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다보는 남자 114
각성자로서의 능력을 생각해보더라도, 분명 처음과 비교해 지금의 그는 많이 강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큼 대담해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가진 힘이 강해져도 기본적인 성격이라는 건 별로 변하지 않았다. 직접 전투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나마 간접 접속이 되니까 다행이지. 아. 생각난 김에 그것부터 마저 완성해야겠군.’
최근 다른 시스템 쪽에서 재미있는 기능 하나를 얻었다. ‘3인칭 시점 설정’ 이라는 건데, 원래는 패밀리어를 부리는 마법사, 혹은 테이머들이 자신이 길들인 몬스터의 시야와 육체 제어를 공유할 때 활용하는 옵션이었다.
그가 유체를 하늘에 띄워놓고 지상을 내려다보는 것과 그다지 차이가 없는 기능이긴 하지만, 그 외에도 자잘한 설정들이 가능하다는 것 때문에 도입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유체를 직접 이리 저리 움직이지 않아도 고정된 시점 몇 가지를 정해두고 활용할 수 있었다. 유체의 위치와 관계 없이, 오히려 유체까지도 내려다보는 더 높은 시점에서의 모니터링도 가능했다.
또한 마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그가 가진 캐릭터들을 3인칭 시점으로 제어할 수도 있었다. 기존에도 어느 정도 비슷하게 할 수 있긴 했지만, 옵션으로 설정한 것처럼 안정적이지는 않았었다.
‘유체로 내려다볼 때 볼 수 없던 부분까지 볼 수 있다는 게 제일 큰 장점이지.’
가령 유체로 지상을 볼 때는 숲 속의 나뭇잎 아래까지 투시해서 보진 못한다. 하지만 해당 옵션을 활용하면 그 부분이 반투명하게 흐려지면서 가려진 부분까지 모두 볼 수 있다.
그야말로 그를 위한 옵션이라고 할 만하지만, 아직 적절한 세팅값을 찾지 못해서 계속 테스트해보는 중이었다.
‘조금 안 봤다고 또 이렇게 쌓여있네.’
설정을 만지면서 동시에 클랜 게시판을 열어보니, 그동안 확인하지 않은 글들이 꽤나 누적되어있었다.
잡담 정도라면 무시해도 무방하겠지만, ‘사건 사고 게시판’ 이나 ‘악행 및 악인 제보’ 같은 부분은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최근 그가 확보하고 있는 영혼들의 대부분은 그쪽에서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결정해 조치한 것이었다.
‘치안이 약해지니까 강간이나 약탈 범죄가 많아지는구나. 단순 도둑질은 일단 패스하고, 강력범부터 보자.’
그렇게 목록을 추리던 김태훈은 이어서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급적 악인들을 골라내 겸사겸사 더 이상 그러지 못하게끔 하는 취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영혼을 끄집어낸 직후, 그들이 저지른 악행들이 고스란히 열람되는 것이 문제였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기억 열람은 단순히 티비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르다. 정말로 자신이 경험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물론 가치관 자체가 바뀌거나 하는 건 아니니, 그런 범죄 행위에 대한 체험으로 쾌감을 얻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계속 비슷한 기억들이 덧씌워질수록, 마치 정신적인 굳은살이 생겨나듯 그런 행위에 대한 거부감까지 무뎌지고 있는 것 같아서 요즘 고민이 늘었다.
‘이러니 술을 안 마실 수가 있나.’
술집에서 보이는 수많은 각성자들은 결국 비슷비슷한 이유로 그곳을 찾는다.
그곳에는 몬스터든 인간이든 이제는 죽이는 것에도 이골이 났다고들 이야기하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죽음 뿐이라는 것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죽이면 죽였지,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던데.’
어쩌면 죽고자 하는 이들은 이미 죽어서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을까. 뒷머리를 긁으며 시스템 창을 닫은 김태훈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향하며 입을 열었다.
“여보시오, 한량. 말씀 좀 물읍시다.”
-무슨 일이오, 주인? 궁금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허심탄회하게....
설렁설렁 날아다니던 정령들 중 하나가 그렇게 부름을 받고 근처로 왔다. 정령들의 컨셉에 따라 말투가 다르다보니, 종종 이렇게 그들의 말투를 흉내내어 대화할 때가 있었다.
“오염된 지역을 정화하기 위해선 정령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들었소. 그것이 맞소?”
-그렇소. 주인께서 아주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구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화할 수 있소?”
