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다보는 남자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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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상 쪽에 막내의 상황을 이야기하니, 그가 클랜의 서무 부서를 추천해주었다. 없는 자리를 만들어내야 하는 게 아니고, 안 그래도 사람이 부족해서 신규 직원을 구하던 차였다고.
“사람이 부족해요?”
“사람은 많습니다만, 믿을 만한 사람은 찾기 어려우니까요.”
막내에게 해당 부서에서 하는 일을 알려주고 의사를 물으니, 흔쾌히 좋다고 했다. 서무 부서라고는 하나 자택 근무도 가능하고, 급여나 복지 수준도 녀석이 돌아다니며 보았던 회사들보다는 좋다고 했다.
“신경 쓰이면 말해.”
-아니야. 괜찮아.
막내의 일이 계기가 되었을까.
김태훈은 다른 가족들의 상황이 어떤지도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 세상이 변한 것을 걱정하면서도 정작 가족들의 상황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 미안했다.
‘피난처만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었어.’
하여 오랜만에 연락을 해보았다.
둘째 동생의 가족은 그럭저럭 살고 있다고 했다. 녀석의 남편은 동네 편의점을 운영하는데, 프랜차이즈 편의점이 아니라 개인 매장이어서인지 간신히 운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프랜차이즈라고 해도 대도시 지역 말고는 거의 초토화된 것이 요즘 상황이었다.
상품을 받으려면 육로는 거의 힘드니까 항공운송이나 게이트 이용을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비용이 추가되니 결국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좋지 않은 매장들은 위약금 없이 해지를 해주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나.
-인근 지역 상품 위주로 세팅하고 있는데... 흑자 맞추기가 어렵네. 상품 질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팔 상품만 있으면 되는 거야?”
-운송비용이 문제지 뭐. 가격에 포함시켜야 하니까.
그렇지 않아도 과거부터 편의점은 비싸다는 인식이 있는데, 최근에는 그런 이미지가 더 커지는 중이었다. 그나마 버티는 경우면 다행이고, 어지간하면 폐업 수순을 밟지만.
-그래도 지역 방어는 잘 되고 있어서 다행이지.
“운송이라... 내가 사람 하나 소개해줄 테니까 그쪽하고 이야기해봐.”
-왜? 좋은 방법 있어?
“일단 이야기해봐. 확실하진 않으니까.”
그렇게 전화를 끊은 김태훈은 헥슨을 시스템으로 호출했다. 악마들처럼 그의 서번트로 지정되어있는 헥슨은 현재 헥슨 캐릭터에 대한 사용 권한을 갖고 외부 활동 중이었다.
캐릭터 소유를 아주 넘겨서 풀어준 건 아니고, 김태훈의 캐릭터 슬롯에 있지만, 마찬가지로 그의 소유로 되어있는 헥슨의 영혼에게 접속 권한을 공유해준 개념이었다.
아무래도 헥슨은 골치 아픈 가족과 첩들도 있고, 그쪽 업계도 머리 아픈 일이 많은 터라 직접 맡아서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한 것이다.
그동안 암흑공간에서 교화가 이루어졌기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거의 없어졌고.
[헥슨 : 마스터. 부르셨습니까?]
[김태훈 : 지금 헥슨 클랜 쪽에서 운송업 관리하고 있었지?]
[헥슨 : 그렇습니다. 운송할 물품이 있으십니까?]
[김태훈 : 아니, 그건 아니고, 특정한 소매점 하나를 맡아서 지원해줄 수 있나 해서.]
[헥슨 : 소매점이라면...]
[김태훈 : 내 동생 가족이 운영 중인 편의점인데, 상품 운송비용 때문에 애를 먹는 것 같아.]
[헥슨 : 편의점이라... 운송이라면 문제 없습니다. 직접 배달을 원하신다면 클랜 크리스탈을 배치해주셔도 좋고, 그게 아니면 클랜 창고를 이용해서 전달하는 방법도 있죠.]
[김태훈 : 클랜 창고! 그걸 생각 못 했네.]
[김태훈 : 클랜에는 이미 들어와있으니까, 창고 분할 공유만 해주면 되겠구나. 그래도 원하는 상품이 있을 테니까 연락해서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어.]
[헥슨 : 알겠습니다. 네. 그곳이군요. 연락해보겠습니다.]
동생은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클랜에 속해있었다. 하지만 특별 취급을 하지는 않았기에 개인 창고 기능을 주지는 않았다.
그것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해주겠지만, 굳이 잘 살고 있는데 엉뚱한 선물로 인생을 변화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그것이 필요할 것이다.
김태훈은 둘째에게 연락해서 해당 기능에 대해 설명해주고, 클랜 창고 10블록을 지정해 공유해주었다.
“물품을 구하는 건 헥슨 쪽에 이야기하고, 대금 결제도 그쪽에 하면 돼.”
-어. 오빠. 바깥 양반하고도 이야기해볼게. 일단 고마워. 아, 전화 왔네. 모르는 번호인데?
