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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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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최근연재일 :
2015.02.2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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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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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4.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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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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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회색시대-20.아름다운.(5)

DUMMY

“따로 보관하고 있던 그림들, 작은 것 몇 개 챙겨왔어. 아저씨한테도 들려서 최근에 그리신 것도 받아왔고.”


-그냥, 상처라는 거지.


그냥이란 말이 무색한 수많은 상처들. 마음 안에 옭아 메이고, 고름 터진 상처들. 그 상처에 색을 덧붙여 잠시 지워줄 수 있다면. 진아, 나는, 여전히 그 색이란 것, 그림이란 것 잘 몰라. 너보다 긴글 한 줄 더 읽을 줄은 알아도, 색을 느껴보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해. 그래도 내가 저거 하나 훔치고 그들 뒤에서 낄낄거리며 웃기만 했어도, 잠시 스친 눈에 담긴 장면들은 참 좋더라. 그냥, 마음에서 뭔가가 좋더라. 그러니까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진은 걸음을 내걷지 못했다. 그 가득한 색 앞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어서. 그 색 앞에서 부끄러워서. 그 색이 두려워서, 불쌍해서, 미안해서, 그래서. 차마 움직이지 못하는 진의 어깨를 혜인이 살며시 밀었다. 휘청, 떠밀려 한 걸음 딛게 된다.


한 걸음, 다가갔다. 넘실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한 걸음, 다가갔다. 노을이 지는 대지에 사람은 씨를 뿌리고 있다. 한 걸음 다가갔다. 사각 속의 갇혀있는 가장 자유로운 색. 한 걸음, 다가갔다. 어머니가 자신을 안고 있다. 진은 손을 뻗어 그림을 만졌다. 우툴한 그림의 느낌. 물감의 감각. 오래 전 붓 자국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거칠지만 어머니의 미소는 한 없이 부드러웠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엄마. 엄마.


“엄마. 아빠…….”


이래서, 사람은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훔쳤고 그림을 꿈꾸나 보다.


“엄마, 아빠…….”


그림 안에 아버지는 안 계셔도 색 속에 아버지가 있었고, 어머니는 땅으로 돌아갔어도 색 속에 있었다.


“엄마, 아빠…….”


색이 가슴 안에서 차오르며 눈물이 되어 흐른다. 투명한 눈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지지만, 상관없었다.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어머니,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고 어머니를 불렀다. 아버지를 부르고 어머니를 부르지만, 그것은 그들만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그림들을 그린 이들. 색으로 세상을 가득 차게 하여 이 순간 메말라가는 자신을 채워주는 이들을 부름이었다.


평생 가보지 못한 푸른 바다, 그 위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있었다. 그 안에 담겨있는 색 하나, 감정 하나하나 모두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저들이 파도에 맞서 싸우듯이 나는 여기서 싸우고 있다. 의미 없다 할 지라도, 애초에 시작은 색을 위에서였지 않았느냐. 사람을 위해서였지 않았느냐. 아버지를 위해서였지 않았느냐, 나를 위해서였지 않았느냐.


노을을 뒤로하고 씨를 뿌리는 사람들, 그 안에 담겨있는 색들. 아릿한 노을을 보며 북쪽 마을 아버지가 홀로 기다리던 집으로 돌아가던 기억. 평화롭지만 답답함 마음을 참을 수 없던 기억. 그래, 그래도 내 여기서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느냐, 힘들어도, 괴로워도, 그때는 아니었을라고. 그게 싫어서 내가 디뎠던 걸음, 모자라지만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느냐.


사각 속에 갇혀 있는 색. 단순한 색의 향연. 그럼에도 저기 가장 자유로운 색의 향연.


겨울의 초입, 하늘은 흐린 회색 빛이고 땅은 붉게 물들고 모든 현실이 자신들을 옥죄여 와도 눈 앞의 색은 한없이 자유롭고, 또 자유로웠다. 아버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아버지의 색은 여전히 사각 속에 갇혀 있지만, 보고 있는 나는 사각을 넘어서, 아니 그 사각에 기대서 색을 보고 있어요.


아름다운 색 앞에 자신은 한 없이 작고 초라했지만, 땅을 붉게 물든 피 색 앞에서보다도 작았지만, 작아도 상관없었다. 색은, 그림은, 언제나 있어왔으니까. 글이 생기기전부터 사람은 그렸고, 그려왔다. 글이 생긴 이후에도 사람은 그렸다. 글을 알아도 사람은 그렸다. 왜, 라고 묻지 않고 그려왔다. 그저 색이기에, 그저 색이건만. 칠하고 그려왔다. 존재하기에, 우리 모든 가능성을 꿈꾸게 하기에. 하여 까맣게 덧칠해져 이제 더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을 듯하던 곳에도 색이 편편히 물든다.


세계는 색으로 가득 차 있다.


비록 잠시간의 꿈일지라도.

.

.

.

.

.

.

.

.

.

“진 일리스비!”

“가라!”


잠시간 곱디 고운 색을 꿈을 꾸더라도, 현실의 색은 더러운 붉은 색. 진은 여전히 같은 감정을 가져야 했다. 물컹한 것이 터지는 감각, 손에서, 발에서. 여전했다. 지극하고 지독한 현실, 그 앞에서 더 어찌할 수 없는 자신. 자신을 잃어버리는 느낌. 마력의 소진이 갈수록 느껴져, 어느 날은 홀로 서 있지도 못했다. 지금 부르는 것이 제 이름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진 일리스비! 괴물이 약해졌다.”


