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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힘법사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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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올힘법사
작품등록일 :
2023.10.23 13:25
최근연재일 :
2024.03.04 08:10
연재수 :
136 회
조회수 :
4,908
추천수 :
277
글자수 :
784,850

작성
24.01.02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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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고속도로에서는 함부로 핸들을 꺾지 맙시다

DUMMY

주변이 온통 뜨거운 용암이 흐르는 곳에서 달리라고?


"......말년에 마스터께서 노망이라도 나셨나?"


어지간하면 이런 말을 하지 않는 나였지만, 오늘만큼은 좀 해야겠다.

바다에서 달리라는 것도 어이가 없었는데, 아니지, 차라리 모래사장에서 달리는 게 몇 배는 더 쉽겠네.


{피데스는 노망이 난 적이 없다구구.}

"......"


괴물들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인 부분일까. 그놈들마저 있었으면 이건 뭐, 답이 없어지는데.


".......왜 굳이 이런 맵을 만드신 걸까?"

{뛰기 전에 구경 좀 해봐라구구.}


구경이라. 내가 관광이라도 온 줄 아는거냐.

그래. 하늘을 올려다보니 당장이라도 방사능 비가 내릴 것처럼 새까맣다. 먹구름인가? 아니다. 저건 먹구름이 아니다. 그냥 하늘을 까맣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니 화산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산들의 높이가 어찌나 높은지, 하늘을 찌르지는 않을까 염려될 정도다.

화산의 분출구에서는 뜨거운 용암이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분출된 용암들은 화산을 타고 내려와 바닥을 적시거나, 혹은 강물을 이루며 이리 저리 흘러가고 있었다.


{저기 보이냐구구?}


내 어깨 위에 앉아있던 피죤이 날개 끝으로 제일 큰 화산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까지 달려가면 딱 10km다구구.}

"이야."


우리 마스터께서 쓸데없이 자세히 맵을 만드셨네. 그냥 달리는 게 아니었구나? 내가 저 산을 타야 하는 거구나?


"......산이 너무 높지 않냐."

{히말라야보단 낮다구구.}

"그렇겠지."


그것 참 위로가 되는 말이네. 나는 천천히 굳은 고개를 돌려 내가 가야 할 산을 올려다보았다.

산은 단지 높기만 한 게 아니었다.


기암절벽(奇巖絶壁).

저걸 어떻게 뛰어올라가야 하는 것일까.

애초에 뛸 수가 없지 않던가.


아, 기어오르라고?


"저걸 어떻게 뛰냐? 너 잘못 본 거 아니냐?"

{저 산이 맞다구구. 저 산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끝이다구구!}

"......미친."


절로 욕이 튀어나온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어깨 위에서 계속해서 깐족거리는 요 요망하기 짝이없는 비둘기놈을 구워 먹어버리고 싶다는 험한 생각이 들 정도니까.


"......그래."


하지만 방법이 있던가.

강해지겠다고 다짐했으니, 이 정도는 각오해야겠지.


......물론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해보자."


일단 해보자.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잖아?


*

*

*


인생이란 결코 쉽게 흘러가는 법이 없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힘내라구구!}


나는 지금 달리고 있는 중이다.


[남은 시간 : 18분 43초]


아니, 정정해야겠다.

나는 달리고 있지 않다.

솔직히 기암절벽처럼 생긴 불타는 산에서 어떻게 달릴 수 있단 말인가.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벽을 타고 있다.

용암처럼 뜨거운 돌을 맨손으로 잡으며, 쉬지않고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제들은 벽을 타고 달리기도 한다던데 왜 못하냐구구?}


그야 난 아직 하급사제니까.

벽을 타는 마법은 중급사제도 제대로 해내기 어려워 하는 신성마법이다.

자신이 품고 있는 신성력을 발끝에 모아야 하는데, 그게 생각 외로 상당히 어렵단 말이다.


[남은 시간 : 13분 14초]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그럴 때마다 내 손에는 굳은살이 박혀갔고, 심한 경우 작은 화상까지 입었다.


{이제 5km 달렸다구구!}

"이게 달린거냐고!!!"


남은 km 수는 이제 대략 5km 정도. 문제는 남은 시간이 겨우 12분 뿐이라는 건데.

만약 평지에서 달리는 것이었다면, 12분 안에 5km를 달릴 수도 있었겠지만.


[남은 시간 : 5분 56초]


여긴 절벽이다.

그것도 깎아지른듯한, 뜨거운 용암이 흐르는 절벽.


콰악! 콱!


남은 시간은 겨우 5분 뿐인데, 남은 거리는 이제 3키로미터.


콱! 콱!


{힘을 내라구구!}


끝까지 포기하진 않겠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 임무는 실패다.


[시간 종료]


"끄아아아아아아악!"


타이머의 숫자가 0을 가리키자마자 나는 밑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높은 산에서 떨어지면 즉사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이곳은 현실이 아닌 '맵'에 불과하기에 죽진 않았다. 게임에서 캐릭터가 미션에 실패해 목숨을 잃어도 다시 되살아나는 것과 같은 원리.