“아마 헥슨일 거야. 이야기 끝나면 전화 줘.”
-알았어. 고마워!
동생의 밝아진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셋째와 통화할 땐 조금 좋아지던 기분이 다시 가라앉았다.
-아주 거머리 같은 인간이야.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차단했지.
녀석의 남편, 이제는 전남편이 된 이가 언젠가부터 다시 연락을 시도 중이라고 했다. 처음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어쩌다 받았는데, 슬슬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약삭빠른 인간이잖아. 어디 이제 와서 애들 핑계를 대려고 수작질인지 원. 좀 알아보니 지금도 그 젊은 년하고 깨가 쏟아진다드만.
“네 남편? 그쪽하고 계속 만나면서 그런다고?”
-누가 내 남편이야?
“아. 말이 헛나왔네. 전남편. 재결합 이야기를 했다면서.”
-말했잖아. 오빠 때문이라고.
“음.”
어디서 들었는지, 그가 각성자고 꽤 많은 돈을 번다는 정보를 얻은 모양이었다. 정확한 내용까지는 알지 못하는 것 같지만, 뭐 건질 거 없나 전처를 흔들어보는 중인 듯 했다.
그러나 셋째는 전남편에게 정이 떨어져버렸다고 했다. 다만 자기 배에서 나온 두 자식이 있으니 흔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
“적당한 선에서 정리해줄까?”
-아냐, 됐어. 적당히고 뭐고 한 푼도 줄 생각 없어. 혹시 내 걱정한답시고 그쪽에 뭐 챙겨주려고 하지 마. 알았지?
“조카들은? 애들은 통화해봤고?”
-통화는 해서 뭐해? 메신저 게시판 보면 가족여행이라고 사진 올리기 바쁘던데. 가족이래, 가족.
“음....”
셋째가 좀 엄한 어머니긴 했다.
하지만 과한 체벌이나 간섭을 하거나 하진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뭐가 불만이어서 엄마를 외면하게 된 걸까. 그저 철이 들 나이가 아니라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좀 씁쓸했다.
‘어쩌면 녀석들도 현실에 순응하려고 노력 중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조카들의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해보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요즘은 뭐하고 지내?”
-친구 사정이 안 좋아져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 대. 나는 어쩌나 고민 중이야. 오빠도 그 집 안 산다며?
“주변 공사 중이라 시끄러워서.”
-아직도 공사해? 뭘 만들길래 그렇게 걸려?
“이것 저것. 너 일 없으면 현정이네 가서 일 도와.”
-아서요. 언니네 사정 뻔히 아는데 어떻게 거기를 가서 빌붙어?
“사정 나아질 거야. 연락해봐.”
-왜? 뭐 있어?
“아무튼 연락해봐. 이야기 잘 안 되면 나한테 다시 전화해. 너 하나 먹여줄 수는 있다.”
-어. 알았어. 굶어죽을 일은 없겠네. 아, 손님 왔다. 끊을게 오빠.
“그래.”
둘째와 막내가 잘 풀리고 있으니 셋째만 잘 되면 크게 걱정 없을 것 같은데, 둘째에게 셋째 좀 챙기라고 이야기를 해두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그가 이야기하면 직전 이야기와 연계해서 강요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셋째가 그의 이야기를 하면 어차피 그렇게 느끼게 될까.
‘실수한 건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일단 둘째에게 전화해서 오해가 없도록 잘 이야기했다. 이미 헥슨 쪽과 이야기를 했는지, 그쪽에서 사람이 와서 남편과 상담 중이라는 것 같았다.
-그 멀리에서 그렇게 사람이 금방 오더라고.
“그런 기능이 있어. 너네 가족도 권한 줬으니까, 시간 나면 사용해봐.”
-클랜 크리스탈? 이거야?
“그래.”
-와... 오빠 대단한 사람이었네. 각성자들은 다 이런 거야? 아니지?
“아니지. 아마도.”
-아무튼, 유정이는 걱정 마. 내가 챙길게. ...근데, 걔네 애들은 계속 배제야?
“나는 딱히 부담 없는데, 유정이가 반대해.”
-많이 맺혔나보네. 뭐, 내가 뭐라 할 문제는 아니지. 알았어. 오빠 바쁠 텐데 끊을게.
“그래. 언제 시간 내서 놀러갈게. 애들 얼굴 본 지도 오래 됐다.”
-엄청 좋아하겠네. 요새 외삼촌 자랑하기 바빠.
“그래?”
-엄청 잘 나가는 각성자라고. SNS인지 뭔지 거기에도 막 올려놓고 그러는 모양이더라고. 전에 이야기했잖아.
“맞아. 나도 그거 봤었지.”
-아... 그러고보니까 그걸 보고 그러는 걸 수도 있겠다. 유정이 전남편. 친구에 친구 어쩌구 하면 다 보일 거야 아마.
“그래?”
-그렇게 대단한 내용은 아닐 텐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지 말라고 할게.
“아냐. 그냥 둬.”