마력 때문일까. 괴물이 한 번 휘청거리다 강한 대마법탄을 피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 윽, 진은 치어 오르는 고통을 참으며 다음 그림 한 장을 내 던졌다. 다시 달리는 괴물. 효율, 창 하나 칼 하나로 누군가를 죽이는 것보다, 거대한 괴물이 짓밟고 지나가 사람을 쓸어 내리는 것을 두고 사람들은 효율이라 불렀다. 비록 그 뒤에서 누군가의 혼이 거멓게 물들어갈지라도.


“마법 병단 철수!”


철수 명령에 진은 겨우 괴물을 거두어 들이고 가쁜 숨을 헉헉거렸다. 마법사 하나가 그런 진을 내려다 보았다.


“자네, 마력 조절이 힘든 건가 아니면 무슨 다른 문제가 있나?”

“예?”

“마법 운용이 안정적이지 못하더군. 괴물이 오늘 피해를 많이 입었어. 그 피해가 마법사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걸 생각한다면, 위험하지 않겠나?”

“아, 어, 시정하겠습니다.”


군대식 말투가 익숙하지 않은 진이 겨우 한 마디 찾아 꺼내자 중년의 마법사는 마땅찮다는 얼굴을 하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오라는 말을 해놓고 가버렸다. 진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면서도 그 마법사의 뒤를 따라갈 생각 따위는 당연히 하지 않았다. 이 마법, 마법사들에게는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으로 보였나 보다. 효율, 스스로 효율의 한 축이 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자신말고는 더 이 마법을 쓸 사람은 필요하지 않다.


진은 힘이 다 빠진 몸을 겨우 이끌고 제 숙소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회복제와 그 약이 놓여있었고, 진은 가만이 그를 지켜보다 회복제만 하나 입에 털어 넣었다. 여전히 아프고 힘들어도, 그 약은 손대기 싫었다. 먹으면 색을 느낄 수 없잖아. 진은 몰래 숨겨둔 그림을 꺼내 그 앞에 앉았다. 엄마와 자신. 농부와 바다. 그리고 색.


그 앞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났다. 처음, 먼 북쪽 마을 가늘 길 골목에서 아버지의 색을 봤을 때처럼. 왜 그때 그 일을 잊고 있었는지 참 모를 일이다. 기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인데. 그럼에도 잊은 것을 보면, 아마도 그래서, 사람들은 십 년 동안 그림이 없어져도 잊은 듯 살 수 있었던 것이겠지.


“엄마…….”


진은 엄마의 그림을 쓰다듬었다. 기억조차 아련한 엄마의 얼굴. 알 아마스 공께서는 엄마와 내가 닮았다고 했는데 엄마가 훨씬 더 예쁘고 곱네요. 아니면, 아버지의 눈으로 봐서 그런 건가요. 엄마 난 오늘도 나쁜 짓을 했어요. 그 사람들은 엄마 앞에서 울지도 못할 거에요. 어쩌면 그 사람들의 엄마가 울고 있겠죠. 하지만 나는 엄마 앞에서 울고 있네요. 그래도 되는 걸까요. 진은 시선을 푸른 바다의 파도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돌렸다.


나는 바다처럼 넓은 곳에서 살고 있지 않지만 푸른 바다를 꿈꾸고 있어요, 엄마. 아빠. 저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싸우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있을까요. 작은 화폭 속에 담겨 있는 바다의 모습은 화폭을 넘어 삼킬 것 같고, 내 현실은 나를 먹어 치우고 있어요. 진의 시선은 씨를 심는 농부의 그림으로 돌아갔다.


나는 씨를 뿌리는 대신 사람을 죽이고 있지만, 엄마. 아빠. 엄마, 아빠. 나는 무언가를 심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거에요. 한 때 내 손에서 아름다운 문양들이 탄생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심지 않아요.


아버지, 아버지의 색은, 손 없는 아버지가 만들어낸 색 속의 세상은, 색 뿐인데도 자유로울 수 있네요. 아니요, 색뿐이라서 자유로울 지도 몰라요.


누가 그랬더라, 눈물로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이 눈물은 그냥 자책일 뿐이에요. 하지만 온통 꺼먼 것들이 내 눈을 막아 눈물도 흘리지 못하게 할 때보다 이렇게 눈물을 흘릴 수 있으니 그것으로 좋아요. 좋아해도 될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좋아요.


저랬으면 좋겠다, 그림 속의 사람들처럼. 저런 색을 나 또한 가지고 싶다.


진은 홀로 웃으며 그림 앞에 누웠다. 차가운 돌바닥의 기운이 스며들어와도 상관없었다. 색을 눈에 담을 수 있다면. 아무것도 아니더라도, 해내지 못하더라도, 꿈을 꾸게 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지금은 만족이다. 꿈을 꾸자, 색이 가득한 꿈을 꾸자.


하지만, 누군가 회색 빛 돌바닥 위에서 꿈을 꾸더라도,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로 진행된다.


“피해! 피해!”


쿠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마탄이 쏟아져 내리고 방어선이 흔들렸다. 신군의 병사들이 모두 뒤로 물러서며 벽이 떨어져 나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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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4.10.15 08:59
    No. 1

    내전이 끝나고
    위험한 마법이라고 진이 죽음을 당할까 걱정이네요.
    히르아저씨가 방도를 생각하고 있겠지만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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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회색시대-20.아름다운.(2) +3 14.10.09 825 3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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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회색시대-18.뒤엉킨.(5) +2 14.08.31 915 31 11쪽
150 회색시대-18.뒤엉킨.(4) +2 14.08.24 1,113 3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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