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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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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최근연재일 :
2015.02.2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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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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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회색시대-20.아름다운.(3)

DUMMY

약에 취해 전장에 서는 것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맨 정신보다는 견딜만했다. 더불어 괴물 역시도 약 덕인지, 약 탓인지 움직임이 꽤나 자유스러웠다. 조금도 주춤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밟고 터트리고 지나갔다. 진은 그 모든 감각에 웃었다. 사람 몸이 풍선 터지듯 터져 나가는 장면을 흐뭇하게 보며 웃었다.


나는 강하다, 나는 모든 것을 밟고 지나갈 수 있다, 나는 힘이 있다.


더하여 저것은 사람이 아니다. 저기 봐, 그냥 누런 색 빨간 색이 엉켜있을 뿐이잖아. 사람이 아니라 덩어리일 뿐이잖아. 그저 색이야. 아버지가 주신 어둠의 색, 그런 색일 뿐이야. 선은 없고 움직임은 색이 번지듯, 퍼져나가고 있는 걸. 잘 봐. 내가 저 누런 색을 손으로 발로 짓누르면 말이야, 빨갛게 변해. 얼마나 신비로워. 진은 웃었다.


“으…….”


단지 그 색이 다시 형태를 이루며 존재를 인식 할 때, 웃음을 그쳐야 했다.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시선 안에서 색으로 존재했을 뿐 그것들은 색이 아니니까.


나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나는, 나는, 나는.


“진아!”

“아, 어.”

“다친 곳은?”


혜인이 다가와 진을 반겼다. 어디 다친 곳 없는지 손 붙들고 위 아래로 바라보는 것이 부담스럽고 짜증이 났다. 그래서 손으로 슬며시 밀어냈고, 혜인은 아, 하고 주춤 물러섰다. 혜인도 이것이 이제 익숙해진 듯했다. 진은 머릿속에서 누군가 칼춤을 추는 듯했다. 다 버리고 다 죽이고 다, 다, 세상을 뒤집어 버리고 싶어. 진은 대충 구석에 자리 잡고 털썩 주저 앉아 무릎에 머리를 박았다.


“자, 물이랑 회복제.”


혜인은 진의 눈치를 슬며시 보고 회복제와 물을 내려놓고 조금 떨어져 곁에 앉았다. 진은 귀찮았지만 억지로 그를 주어 먹었다. 취하게 하는 약이든 아니든 상관 없었다. 무엇이 될지라도 이런 것이라도 없으면 버티기 힘들었다. 마법은, 전쟁은.


-상처에 새 살이 돋는다고 전장에 사람을 함부로 돌릴 참이냐.


히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법사도 나고, 화가도 나라면, 상처받을 사람은 없지 않느냐고 했던 당당한 말이 다 같잖기 그지 없다. 아니, 그래도 아버지는 무사하니까 그것만 생각하자.


혜인은 홀로 그리 있는 진의 곁을 지켰다. 이제 익숙하지만 저리 구겨져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면 가슴이 덜컥 덜컥 내려 앉는다. 아빠는 진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마법은 본격적인 전장에서 쓰이기에는 미미했고 주로 하는 일은 연락책과 첩보 수집이었다. 첩보, 라고 해 봤자 일스와 정신연결을 해서 얻는 정보를 긁어다 주는 것뿐이었다. 하여 전장에 나가는 진의 곁에 있을 수 있을 때라곤 이럴 때뿐이었다.


“오늘 저쪽에 연락을 보내다가 인휘 아저씨를 보았어.”


아버지를 언급하는 말에 진은 푸스스 고개를 든다. 무엇도 없어 보이듯 텅 비었던 눈이 잠깐 반짝인다. 혜인은 빙그레 웃었다.


“아저씨도 건강하시고, 그림도 그릴 수 있나 봐. 물론 참전 독려 그림은 아니래.”

“그래, 고마워.”


하고 다시 고개를 숙인다. 조금 나아 보이자 혜인은 가까이가 손을 살며시 쥐어본다. 잠시 움찔하지만 차가운 손은 그를 내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온기를 옮겨주었다. 이것만이 제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진이 수많은 가정을 했듯이 혜인 역시 수많은 가정을 했다. 흔들리지 않았다. 갈등하지 않았다. 하지만 흔들리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내가 당했던 모든 일 나 홀로 품었더라면, 그 심문관과 군부의 손에서 탈출 하고 그냥 도망갔더라면, 외할아버지 댁에 남아있었더라면, 돌아와도 너를 찾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 내 손으로 뒤엎고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더라면. 이 역시 필요 없는 가정, 지금 네가 여기서 다치고 있는데.


“……아니었으면 좋겠어.”


진이 무어라 중얼거렸고, 혜인은 잠시 진을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매일같이 중얼거리는 말. 죽는 쪽이 사람이 아니길 바라는 만큼, 죽이는 쪽도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 아마도, 그럴 거다. 하지만 혜인은 더 덧붙이지 않고 그저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이고 매일이니까. 익숙하니까.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으나, 익숙해져야 하므로. 하지만, 정말 익숙해져야 할까.


