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시대-20.아름다운.(4)
“여기, 붕대!”
“예! 갑니다!”
세이즈는 후방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껴들었다. 여전히 이 전쟁을 반대 한다. 왕세자의 숨은 뜻과 그 외 가문들의 욕심을 알고 있는 이상, 이 전쟁은 반대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죽는 사람들의 태반은 그네들 욕심과 상관 없는 사람들, 그저 이것이 정의라 생각한 사람들 혹은 제 새끼 먹을 밥을 위해 생목숨 팔아 여기에 온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서 고개를 돌리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해서 돌린 고개를 가지고 지식을 이야기하고, 용기를 이야기하고, 미래를 이야기 하면 안 된다, 고 세이즈는 생각했다.
“윽, 아파요.”
“조금만 참으세요.”
그래도 의학이니 뭐니 지식이 짧아 간단한 부상을 입은 사람만 세이즈의 손을 거치게 되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이들은 저 쪽 천막으로 이송된다. 저쪽에서 생사가 결정되겠지. 거기서 나오는 피 냄새, 전장에서 흘러 들어온 피 냄새 어디든 피 냄새가 나건만, 그 피가 어느 누구든 붉지 않으랴. 세이즈는 병사의 다친 다리에 약을 바르고 간단히 붕대를 감아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힐끔, 뒤를 돌아보자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글 때문이었다. 전쟁을 반대하는 글을 썼다. 진실을 알아야 한다는 글을 썼다. 하지만 먹히지 않았다. 당연했다. 당연함에도, 그럼에도 우리는 써야 했으니까. 덕분에 감시의 눈길이 슬며시 따라 붙었다. 혹여 이 전장에서 그 진실을 입으로 내뱉을까 봐.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입이로다. 그나마 아비의 이름 값 덕에 이 정도였다.
-미안해. 난 써야 했어, 참전 독려문을.
심문관의 추적 속에서도 잘도 피해 다니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이들이 하나 둘, 펜을 꺾어야 했다. 외부보다 내부의 사정을 더 잘 아는 만큼, 내부 역시 외부보다 그들을 잘 알았다. 다들 하나씩 무언가를 쥐었거나, 쥐어줬다. 혹은 자신의 뜻에 따라. 세이즈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막았다. 그들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런 거다. 자신 또한 아버지라는 뒷배경, 그 이름값이 아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러하니. 세이즈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비워버리려 애썼다. 자꾸만 어깨가 처져서, 기운이 빠져서, 미움이 솟아 올라서.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 일은, 어려웠다.
“저기요!”
시끌벅적한 병영이니만큼, 세이즈는 저를 부르는 소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저기, 혹시, 설마, 세, 세이즈 양?”
이곳에서는 안 쓰는 제 옛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세이즈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짤뚝한 머리의 소녀가 자신을 바라본다. 그 머리 때문에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일, 일피드 양?”
“맙소사, 맙소사!”
일피드는 세이즈를 끌어안았다. 낡은 옷자락, 시큰한 냄새,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날 땐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는 모습을 떠올리려 한다. 일피드는 한참을 생시인지 꿈인지 구분 못해 눈을 껌뻑이며 세이즈를 만지작 거렸다. 그 순하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으나 미소 또한 함께 했다.
“전, 전, 세이즈 양이 죽었는지 알았어요!”
생사를 이제야 알 게 된 벗이여. 끝의 끝에 와 알게 된다.
“아니요, 다행히도, 살아있어요. 저, 일피드 양의 글을 보았는 걸요?”
일피드는 집을 나와 거리를 전전하고 인쇄소와 대학교를 숙소 삼아 돌아다니며 그림을 불러 짖었다. 손은 다 터지고 귀하게 자란 몸 생전 해보지 못한 온갖 고생을 했다. 아니다, 나는 그것을 고생이라 부르지 않으리다.
“설마, 그 글, 보셨어요? 보셨군요. 전, 그게 세이즈 양이 일하던 회보지라 거기에 넣었어요. 세이즈 양을 추도하며. 아니, 실례했어요, 세이즈 양은 이렇게 건강히 살아있는데, 살아있었는데……”
일피드의 커다란 눈에 고였던 눈물이 끝내 흘러 넘쳤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기에 이 눈물에 후회는 없다. 눈물로 그림을 그리지 못하더라도, 그렇더라도.
“저, 저도 보았어요. 우리가, 그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우리를 구원한다.”
“아, 그 글을.”
“가명이지만, 문체로 느꼈어요. 세이즈 양 맞죠? 전 혹시나 했어요, 하지만 진짜 살아계셨으니, 그거 세이즈 양의 글 맞죠?”
“예, 예. 제 글이에요.”