아이들이 올린 글이라고 해봐야 그저 잘 모르면서 하는 친척 어른 자랑 정도였다. 우리 외삼촌 엄청 부자야 같은. 그런 글도 못 쓰게 할 정도는 아니다.
‘흔한 일이니까.’
이미 각성자 본인이든, 가족이든, 하다 못해 친척이든 주변인들이 괜히 자랑하는 일들은 꽤나 일반적이게 되었다.
한쪽에선 각성자에 대한 반감 같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돈을 잘 버는 건 사실이니까. 초능력 같은 것은 덤이고.
‘그나저나, 좀 잠잠해졌군. 어디서 또 돈 빌리고 다니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최근 시스템과 종종 대화하고 있었다.
대화라기보다는 녀석의 일방적인 메시지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그것을 보고 난 후 그가 육성으로 뭔가 이야기하면, 녀석이 그것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젠 혼잣말 하기도 무서워졌어.’
적어도 속으로 생각한 것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휴대폰을 인벤토리에 넣은 그는 문득 멀리 보이는 구름의 모양이 거대 개미 같다고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이봐. 시스템. 듣고 있지?”
당장 메시지가 오진 않았지만, 궁금한 것이 있어서 말을 이어갔다. 지난 번에 부탁했던 것은 진작 마무리지었는데, 보상은 언제 줄 건지도 확인해야 하고.
‘부탁’ 이라는 건 실제로 그것을 ‘부탁’ 이라고 하면서 ‘계약’ 의 형식을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보상을 바로 지급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날짜에 주겠다고 되어있었고.
‘짠하다, 짠해.’
바로바로 결과에 따른 보상을 줄 수 있다면, [퀘스트]형식을 활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
‘관리자나 오너가 따로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껏 시스템을 피도 눈물도 없는 기계장치나 컴퓨터 프로그램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들어선 이상하게 불쌍한 놈 같았다.
‘왜 놈이라고 생각하냐면....’
그냥 느낌이었다.
인공지능에도 성별이 있다면, 이놈은 남자가 분명하다.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진다.
일종의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할까?
녀석이 빚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정을 알았을 때, ‘그렇다면 더더욱 발을 빼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왠지 모르게 불쌍하다는 동정심이 먼저 들었다.
아마도 빚을 지고 갚아본 경험이 있어서일 것이다. 빚을 진 적이 없는 사람은 그 느낌을 이해할 수 없다.
뭐, 세상에는 배째라고 나오는 악성 채무자들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이놈은 뭔가 해보려고 계속 발버둥치고 있는 게 눈에 보이니까.
“불쌍하다고 봐줄 생각 없어. 날짜 기한이 오늘까지야. 설마 시간 안 적혀있다고 자정까지 버틸 생각은 아니겠지?”
그가 수행한 것은 시스템이 제시한 특정한 좌표들로 가서 ‘확보’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고, 그저 그곳으로 이동해서 지역분석을 하면 되었다.
다만 궁금했던 건 이쪽 시스템 소유가 아닌 지역인데 좌표는 어떻게 알았는가 하는 점이었다. 혹시 다른 시스템 소유의 땅을 강탈하거나 한 건 아닐까?
‘각성자가 없었지만, 몬스터는 있었지.’
몬스터와의 전투는 없었다.
유체 상태로 지역 분석만 행했으니까.
그렇게 총 100곳의 좌표를 돌아다녔다.
중간 중간 다중 좌표 지역도 있었으니, 다 합치면 꽤나 넓은 땅덩어리였다. 굳이 바쁜 시간 쪼개가며 일해준 것은 시스템이 제시한 보상이 나름 나쁘지 않아서였다.
“내놓으라고!”
그다지 화가 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재촉해야 할 것 같아서 살짝 소리를 쳤다. 그렇게 몇 초 정도 있었을까. 띵- 하는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수행 요청 완료에 대한 보상이 도착했습니다]
-캐릭터 잔여 능력치 1 획득권 (판매 불가)
-인벤토리 10,000 블록 대여권 (판매 불가)
“재촉해야 주냐? 나만 나쁜 놈 만드네.”
원래 그 때 주려고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받기로 했던 건 모두 받았다.
‘잔여 능력치는 김태훈 쪽에 주고... 정신력 가야겠지.’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아이템. 현재 어느 마켓에서도 판매하지 않는 물건이었다. 가끔 매물이 나오긴 한다는데, 나오는 족족 팔려나가고 가격도 엄청 비싸다고들 했다.
인벤토리 대여권은 말 그대로 대여권이다.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으로부터 대여한다는 개념이라는데, 무슨 속셈인지 뻔히 보였다. 다른 시스템으로 소속을 바꾸면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될 테니까.
‘그깟 인벤토리 정도는 내 돈 주고 살 수도 있는데.’
1만 블록이라고 해봐야 100만 포인트. 현금으로 치면 500억원 정도.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 살 능력도 아니다.
어떻게든 잡고싶은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이것 저것 퍼줄 능력은 안 되니까 나름대로 고민한 모양새였다.
‘또 조금 짠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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