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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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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12.11.15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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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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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1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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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회색시대-18.뒤엉킨.(2)

DUMMY

“그렇다면 왕세자 저하를 구출해야 하는 것이 답이 아니오!”

“그게 쉽게 되는 일이겠소? 또한 구출했다 칩시다, 그 다음은 어찌할거요? 역적이라는 누명을 쓴 후에는 말이오?”

“허어,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러고 있는 것을 왕이 알면 이는 역적이 아니라 할 줄 알았소?”

“말 조심하시오!”


이른바 회의는 제자리 걸음이었다. 했던 이야기 말만 바꾸어서 반복되고, 진은 침묵만을 지켰다. 진은 ‘마법사’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길 요청 받아 처음으로 함께 자리하게 되었지만 설레거나 하지 않았다.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시위에서 사람들이 목소리 높이고 걸음 옮기고 하는 것과 다른 이야기, 꼭 몰에게 어느 학원생이냐고 묻는 그 대학생 같은 그런 이야기. 제가 생각한 비유가 우스꽝스러워 진은 픽, 하고 웃음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그렇게 말고는 제 머리로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진은 힐끗 히르 아저씨와 혜인의 눈치를 보았다. 혜인은 눈을 빛내며 사람들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고, 히르 아저씨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로 듣고 있었다.


“어차피 여기서 다 의논해봤자 지들 좋을 데로 하고서는!”


한 사람이 기어이 분을 참지 못하고 문을 박차고 나가고, 그에 몇몇이 따라가더니 회의는 파장 분위기를 맞았다. 조금 쉬었다 합시다, 하고 누군가 말하자 웅성거리며 흩어진다. 히르는 그 말에 슬쩍 일어서더니 말 없이 밖으로 나가고 혜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별일이네.”

“뭐가?”

“아빠. 회의 때마다 박차고 나가는 사람이 아빠거든? 아니면 한 두 마디 쎈 말 던져서 분위기 흉흉하게 하는 사람이 오늘 따라 말씀이 없으시니.”

“그만큼 일이 심각한 거니까.”

“언제는 안 심각했나.”


하기야, 언제는 안 심각했나. 언제는 사람이 갇히지 않았고, 언제는 사람이 아프지 않았나. 복도로 나온 히르는 창 밖을 보며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아저씨의 얼굴은 화가 난다거나 답답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어떤 빈 것,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아빠? 왜 그래?”


혜인의 질문에도 히르는 말 없이 담배만을 피웠다. 다만, 딸의 얼굴을 한 번, 진의 얼굴을 한 번 보았을 따름이었다. 담배가 다 타들어 갈 때까지 그 침묵을 계속 지켰다.


“걱정하던 일이 일어나서 그래.”

“뭘 걱정했는데?”

“너희들도 봤잖니? 회의에 그림 이야기도, 화가 이야기도, 예술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지.”


서너 시간이 지속된 토론 속에서 스쳐갔던 단어들은, 왕세자, 권력, 역적, 누명, 구출, 탈출, 구명, 회의, 왕, 돈, 상단, 사업권, 이런 이야기가 가득하고 누구도 칠하지 못하는 색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야? 당장 왕세자가 잡혔대잖아.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여기 있는 사람 태반이 왕세자 계 사람들이고, 왕세자도 지금 왕이 하는 짓거리 보고 뭐라 해서 잡힌 거라며?”


히르는 딸의 대답에 한 소리 지를 기운도 없는지 쓰게 웃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이제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할거야, 아니, 모든 이라고는 차마 말하고 싶지 않구나. 많은 이들이, 이렇게. 히르는 사람들의 귀를 피할 생각인지 조금은 어둑한 복도로 둘을 이끌어갔다. 이 저택은 라인 공자의 별장이니, 하인 하나, 하녀 하나의 귀도 조심해야 했다.


“진아, 그 마법으로 생명이 새로이 탄생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알지?”

“예, 그렇지요.”

“그런데 교황청과 왕은 손을 잡고 예술 전체를 탄압했다. 사실 예술을 핑계였지. 당시에 발호하던 반왕파 귀족들과 반신전 귀족들, 마탑을 억누르려 하던 일이었지. 지금 왕은 당시 왕세자였던 형과 동생을 살해하고 왕 위에 올랐기에 불만 세력을 누르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교황청도 약화되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지금의 왕을 지원해줬고.”

“그런데, 그게 그림과 무슨 상관입니까?”

“안료 사업권과 군부가 걸려있었어. 군부는, 이 마법을 양산화해서 사용하고 싶었던 것을 실패했고. 내가 거절했으니까. 이 마법이 다른 계파가 이용하지 않길 바랐으니, 일종의 독점권을 바랬던 거지.”


히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무언가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혜인과 진은 히르를 바라보며 눈을 말똥말똥 뜨고 이야기가 이어지길 기다렸다.


“사실은 이 모든 것조차 끼워 맞추기 식 해석이란 생각이 든다. 늘 말했듯이 그림은 사상을 이끈다. 그림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같은 것까지. 그 사상이, 정당하지 못한 왕과 교황을 향해간다면? 글 읽을 줄 모르는 사람 앞에 왕을 비판한 그림 한 장 내미는 것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보통은, 그런 그런 그림만 탄압한다지만, 이번에는 모조리 처단하는 극약처방을 한 것이겠지. 예술가는 가장 강한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가장 약한 사람들이기도 하니까.”


히르의 말이 알 듯 말 듯하다.


