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시대-20.아름다운.(1)
와아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 무리가 총검을 들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검은 옷 푸른 옷이 그 한가운데서 부딪히기 시작했다. 부딪히면서부터는 온통 혼란 뿐이었다. 비명과 비명이 섞인 혼란. 찌르고 쏘고 벤다. 그 모든 동작들이 어우러져 피가 흘렀다. 내장이 터져나가고 목이 떨어져 나간다. 미처 다 잘리진 못한 목에서 피와 거품이 부글부글 흘러 나와 땅에 스며들려 한다. 그것이 스며 들기도 전에 말이 짓밟고 지나가고 사람이 짓밟고 지나간다. 짓밟고 지나가는 말은 총에 맞아 죽은 사람 위에 쓰러진다. 혹은 산 사람 위에. 살아있어도 다시 깔려 비명을 지른다.
“앞으로! 앞으로!”
“피해!”
쿠쾅, 하며 폭파 소리가 나지만 진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아직 자신의 차례가 아님을 알고 있다. 마법사들은 높은 곳에서 전선을 둘러보며 꼭 필요한 곳에 마법을 쓴다. 마탑의 마법사 몇과 자리하고 있고, 경험이 많은 그들은 진에게 마력 조절이 아직 능숙하지 않으니, 그 유용한 마법은 조금은 결정적일 때 쓰게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진은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쓰게 웃었다.
히르 아저씨도 다른 전선에 있다. 그 역시, 힘이 있지만 딸이 있기에 참전해야만 했다. 단지, 그 분은 용병 형식으로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히르가 돈을 요구하자 외려 그네들은 아저씨를 믿는다고 했단다. 돈이 아니면, 권력이 아니면, 사람을 움직일 것이라 믿지 못하는가 보다. 아니면, 인질이 있어야 한다거나.
-아버지, 조심하세요.
인휘는 아마 최고의 보호를 받고 있을 게다. 인질이라는 가치뿐만 아니라 전후의 선전 도구로 최상일 테니까. 소위 그 구조란 놈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는 한. 진은 제 계급장이 달린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배급 받은 군복이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그저 등에 매달려 있는 통 하나. 아버지가 걸어주었던 통 하나. 아버지의 그림과 제 그림이 섞여있는 그림 통 하나, 그것만이 온전이 제 것 같다.
-진아, 손이 없다는 것은 손을 잡을 수 없다는 뜻과 같을 게다.
그나마 손이 없어, 아직 온전한 그림은 그릴 수 없다는 핑계를 대 참전 독려화를 그리는 것은 피하게 된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여전히 사각 속의 그림이라도 좋아요, 그저 그리고 싶으신 것 그리세요. 그저 꿈을 꾸시던 것을 그리세요. 아버지의 속에서 보았던 빛으로 가득한 세계를 그리세요, 그래야, 이곳에 제가 있는 이유를 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곳에 있는 것이 끔찍하지 않을 것 같아요.
-난 내 주변만 편하면 다야.
진은 홀로 숨을 삼켰다. 감은 눈 앞에 펼쳐져 있을 생지옥 속에 혹 너도 있니. 네가 그리도 말하는 네 주변은 지금 어디 있니.
“진 일리스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진은 눈을 뜨고 제 괴물 그림을 꺼내 들었다. 상급자가 말하는 지정 부분만 힐끗 살펴보고 얼른 시선을 돌렸다. 눈 앞에 서로를 찌르고 패고 있는 사람들, 피 흘리는 사람들, 저것은 사람이 아니다. 아니어야 했다. 덩어리일 뿐이다. 뭉쳐 다니는 어떤 덩어리.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의 얼굴도 모른다. 그저 아무것도 모를 덩어리들.
“가라!”
진이 집중하자 곧 그림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와 쿵쾅쿵쾅 달려가기 시작한다. 거대한 괴물이 ‘덩어리들’을 밟으며 지나갔다. 누군지 무엇인지 모를 것들을. 칼을 쥔 자는 그를 놓치고 총을 쥔 자는 그를 놓친다. 제가 무엇에 죽었는지 몰라 눈알을 뒤집고 혓바닥을 내빼고 뒈져버린다. 내뺀 혀가 입에나 달려있으면 다행이지, 더러는 텅 빈 눈알 피고름 틈 속에 엉겨 붙어 찌그러져 있기도 하고, 누구의 팔은 터져 심장에 뿌리처럼 박혀 있다. 또 누구의 발은 몸에서 저 멀리 떨어져 녹슨 내장찌꺼기들처럼 보이는 시뻘건 육수들과 함께 그 속에 짓눌려 있기도 했다. 진은 거기서 시선을 돌렸다. 돌려도 잠깐 사이에 눈에 담기는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
제 분노가 타인의 분노를 짓밟고 지나간다. 타인의 목숨을 짓밟고 지나간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처럼 생각하자꾸나. 그들이 저 밑에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듯이. 너도 지금 이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저기 괴물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들은 사람이라 생각지 않지 않느냐. 그저 덩어리들. 덩어리가 짓밟혀져 땅에 진흙처럼 남긴 흔적들. 피 냄새 살 냄새 화약냄새 죄다 네 몸 내 몸 할 것 없이 배어 느껴지지도 않는 것을.
