없는 자들은 돌을 돌려 깨러 했고 몸으로 밀어 붙이기도 했다. 쾅, 쾅, 쾅, 거대한 소리가 천지를 울린다. 힘이 약한 여자 죄수들이나 고문으로 몸이 성하지 않은 이들도 멈추지 않았다. 한꺼번에 달려드는 사람들, 벌레 떼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벽을 두드린다. 쾅, 쾅, 쾅.


부서졌다. 건물의 한 축이 완전히 부서졌다. 땀과 피에 젖은 사람들은 무너진 축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너지더라. 사람들이 모이니 이렇게 무너지더라. 누군가 하나가 그 무너진 벽돌 더미로 기어 올라갔다. 맨 손 맨 발로 기어 올라가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외쳤다.


“사, 사람 만세!”


중앙 이단 심문소의 감옥이 그렇게 무너졌다. 마법도, 총탄도 아니라, 그렇게 사람 손에 무너졌다. 사람,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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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회색시대-21.메마른.(2) +1 14.10.25 1,613 10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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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회색시대-20.아름다운.(2) +3 14.10.09 825 35 9쪽
159 회색시대-20.아름다운.(1) +1 14.10.08 1,079 35 9쪽
158 회색시대-19.젖은.(4) +3 14.10.06 1,050 25 9쪽
157 회색시대-19.젖은.(3) +4 14.10.04 881 27 11쪽
156 회색시대-19.젖은.(2) +1 14.09.27 760 3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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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회색시대-18.뒤엉킨.(5) +2 14.08.31 915 3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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