{패널티를 받아야 한다구구.}


나도 알고 있다.

그저 잠깐, 잠깐만 숨 좀 고르자.

여긴 화산으로 가득해서 숨이 모자라다고. 숨을 내쉬고 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폐를 찌른다. 사실 달리기에 적합한 환경은 결코 아니니까.


"하아... 하아......"


생각을 해라, 유스티오.

저번 임무도 실패했는데, 이번에도 실패할 수는 없다.

아니, 실패하는 것은 좋다.

다만 내가 두려운 것은.


'포기하고 싶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내려놓고 싶다는 것 뿐이다.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평형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싶다.


'......안 돼.'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마신은 완전히 봉인되지 않았고, 놈의 일부인 마력덩어리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다.

이를 그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한국은 망한다.


"......그래."

{다 쉰 거냐구구?}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이 어찌나 뜨거웠는지, 옷이 약간 그을렸을 정도다.


"패널티가 뭐지?"

{버피 1000개와 10km의 달리기다구구.}


......도대체가 적당히가 없네.


"버피 1000개?"

{1km를 달릴 때마다 버피 100개씩 하면 된다구구. 그렇게 하면 버피 1000개는 금방 할거다구구.}

"......금방?"

{1000개 쯤이야, 별 거 아니다구구.}


이 새끼가?


"그럼 니가 할래?"

{......나는 비둘기라 그런 거 못한다구구.}


징글징글하구만.


"됐어."


패널티 따위, 금방 끝내주지.


"가보자고."


*

*

*


패널티는 곧 끝낼 수 있었다.

1km를 달릴 때마다 버피를 100개 씩이나 해야 한다는 점이 괴롭긴 했지만, 나름 할 만 했다.


"젠장."

{화이팅이다구구!}


문제는 내 눈 앞에 있는 저 화산절벽이지.

아, 어쩌면 버피 1000개를 할 만하다고 느낀 건, 저 절벽을 먼저 경험해봤기 때문일까. 역시 고통은 상대적인 거라더니.


"......간다."

{화이팅!!}


타앗!


망설일 틈 따윈 없었다. 대략 100미터 정도를 내달린 후, 나는 뜨거운 절벽에 몸을 내던졌다.


"끄으으으......."


쉽진 않았다.

방금 전까지 패널티와 씨름을 하던 나다. 이미 체력은 두 번이나 바닥났다. 그나마 조금의 휴식을 취한 덕분에 회복을 하긴 했지만.


{포기하지마라구구!}


그래도 힘든 건 힘든거다.


[남은 시간 : 25분 44초]


빠르게, 그러나 섬세하게 절벽을 타고 오른다.

어느새 거칠어진 내 손이 절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붙잡을 때마다 뜨거운 고통이 전달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 손을 놓고 싶다.


{빠르다! 아까보다 빠르다구구! 할 수 있다구구!}


그냥, 포기하고 싶다.

결국 인간의 마음도 사제의 마음도 이렇게 간사한 것일까.

내가 고통스럽지 않을 때는 마음이 관대해져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 어떤 고통이든 별 거 아니라고 느껴지지.


- 그래도 마스터. 우리가 이렇게 수련을 열심히 했는데 전쟁에서 못 싸우겠습니까?

- ......전쟁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쥐뿔도 모르면서 별 거 아니라고 단언했지.


- 훈련해보니 별 거 아닌 것 같은데요. 보십시오, 마스터! 실전 훈련 했는데 잘 끝냈잖아요? 생각보다 뭐, 별 거 아니네요.

- 네가 찢어진 시체를 본 적이 있느냐?

- ......예?


보았습니다.

그때, 감히 잊을 수 없는 그 날에, 제 동료들이 마치 과일이 깎이듯 죽어가던 그 모습을.


- 사랑하는 이가 목숨을 잃고, 영원하리라 믿었던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이것이 인간인지 아니면 정육점에 전시된 고기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 그것이 전쟁이다.

- ......

- 그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함부로 넘겨짚지 말거라.


[남은 시간 : 59초]


이제는 압니다.

그렇기에 함부로 말하지 않고, 넘겨짚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쳤다구구! 거의 다왔다구구! 조금만 더!!}


[남은 시간 : 15초]


{조금만 더!}


이 빌어먹을 임무를 완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겪었던 그 끔찍한 비극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남은 시간 : 5초]


인간을 위해서, 라고 하기에는 저의 정의감은 너무나 작고 빈약합니다. 억지로 인간을 위해서 이 짓을 한다고, 빈말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제인 저와 전혀 관계가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들이 멸망한다 한들, 사제인 제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저는 왜, 무엇 때문에 이 짓을 하고 있을까요.


{됐다구구!}


어쩌면 후회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 지독히도 멍청했던 저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하고 있는 이 행위들은 결코 선을 위한 일이 아닌지도 모르지요.