-아직 깨끗한 지역부터 정령들이 늘어나 점점 확장하며 수복하는 방법이 있고, 처음부터 오염된 지역으로 정령을 보내어 정화 작업을 지시하는 방법이 있소.“
“아하. 청소를 시키는 게로군.”
-하지만 단점이 있소.
“단점?”
-우리처럼 주인을 가진 정령이라면 그저 지치는 것으로 그치니, 적당히 빠져나와 회복하거나, 아니면 주인이 마나를 지원하여 회복시켜줄 수도 있지만... 주인이 없는 일반 정령들의 경우엔 오염 지역에서 일정 시간 머무를 경우 소멸되고 만다오. 애초에 주인 없는 정령들이 오염 지역에 있을 이유도 없지만 말이오.
“그렇군. 결국 주인이 있는 정령에게만 시키는 것이 좋겠구려.”
-그렇소이다. 나 같은 선비가 할 일은 아니지만... 주인이 시키는 일이라면 내, 아주 열심히 해보겠소!
“말이라도 고맙소.”
말투가 사극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현재 보유한 정령들 중에서 가장 대화가 수월하게 진행되는 것이 바로 한량이었다.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어낸 김태훈은 어째서 어느 세상에서든 정령사가 중요한 취급을 받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정령사가 있어야 오염지역을 회복시킬 수 있는 거군.’
마법 중에도 비슷한 것이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넓은 범위를 정화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들었다.
‘안 그래도 다들 놀고 있으니....’
이리 저리 날아다니는 정령들을 올려다본 그는 닫았던 시스템을 다시 열고 정령 관련 카테고리로 들어갔다.
‘각자의 성향에 맞는 일만 시킬 수 있는 거구나.’
가령 공기가 오염되었을 경우엔 바람의 정령이 그것을 청소할 수 있고, 땅의 경우엔 땅의 정령, 물의 경우엔 물의 정령이 있어야 했다.
‘오염된 물이 증발해서 공기 중에 퍼진 경우라면 바람 정령이 필요한 건가... 대충 알겠다.’
현재 그가 보유한 정령들의 숫자가 적지는 않지만 속성으로 따지면 바람의 정령과 땅의 정령 두 종류 뿐이었기에, 물이 오염된 곳을 정화하는 것은 지금으로선 불가능했다.
‘일단 이 도시에서부터 시작하고, 이쪽이 마무리되면 어느 쪽으로 할지 생각해보자.’
도시엔 심각한 오염물질 같은 건 없는 편이다. 하지만 쓰레기 수거 차량 같은 것이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형편인 곳이 많다보니, 곳곳에서 자체적으로 소각하거나 아무 곳에나 버리는 통에 그로 인한 환경오염이 말이 아니었다.
‘이쪽으로 연결해서....’
시스템에 연결된 정령들에게 클랜 창고 일부를 링크시킨 김태훈은 정령들로 하여금 그렇게 아무데나 버려진 각종 쓰레기들을 수거하게 하고, 동시에 오염된 환경도 조금씩 정화하도록 지시했다.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이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악화되지 않는다면, 그것대로 나쁘지 않고.’
굳이 쓰레기를 클랜 창고까지 배정해 수거하는 것은 ‘자원 채취 로봇’ 쪽으로 보내면 에너지를 추출해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땅에 묻거나 태우는 것보다는 훨씬 깨끗한 처리 방식이었다.
‘좋은 일도 하면서 살아야지.’
사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다 끌어모아봐야 30도 안 되는 숫자의 정령으로는 그가 살고 있는 도시 하나 정도나 간신히 관리할 수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모처럼 의욕이 생기는 것은 그것이 ‘좋은 일’ 이기 때문이었다. 좋은 일을 하는 이들을 지원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직접 좋은 일을 하는 건 조금 오랜만인 것 같았다.
‘음, 아닌가? 이것도 엄밀히 따지면 직접 일하는 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네. 정령들을 부려먹고 있는 거지.’
그래도 보람있으니 되었다.
자못 고개를 끄덕이던 김태훈은 다시금 ‘3인칭 시점 설정’의 세부 세팅을 만져보다가 문득 멈추었다.
“.......”
말없이 소파에서 일어난 그는 순식간에 세계를 옮겨, 크몬들의 세상인 숲 한 구석의 공터에 도착했다.
그곳엔 제법 자가 수리가 진행되어서 이제는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거대 채집 로봇들이 벌목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김태훈이 바라보는 곳은 로봇들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으로 로봇들을 돌아보다, 이제는 몸을 돌려 이쪽을 향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당신인가?”
