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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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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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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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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1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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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20.아름다운.(7)

DUMMY

카르 이리스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영에 빠르게 퍼졌다. 최초의 고발자. 모든 일의 원흉. 모두 그를 그렇게 기억한다. 그런 만큼 카르는 다른 포로들과 달리 따로 격리되었다. 나중에 어찌 써먹을지 모두가 머리를 굴리는 게다.


카르는 치료되지 않은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한숨도 쉬지 않았다. 전쟁이란 그런 거니까. 옆에서 군복을 입은 심문관들의 머리가 박살 나고 팔이 잘려나고 있었는데도 여태 살아있는 것이 외려 놀라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어떻게 될까. 자신의 위치 따위는 잘 알고 있다. 최초의 고발자, 그리고 심문관. 아마 머리 좋은 윗대가리들이 자신을 써먹을 만한 곳을 찾아내겠지. 따로 근사하게 사형식을 하고 효수라도 하고, 그 밑에서 북을 쳐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하는 것보다 더 좋게 쓰일 곳이 있을까. 카르는 픽 웃으며 무릎에 머리를 박았다. 그렇게 써먹어도 상관없긴 하지만, 동생들은 그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카르 이리스, 나와!”


밤 시간, 갑자기 저를 부르며 걷어차는 발길질에 카르가 주춤 주춤 일어섰다. 수용소 감독하던 이가 문을 열어주자 그 뒤에는 꽤 고위층 군복인 듯한 옷을 입은 사내가 있었다. 무심하게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카르는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반들반들한 군화 끝이 보인다. 빌어야 할까, 살려달라 빌어야 할까. 심문소에 내가 끌고 왔던 사람들이 빌었듯이 빌어야 할까. 저 구둣발을 핥으며.


“따라와.”


손이 묶인 채로 묵묵히 사내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점점 가는 곳은 어둑한 곳이었다. 카르는 주변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사람이 없는, 그런 곳으로 가고 있다. 설마 효수를 따로 하는게 아니라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간단히 처리 할 생각인가. 어딘가로 도착하자 사내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그 시선이 따가워 카르는 고개를 숙였다.


“손 내놓아봐.”

“예?”


카르는 놀라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고, 사내는 간단하게 묶인 제 손을 풀고 있다. 카르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내가 제 손을 다 풀고 다시 자신을 바라본다. 설마, 우리 쪽에서 잠입한 첩자인가.


사내는 후, 하고 한숨을 쉬더니 제 몸에 달린 견장 하나를 떼낸다. 순간 그의 모습이 바뀌었다.


“진?”


진이 자신을 바라본다. 카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두 손 두 발이 자유로워도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진 역시. 둘은 아무 말 없이 계속 서로를 보기만 했다.


“왜…….”

“왜 그랬어?”


둘이 동시에 서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진이 눈살을 찌푸리고, 카르는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볼 자신이 없었다.


“무엇을, 왜 냐니…….”

“알잖아. 왜 그걸 이야기했고, 왜 그렇게 살았어?”


무엇도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너도 알고 나도 알지. 카르는 웃음이 났다. 무언지 모를 웃음이 났다. 빙빙 돌아와 이제야 너에게 이야기하게 되는 구나. 카르는 진의 얼굴을 보고 미소 지었다. 진은 그 미소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제에게 말했던 건, 실수였어. 너무 설레고 너무 신기한데, 난 거기로 돌아가야 했고, 그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진은 그의 대답에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우리가, 아버지와 나랑, 혜인이랑 아저씨가 그 꼴이 났는데, 왜 심문관으로 살았어?”


모두가 그렇게 물었지. 친구, 친구의 아버지를 팔아먹고 왜 죽을 생각도 안하고 그렇게 살았느냐고. 신의 믿음이 충실한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살았느냐고. 답은 뻔하잖아, 진아. 내가 나쁜 놈이니까.


“편하고 싶었으니까.”


고아원 동생들 이야기는 어쩌면 핑계, 피도 안 섞인 이들을 위해 그 무엇을 할 필요도 없었지. 고개를 돌리고 가면 되는 거였는데 말이야.


“편하게 살고 싶었으니까. 나한테 총이 있고, 칼이 있으니까 모두 고개를 숙이더라. 어디 가서 뒷소리는 들어도 고아새끼라고 욕 먹을 필요도 없었고, 편하게 돈을 벌고 편하게 살 수 있었으니까.칼을 손에 쥔다는 게 그런 거였으니까. 그렇게 돈 모으고 그래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그렇게 살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살아서 너와 아저씨, 류찬 아주머니가 있는 그런 집, 그런 빛과 색으로 가득하게 가족과 그렇게 살고 싶었어. 내 손에 묻힌 피 같은 거 뒤돌아 잊어버리고, 그렇게.


“그렇게 남을 짓밟으면서 사니까 편하고 좋았어?”

“응. 그랬어.”


몸은 편했지. 마음은 불편했지. 하지만 마음이 불편하다고 내가 한 일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따위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몸이 불편한 것이 싫어 다 덮고 그렇게 살아왔으니 아니, 라고 답할 수 없겠지.


“누군들 편하게 안 살고 싶어? 다, 너처럼 사는 거 아니야.”

“응, 맞아. 네가 옳아.”