“근데 그게 지금 왕세자 사건이랑 무슨 상관인데?”

“지금 왕세자가 반란이나 찬탈로 왕이 된다면 똑같은 부담을 지게 된다는 거지. 적어도,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일을 자행할 것이고.”

“너무 절망적으로 판단하는 거 아냐?”

“지금, 그림 이야기가 하나도 나와있지 않느냐? 저들은 이 일을 핑계 삼아 취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는 반증이지. 내가 늘 회의 때마다 버럭 거리면서 경계한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백성들이 이끌어와 희망을 보아왔다만…….”


히르는 말끝을 흐리며 품 안에 숨긴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알 아마스 공이 내 준 신분증명서와 외국은행증명서. 이제는 엇갈린 길들이 다시 붙을 접점이 없는 것인지, 정말 떠나야 하는 것인지. 그래야 할 텐데. 혹은 그렇지 않아야 할 텐데. 알 아마스 공의 이야기하는 품세로는 이미 이 일은 예정되어있었듯 하다. 그렇다면, 내전도 아마 곧.


“그런데, 시위를 하는 것만으로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잖아. 어차피 왕이든 교황새끼든 법령을 풀어줘야 하는 거잖아. 그러면 기왕지사 우리편이라고 확실한 사람이 빨리 구출 되어서 왕이 되는 편이 편한 거 아닌가?


눈을 빛내는 딸 아이 앞에서 히르는 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역사 이래로 권력이 예술과 자유의 편이었던 적은 없었다, 혜인아. 예술이 권력의 편인 적은 있었어도.”

“그럼, 그 왕세자란 사람이 왕 앞에서 했다는 말은 다 거짓인가요?”


전단지에 있던 아버지의 이름 때문에 끌려 다닐 때는 그랬다. 저들은 대체 왜 쓸 모 없는 짓을 하느냐고. 아버지의 잊혀진 그림을 보았을 때는 그랬다, 그래, 이래서 그랬구나. 색을 찾아야 하는 구나. 겉에서 시위를 볼 때는 그랬다. 다들 눈물 흘리고 피를 흘리는구나. 함께 시위를 할 때는 그랬다.다들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리는 것이 그림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생각하는 것이 다 다르고, 말 하는 것이 다 달라, 같은 길을 가는 듯하지만 아니라는 것을 이제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함께 하는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그 왕세자라는 사람은 미친 왕이 제 멋대로 자기 아들을 폐하거나 죽일 수도 있는데, 무슨 의미로.


“아마 그렇게 말은 했을 거다. 다만 그게 정말로 예술을 위한 일인지 자신의 권력을 위한 일인지, 어느 쪽이 더 정답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하니?”


잃은 것이 너무 많은 사람들과 무엇을 잃을 지 알 수 없는 사람들. 그 왕세자란 사람은 무엇을 얻을 것이고 무엇을 잃을 것인가. 얻고 싶어하고자 하는 것이 왕관이라면, 잃게 되는 것은. 죄다 먼 나라 이야기이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람 하나 지키고 함께 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진은 흩뜨려지려는 마음을 다잡고자 잠시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너희 둘 다 흐름에 휩쓸리지 마라. 이럴 때 일수록 저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과 우리가 다른 길을 갈고 선을 먼저 그은 것은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입에 담게 된 ‘저들’이란 말이 쓰고 차다. 정말로 현실로 다가올 테니.


“저들은, 힘을 탐하지만 동시에 경계한다. 특히나, 진이 너, 그 마법, 함부로 사용하지 마라.”


또다시 제 마법을 두고 하는 잔소리에 진이 무어라 한 마디하려 입을 열지만, 그 말 끝 히르가 채갔다.


“내가 말했지? 군부가 그걸 이용하려 했다고. 그런 만큼 그 힘은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경계의 대상이 될 거다. 그러니 쓰려면 가능한 남 앞에서는 쓰지 마. 알려져서 좋을 것 없어. 암암리에 네가 그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을 다들 아는 모양이지만, 아직은 기껏 조각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로 알고 있으니까.”


그 말에 진의 어깨가 움찔했다. 경박한 허세를 부리려고 몰 앞에서 그 마법을 사용한지 며칠 되지 않았다. 몰도, 근처에 있던 학생들도, 심문관도 다 보았을 것이다. 아는 것과 보는 것, 큰 차이가 있으니.


“회의가 다시 시작된다 합니다”


복도에서 하인이 사람들 찾아다니며 외치는 소리에 히르는 아이들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큰 덩치의 남자가 긴 그림자를 만들며 간다. 세상 일이 차라리 성벽 같기만 하면 좋겠다. 그러하다면 망치로 성벽을 깨듯이, 오래 걸릴지라도 내 힘으로 모든 것을 부술 수 있을 텐데. 할 수 있을 거라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들은 하지 마라는 소리는 화를 일으키기 보다는 착잡함을 불러 일으킨다.


-난 내 주변만 편하면 다야.


그러고 싶지 않다. 앞서 나가 함께 달리고 싶다. 그것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마음에 걸린 듯한 커다란 덩어리는 도통 내려가지 않는다.


“진아, 우리도 가야지.”

“아, 응.”


저 작은 어깨가 현재와 미래를 바쳐서 만들어가는 길인데, 그런 길인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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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회색시대-20.아름다운.(1) +1 14.10.08 1,079 3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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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회색시대-18.뒤엉킨.(5) +2 14.08.31 915 31 11쪽
150 회색시대-18.뒤엉킨.(4) +2 14.08.24 1,114 3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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