그는 밑도 끝도 없이 물어왔다.
이곳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크몬은 절대 아니고, 유사인간 부족과도 연관이 없었다.
다만 그가 나름 지구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걸친 옷에 프린팅된 영어 문구들 때문이었다.
“당신이냐고.”
조금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무엇을 묻는 건지 모르겠기에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더니, 뒤이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멀리서 작업 중인 로봇들을 가리켰다.
“당신이 저렇게 만들었나?”
“통성명을 하고 싶은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렇게’ 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건지부터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은데.”
상대의 외모는 기껏해야 서른.
하지만 각성자는 겉모습으로 나이를 판단할 수 없고, 또 실제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얕볼 수도 없다.
상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슬쩍 가늘어진 눈으로 이쪽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가늠할 수 있을까 궁금할 즈음, 저쪽의 입이 다시 열렸다.
“외부로 자체 탐사 및 채집을 보낸 녀석들 중 일부가 통신이 두절되었더군. 간신히 위치를 파악하고 와봤더니, 숫자도 줄어있고 남은 건 이 지경인데....”
“......."
“분명 일련번호는 내 것들이 맞는데, 시스템 소유권은 바뀌어있고 말이야. ...이봐. 당신이 ‘김태훈’ 인가?”
“맞아.”
“그러면 당신이 설명해야 하는 것도 맞겠네. 사과와 배상은 그 다음 문제고, 상황 설명부터 들어보자고.”
“사과와 배상?”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야 되나? 이것 봐. 나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야.”
상대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지만, 김태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 모습에, 상대방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게 대당 1만 포인트 짜리야. 아직 할부금도 다 못 갚은 녀석들이라고.”
“대충 알아보니 그 정도 가격이 맞더군.”
“...뭘 아무렇지 않게 떠들고 있어? 나머지 다 어디 갔어? 일단 이것들 소유권부터 돌려놔. 사과는 그 다음에 하든 하고.”
상대는 통보하듯 이야기했지만, 김태훈의 시선은 그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이어서 허공으로 손을 뻗은 김태훈에 의해, 무언가 묵직한 것이 튀어나와 바닥에 놓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크몬의 시체였다.
몸이 거의 절반 이상 잘려있었고, 심장과 간, 발톱 등등 신체 일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
상대는 뭘 꺼내놓은 건가 싶어 이쪽을 바라보던 상대는 곧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뺨을 씰룩거렸다.
“뭐야? 그건 왜?”
“시스템 알림이 왔더군. 내 부족원이 죽임을 당했다고.”
“부족원? ...네 부족이라고?”
“이미 알면서 뭘 그래. 죽였을 때 그쪽 시스템에도 메시지 갔을 거 아냐. 소속된 곳이 있는 종족이라고.”
“.......”
“그걸 확인하고 나서도 여기까지 오면서 다섯을 더 죽였고. 죽이고 나서는 이것 저것 꺼내고 잘라서 챙기기까지 했군. 인벤토리 공간이 작은건가? 통째로 넣진 못한 걸 보면.”
처음의 표정이 사라지고, 이제는 불편함과 불쾌함이 적당히 뒤섞인 표정이 된 남자. 하지만 그는 다시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모두 해서 여섯이라 치고, 그것 따져도 내가 입은 손해보다 크진 않을 텐데? 계산 들어가볼까? 나름 건수 잡았다고 우길 생각인가본데,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거든.”
“흠....”
부족원이 죽은 것에 대해서 화가 나긴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가 주인 있는 로봇들의 소유권을 불법적으로 변경한 것도 맞고.
진짜 주인이 찾아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것 저것 계산 들어가면 자신 쪽이 배상해야 하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고민하는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이 지역에 외부인이 들어왔다는 것.
게다가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자라는 것.
“개인업자인가?”
“...하하!”
단순한 질문.
하지만 상대는 그 질문 뒤에 숨은 의도를 정확히 알고 크게 웃었다. 이어서 자신의 머리 위로 뭔가를 띄웠다.
- 작가의말
전작들의 캐릭터가 자꾸 나오긴 합니다만.
모른다고 소외감을 느끼시거나, 찾아보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그런 각성자들도 있다... 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캐릭터 간의 밸런스는 각각의 특성이 달라서...
일종의 가위바위보 느낌으로 짜고 있습니다.
오후 6시였던 연재시간이 어느덧 자정 전후가 되어버렸군요.
항상 고맙고 송구합니다.
다음 회에 뵙겠습니다.
*오기와 오타를 수정하였습니다
제보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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