그나저나 마스터.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성공이다구구! 10km를 29분 57초에 들어왔다구구! 1등급 하급사제로 진급했다구구!}


맵을 이따위로 만든 건 좀 너무하지 않았습니까?


*

*

*


1등급 하급사제로 진급한 후 며칠 뒤.

나와 정중재는 황금마티즈를 타고 충청권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래서, 방송도 잘 되고 있고요, 저희 어머니도 요즘은 이런 거 저런 거 배우신다면서 바쁘셔요. 아! 쇼츠 조회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짧은 영상을 올리는 게 더 나을 때가 많더라고요. 다들 긴 영상을 보기 힘들어하니까."


녀석은 조수석에 앉아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밝은 녀석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순간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정중재를 처음 만났을 때 말이다.


- 제, 제가 어떻게 그런 걸......


자신감이라고는 쥐뿔도 없던 정중재였다.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휘둘리고, 남들이 정해 놓은 한계가 진정한 자신의 한계인 양 비굴하게 살아왔던 녀석이다.


"다음 번에는 어머니 모시고 부산이라도 갔다 올 계획입니다! 5성급 호텔로, 조식 맛있는 곳으로요! 해운대 쪽에 괜찮은 호텔이 많더라고요!"


그러나 이젠 아니다.

정중재가 내 아들은 아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해가는 녀석의 모습을 보는 것이 퍽 유쾌하다.


"서해대교네요."


우린 서해안 고속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녀석 말대로 우린 지금 막 서해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바다 가 본지도 참 오래됐네요."

"그러게."


우린 서해대교를 지나 잠시 행담도 휴게소에 들렀다. 그곳에서 식사를(나만) 충분히 한 후, 당진에서 빠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여기가 이렇게 막히는 곳이었나요?"


당진 톨게이트에는 차량이 많았다. 명절만큼 많은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인지 평소보다는 많은 편이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가려던 그때였다.


끼이이익-


마침 빽빽이 들어찼던 차량들은 다 빠진 상태였다.

다시 말해 여유가 있건만, 내 앞에 있던 흰색의 아반떼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내 뒤에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잘못하면 큰 사고가 날 뻔했다.


"뭐, 뭐야? 갑자기 쟤 왜 멈추는 겁니까 형님?"


나도 그게 궁금하다. 다른 차량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가면 되는 걸 왜 브레이크를 밟는 걸까.


사실 그 전부터 기미가 보이긴 했다.

초보딱지를 붙이지는 않았지만, 내게 톨게이트를 통과하기 전부터 계속해서 불필요한 브레이크를 밟았던 것이다.


또한 하이패스 차선으로 가고 있다가 갑자기 현금차선으로 이동한다던가, 그러다가 또 갑자기 하이패스차선으로 돌아온다던가.

혹시 몰라 최대한 거리를 두며 가고 있었는데, 그러길 참 잘했군.


"혹시 초보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진짜 빌런이던가."


차라리 초보인 게 낫다.

초보라면 봐줄 수 있지만, 운전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좀 무서울 테니까.


"초보니까 어느정도는 봐 주지만, 나오기 전에 연습이라도 하고 나왔으면 좋겠네요."

"내 맘도 그렇다."


어쨌거나 톨게이트를 지나, 이후 고속도로 출구로 빠지려고 할 때였다.

나는 우측 출구로, 내 앞에서 얼쩡거리던 아반떼는 앞으로 직진하고 있었는데.


빠아아아아아아앙!!!


갈림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아반떼가 무식하게 밀고 들어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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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버스전용차선의 카니발 +2 23.12.28 25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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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홍대입구역에서 생긴 일 +2 23.12.26 25 2 13쪽
66 변이 +2 23.12.25 20 2 14쪽
65 이론은 이론일 뿐 오해하지 말자 +2 23.12.24 28 2 12쪽
64 화물차 +2 23.12.23 26 2 11쪽
63 인간 라바콘 +2 23.12.22 23 2 11쪽
62 융통성? +2 23.12.21 28 2 17쪽
61 KTX +2 23.12.20 26 2 15쪽
60 에르마나 유덱스 +2 23.12.19 24 2 13쪽
59 간절하게 +2 23.12.18 21 2 11쪽
58 무면허? +2 23.12.17 23 2 13쪽
57 붙었다 +2 23.12.16 22 2 13쪽
56 여보세요? +2 23.12.15 24 2 13쪽
55 중고차 딜러 +2 23.12.14 23 2 13쪽
54 아버지 +2 23.12.13 22 2 16쪽
53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지 +2 23.12.12 19 2 14쪽
52 우리 애는 그럴 애가 아니거든 +2 23.12.11 26 2 12쪽
51 Money, Money, Money +2 23.12.10 26 2 16쪽
50 누구세요? +2 23.12.09 2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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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정차 시에는 기어를 꼭 P에 두세요 +2 23.12.07 29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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