“저도 알았거든요. 그날 형장에서 보았거든요. 공중에 떠있는 그림을요. 그래서, 그래서. 저도 그래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세이즈양. ”
그 그림을 보았더랬지. 공중에 떠있는 그림을. 아름다운 그림들을. 그래서 다 모든 것 집어치우고 다 버리고 이리 나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세상을 구하자고 부르짖었다지. 비록 우리 손으로 이루어가지 못하고 있기에 가슴이 사무쳐도, 허망할지라도 우리는 걸어왔으니.
“알아요? 세이즈 양? 저, 세이즈 양이 없었더라면 몰랐을 거에요. 그래서 봐, 봐요.”
세이즈와의 재회에 흥분한 일피드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 종이 위에는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펜으로 거칠지만 가지를 뻗고, 잎이 달린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세이즈는 이것을 본 기억이 났다. 그렇구나, 그 익명의 기고 글이 이 아가씨의 글이었구나.
“난 이제 그림을 그려요, 비록 모자라지만, 그려요, 봐요, 조악하지만, 보세요. 세이즈 양이 없었더라면 못했을 거에요.”
구겨진 종이 위에 힘차게 자라고 있는, 검은 색 잉크로 그려진 나무 한 그루. 세이즈는 그 앞에서 차마 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울고 싶었다. 기쁘게 울고 싶었다. 그래요, 우리는 씨를 뿌린 거에요, 어느 천 년이 걸릴 질 몰라도 그 높다란 성벽을 감싸 타고 넘어갈 나무의 씨를 뿌린 거에요. 세이즈는 억지로 울음을 참고 일피드를 가만이 껴안았다. 아아, 사람을 원망하지 않기는 어려워도, 사람을 사랑하기는 이토록 쉽도다.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 이 작은 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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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씨! 어딜 다녀온 거에요? 난리가 났었어요. 이게 대체 무슨. 어서 병단장님께 가봐요!”
“네. 네.”
비척비척 병영에 돌아온 혜인을 맞이한 마법사 하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대충 대답을 한 혜인은 일단 병단장 앞에 가야 했다. 전선이 소강 상태이긴 했지만 연락책을 맡고 있던 마법사가 이틀이나 사라졌다 돌아오니 난리가 안 날 리가 없었다. 마법 병단장이 매우 화가 난 얼굴로 혜인을 내려다 보았다.
“어딜 갔다 왔나?”
“…….”
혜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도 이게 큰 모험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나가는 것에 더하여 이렇게 돌아오는 것은. 침묵하는 혜인에게 병단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치거나, 배신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배신, 이라.
“제가요? 배신요? 교황군의 정보를 어떤 식으로 얻는지 아시는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번에 침묵하는 것은 병단장이었다. 믿는 바가 있었다. 너희들이 인질을 잡았지, 너희들이 금권으로 사람을 농락했지. 그런 것, 나라고 하나 없을 줄 알았느냐. 아비가 기함을 하는 짓거리 한 보람이 있구나. 그네들이 우물쭈물 한 발 물러서는 꼴을 보니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그래, 반쪽자리라 우습게 봐왔겠지. 내 미래를 바친 보람이 있구나.
“자네의 특수한 상황이 있으니 이번은 그냥 넘어가네만, 군령은 군령, 두 번의 용서가 없을 것이다.”
엄히 말하는 꼴이 짜증스러웠지만 그저 넙죽 군례를 올려주었다. 그 성의 없는 군례를 몰라볼 병단장이 아니었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전후에도 자네의 신병이 안전하리라 생각하지 말게.”
우리에게 전쟁 후가 있을까, 지금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래도 혜인은 알겠다는 말 말고는 더 덧붙이지 않고 물러났다. 병단장이 그래도 지금껏 편의를 봐준 편이니 이 정도 예의는 지킬 수 있었다.
혜인은 진의 방을 찾았다. 진은, 이틀 전 제가 떠났을 때와 다를 바 없을 꼴로 엎어져있었다. 책상에는 그리다 내버려둔 괴물 그림으로 흩어져있고 싸한 약 냄새가 났다. 그 약은, 아파서 먹는 약이 아니었지. 아니, 아파서 먹는 약이 맞았다. 마음이 아파서 먹는 그런 약.
“진아.”
제가 부르는 소리에 진은 가늘게 눈을 뜨고 저를 바라본다. 그 눈동자는 흐릿하고도 흐릿했다. 멍하게 아무것도 담지 않은. 아니, 넌 이제 담게 될 거야.
“왜?”
자신이 이틀간 사라진 것도 몰라 보는 것 같지만 혜인은 신경 쓰지 않고 진을 잡아 끌었다. 이리로, 이리로 와봐. 떨어진 마력 때문인지, 혹은 약 기운 때문인지 진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말 하기도 귀찮은지 진은 혜인이 이끄는 데로 그대로 끌려간다. 어느 작은 문 하나를 연다. 비틀, 진은 발길이 닿는 데로 걸었다.
그리고 그 텅 비었던 그 눈에 담게 된다. 가득, 가득히. 그리고 가득히.
그 작은 방안에 색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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