“윽.”
욕지기가 치어 올랐다. 냄새가 역해서가 아니었다. 분노가 분노를 밟고 지나가던 길에 누군가 제 분노를 또 짓밟았나 보다. 하여, 다시 분노하고, 다시 두려워하고, 다시, 다시, 수레바퀴처럼 모든 것들이 굴러가 다시 제자리로.
“가!”
그 역함을 참아내고 다른 괴물을 전장에 내보낸다. 진은 몸 안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느낌이 나 자리에 주저앉았다. 괴물은 여전히 사람을 짓밟고 있다. 사람이 아니다, 저것은. 아니, 사람이 아닌 것은 나겠지. 진은 눈을 감고 모든 것에서 시선을 차단했다.
하지만 괴물과 공감을 이루고 있는 한, 그가 저지른 일들을 알고 있다. 느껴져 온다. 커다란 발로 누군가의 머리통을 짓밟고, 누군가의 몸을 잡아 휘두르고, 던지고 눌러 터트린다. 여린 살이 마구잡이로 터지고 있다. 손에는 끈적한 피와 내장 속 알 수 없는 것들이 엉겨있다. 감각이 공유되어 그 느낌이 손 끝에서부터 전해져 온다.
사람이 아니야, 사람이 아니야, 저건 사람이 아니야, 진은 그를 끊임없이 되새겨보지만 진실을 피할 수는 없다. 아버지의 유산, 색을 볼 수 있는 눈, 본질에 대한 이해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게 한다.
저들은 모두 심문관이다. 우리를, 사람들을 짓밟고서 낄낄거리고, 저들 좋을 데로 법을 만들어 사람의 손목을 잘라내고 그림 같은 게 다 무어라고 그를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저 들은 모두 심문관이 아니다. 돈 받고 참여한 사람, 끌려온 사람, 다 뒤 섞여 저기에서 죽고 있다.
-난 내 주변만 편하면 다야.
달라질 것은 없다. 제가 여기 전장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다. 제가 왕세자를 구하지 않았더라도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정했으니까. 그러하므로, 저들은 죽었을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저 괴물이 저기 없었더라면 어디 땅에 구멍 파 몰래 목숨을 구한 사람이 있었겠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네가 아버지를 모시고 따라오지 않았더라면, 시위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마법에 욕심을 내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히르 아저씨 앞에서 마법을 행하지 않았더라면. 않았더라면, 않았더라면, 수 많은 가정을 해 보았자 달라질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저기 사람들은 죽고 있으니까.
진은 감은 눈을 떴다. 덩어리다, 덩어리, 살덩어리뿐이야, 끊임없이 되뇌이며 상급자가 시키는 방향으로 괴물을 보냈다. 자신이 분노와 공포를 담아 만들어냈던 괴물이 지나간 자리에 역시 분노와 공포, 거기에 더하여 혐오가 덧칠해져 간다. 다행이다, 그리하여 이 괴물을 끝내 게속 그릴 수 있을 테니까.
“마법 병단 철수 준비!”
이번 전투가 마무리 되는지 위에서 누군가 외치고 마법사들이 하나 둘 마법을 거두기 시작했다. 진의 괴물도 그림으로 되돌아왔다.
“수고 했어.”
마법사 하나가 진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진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이의 위로 뒤에 느껴지는 시선들이 따끔하다. 마탑 소속이 아닌 마법사, 전장에 큰 도움이 되는 마법사, 유명한 화가의 아들, 마탑주의 추천, 그 모든 것들을 대하는 시선이 자신의 뒤로 쏟아진다. 바보 같다. 자신은 그냥 쓸모 있는 도구일 뿐인 것을. 진은 그저, 이 전쟁이 빨리 끝날 것이라고, 화력의 대부분이 왕세자군에게 있는 만큼 빨리 끝날 전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대장의 말을 믿고 싶었다. 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마법 병단의 일은 끝나지만 아직 전장에는 사람들이 찌르고 베고 있었다. 저것 봐, 마법이 없어도 저런 것을. 사람 따위 다 그런거야. 진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제가 있을 곳으로 돌아갔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