혜인은 어릴 적 저를 떠올려보았다. 그때 나이가 얼마였더라. 그 기억조차 흐릿하지만, 그때 느꼈던 분노만 명확하게 기억하고 여태까지 걸어왔다. 우리 다시 걸을 수 있도록 하자, 넘어져도 서로 어깨를 붙들고 다시 걸을 수 있도록 하자. 그리 말하고서는 여기 걸을 수 있는 사람 누가 있을까. 걷겠지, 절음발이처럼 반절 걸음 걷고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걷는 것일까.

.

.

.

모든 그 색이 검은 색에 덧칠 되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이기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물 밀듯 들어온다. 약에 취해 겨우 잠이 든 진, 그리고 잠 속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림이 덜컹거린다. 그 덜컹거리는 소리에 흠칫하여 깬다. 괴물이 자신의 목을 죄어온다. 진은 가만이 있었다. 숨이 막혀 본능적으로 손발이 바르작거려도 그대로 있는다.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진아! 진아!”


혜인이 허우적거리는 진을 깨운다. 진은 휘적거리다 흐릿한 눈을 뜬다. 주변은 온통 검은 색, 그리고 회색 눈.


“혜인아……”


혜인이 겨우 진을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진의 흐릿한 눈에 혜인과 주변의 약한 불빛에 어, 하고 픽 웃는다. 아무리 내가 고통스럽더라도 이 앞에서 더 어찌할 수 있으려나. 자신의 미래를 던진 아이 앞에서.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그것만이 명확히 떠올라 가만이 있으려 애쓴다. 까맣게 변하고 메말라가는 머릿속에 자신을 잠근다. 억지로 잠근 후에 억지로 다시 잠을 청한다. 내일을 위해서. 까맣고 까만 내일을 위해서.


진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혜인은 쓴 입을 닦고 제 숙소로 돌아왔다. 여자 마법사 숙소 한 구석에 앉아 가만이 생각에 잠겼다. 약도 손을 대고, 다행히 공급이 원할 하지 않아 심하게 중독된 것 같지 않지만, 이대로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그 마법, 아빠가 왜 펄펄 뛰면서 반대하는지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줄 수 있는 일. 혜인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자기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간단한 제 물건들 사이에 검은 옷 한 벌이 있었다. 같잖게 예술의 노예라는 칭호를 달고 그림을 훔치고 다닐 때 입었던 옷 이었다. 오르트 녀석이 그랬지. 예술이 무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를 위해 일하면 그게 노예가 아니면 무어냐고. 이 일을 하면서, 사람들이 쓴 전단지를 옮기는 일을 하면서 읽고 배우려고 애썼다. 그게 무엇이기에, 진의 친구도, 인휘 아저씨의 친구도 아닌 이들이 날뛰는 지 궁금해서. 진아, 난 여전히 그게 뭔지 몰라.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신을 상실했다.


오르트 자식, 혜인은 이를 깨물었다. 적어도 네놈이 나보다 잘 알겠지.


“혜인씨? 어디가요?”

“잠깐 나갔다 올게요. 나 자리 비워요. 하지만 금방 돌아올게요.”


혜인은 어디로 가냐 묻는 마법사의 말을 뒤로하고 그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전장 중에 전열 이탈이라. 흥, 혜인은 콧방귀를 꼈다.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자꾸 가슴에 박힌 말 한 마디. 사람이 사람으로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너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검은 밤을 타고 몰래 나온 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어째서 낮보다 더 끔찍하고 두렵게 느껴질까. 우리가 행한 것들이 밤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 혜인은 그 모든 광경이 보이지 않음에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고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가정은 소용없다. 진짜 죽는 것은 사람이었으니까.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가정은 소용 없다. 죽이는 것 또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러하나, 살아남는 것 또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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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회색시대-21.메마른.(2) +1 14.10.25 1,613 10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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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회색시대-20.아름다운.(8) +3 14.10.21 923 27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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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회색시대-20.아름다운.(6) +2 14.10.17 789 23 7쪽
163 회색시대-20.아름다운.(5) +1 14.10.15 1,032 25 10쪽
162 회색시대-20.아름다운.(4) +2 14.10.13 809 23 9쪽
» 회색시대-20.아름다운.(3) +1 14.10.11 819 29 9쪽
160 회색시대-20.아름다운.(2) +3 14.10.09 825 35 9쪽
159 회색시대-20.아름다운.(1) +1 14.10.08 1,079 35 9쪽
158 회색시대-19.젖은.(4) +3 14.10.06 1,050 25 9쪽
157 회색시대-19.젖은.(3) +4 14.10.04 881 27 11쪽
156 회색시대-19.젖은.(2) +1 14.09.27 760 34 10쪽
155 회색시대-19.젖은.(1) +2 14.09.21 701 25 10쪽
154 회색시대-18.뒤엉킨.(8) +1 14.09.15 1,565 3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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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회색시대-18.뒤엉킨.(6) +2 14.09.03 922 21 10쪽
151 회색시대-18.뒤엉킨.(5) +2 14.08.31 915 31 11쪽
150 회색시대-18.뒤엉킨.(4) +2 14.08.24 1,113 3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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