그래, 다들 금을 가지고 칼을 가지고 사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내가 편할 수 있었지. 그 총칼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은 나 같은 놈은 아닐 테니까. 어떤 여자가 그랬지. 고문 앞에서 비명을 참으려 애쓰던 여자가 그랬지. 두려워하라고, 두려운 만큼 용기를 내라고. 하지만 말이야, 나는 두려워서 고개를 돌렸을 뿐이니까. 진은 가만히 서서 제 말에 대답하는 카르를 보다가 이를 콱 물었다.


“미안, 하다는 소리도 이제 안 하니?”


진의 말에 카르는 쓰게 웃었다.


“이 모든 일, 내가 한 일이 미안하다는 말로 위로가 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걸 무엇 하러? 용서받지도 못할 건데 말이야.”


자신의 말을 곱씹던 카르는 아, 틀렸구나, 하며 덧붙였다.


“용서 받아서는 안 되는 거니까.”


진은 입술을 짓뭉개고 뒤돌아 섰다. 진, 하고 카르가 부르는 소리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꺼져, 개새끼야.”

“진아!”


카르가 당황하여 부르는 소리에 진은 잠시 멈칫했다.


“왜? 왜 나를 보내줘?”


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나를 용서하는 거니?”


진은 신경질 적으로 외쳤다.


“아니. 그냥 꺼지라고 이 개새끼야.”


진은 카르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버렸다. 카르는 멍하니 서서 진의 뒷모습을 보았다. 큭. 하고 웃음이 났다. 무언지 모를 웃음이 났다. 카르는 한참 그 자리에서 킥킥거리며 숨죽여 웃었다. 진아, 그래, 항상 그랬지. 넌 항상 착한 아이였어. 나는 나쁜 새끼지. 그러니 내 살점 다 뜯어가길 바라면 안 되었던 거야. 너라면 말이야, 너라면 말이야, 진아. 내 살점을 다 뜯어가고 나면 혼자 힘들고 지쳐서 울었을 거야. 그러니 그런 걸 기대해서는 안 되었던 거지. 그러니 말이야, 이제 내 살점을 어쩌면 좋을까.


카르는 한참 동안 웃다가 신군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달려갔다. 달려가 그곳에서 무엇을 할지도 모르면서 달려갔다. 아군을 찾아가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말했다. 다른 이들은 어디 있느냐 묻는 말에 고개를 저었고 그들은 카르를 의심했다. 계속 의심해왔듯이. 하지만 카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제 생각에 빠져있느라.


다시 무기를 지급받고, 군복을 지급받아 다시 전장에 나서야 할 때도 카르는 주어진 일을 묵묵하게 했다. 제 인생이란 늘 그랬으니까. 사냥 개의 인생,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 밖에 모르고, 주변 밖에 몰랐다. 여전히 그러하다.


쿵쾅쿵쾅 총포가 쏘여지는 전장 한 가운데서 생각은 계속 이어져갔다. 하나, 둘 생각이 타고 올라왔다. 이 복잡 다난한 전쟁의 뒷사정 다 버리고 생각해보자면, 이 전쟁은 우리가 질 전쟁이고, 동생들은 자신이 없어도 그냥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살아있으면 오히려 그들에게 폐가 될 전쟁이다. 제가 살아 남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진이도 봤다. 진에게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진은 제 살점을 뜯어 가지 않으리라. 못하리라. 해서는 안 되리라. 그렇다면,


“카르 경위! 뭐 하나!”


사람이 지상에 만들어내는 지옥도 안에서, 카르는 홀로 빙그레 웃었다. 피가 터지고 뇌수가 터지는 전장 한 가운데, 누가 누구를 죽이는 줄 모르는 전장 한가운데 그곳에서. 카르는 손에서 칼을 놓아 바닥에 떨어트렸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잿빛 겨울 하늘임에도, 구름을 뚫고 햇살이 스며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빛만이 있는 세계,


그러하니, 기도하거라.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신께 기도를 올리자.


세상을 창조하신 신이시여,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세상을 만드실 때 가지신 자비심 변하지 않으시니

모든 영광을 가지신 분 복종하는 모든 자에게 그 자비를 내려주소서


그리하여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나올 수 있을지어다.


-그래, 우리 카르, 장하구나.


멀리 노을이 지고 세상은 참으로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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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회색시대-21.메마른.(2) +1 14.10.25 1,613 104 9쪽
167 회색시대-21.메마른.(1) +1 14.10.23 878 28 8쪽
166 회색시대-20.아름다운.(8) +3 14.10.21 923 27 10쪽
» 회색시대-20.아름다운.(7) +2 14.10.19 1,311 48 9쪽
164 회색시대-20.아름다운.(6) +2 14.10.17 790 2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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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회색시대-20.아름다운.(3) +1 14.10.11 819 29 9쪽
160 회색시대-20.아름다운.(2) +3 14.10.09 825 35 9쪽
159 회색시대-20.아름다운.(1) +1 14.10.08 1,079 35 9쪽
158 회색시대-19.젖은.(4) +3 14.10.06 1,050 25 9쪽
157 회색시대-19.젖은.(3) +4 14.10.04 881 27 11쪽
156 회색시대-19.젖은.(2) +1 14.09.27 760 34 10쪽
155 회색시대-19.젖은.(1) +2 14.09.21 701 2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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