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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불 님의 서재입니다.

독 2.0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무협

강양1
작품등록일 :
2021.01.01 23:02
최근연재일 :
2021.03.15 16:00
연재수 :
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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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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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8. 내면의 혐오

DUMMY

“사부. 정부가 구조를 중단하고 섬멸 작전 펼치기로 결정했답니다.”


정훈이 광현을 향해 스마트폰을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광현은 텐트 앞에 앉아 정훈이 사 온 빵과 우유를 입으로 욱여넣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빵 우유를 집어삼키던 광현은 사온 걸 다 먹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야 팥빵. 씨발 죽고 싶냐? 요새 누가 팥빵을 먹어? 다음부터 사 오면 뒤진다. 아니 요새 얼마나 맛있는 빵이 많은데 팥빵을 사와? 졸라 센스 없게.”


이미 다 먹어서 껍질만 남은 팥빵 봉지를 들고 광현이 성질을 부렸다. 물론 광현이 먹은 것이었다. 그것도 단 두 입 만에.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섬멸 작전이 벌어지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당연히 중요하지. 팥빵을······됐고. 이길 수도 있잖아. 그래 봐야 괴물단지들인데. 요새 무기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도 알잖냐? 미사일에 탱크에 비행기까지.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스위치만 눌러도 그 괴물들 다 죽어 나자빠질걸?”


광현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이 괴물들은 분명 현대병기에 어느 정도 대항할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전면전은 없었다. 기껏해야 봉쇄선 근처에서 국지적인 충돌 정도였으니까.


전면적인 군대의 공세는 이야기가 달랐다. 대부분 국민은 그렇게 느끼지 못하지만 한국군은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강군이었다. 매년 엄청난 국방비를 투자하고 실제 전쟁을 염두에 두고 훈련한다.


괴물들이 아예 죽지 않는다면 모를까 현대전 병기로 충분히 죽일 수 있는 것이 증명된 이상 군대 단위의 화력이 집중된다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가진 패를 전부 내보이지 않던 것은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저쪽도 마찬가지지요. 실제로 요 며칠 사이 근처를 비행하던 군용기가 원인불명의 공격으로 격추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실제 며칠 전부터 후방포격 또한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전부 공중에서 요격당한 것이었다. 포탄이 요격당하는 초유의 사태에 군 작전부는 원인을 밝히기 전까지 진압 작전을 미뤄달라 요청했다.


하지만 지휘부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작전을 강행시켰다.


“걱정도 태산이다. 뭐 우연에 우연이 겹친 거겠지. 말이 되냐? 그래 봐야 괴물 쪼가리들인데 포탄을 어떻게 요격해.”


“죽은 사람이 살아난 건 어떻습니까? 그건 말이 됩니까?”


정훈의 말에 광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너 죽은 사람 처음 보냐? 뭐 그런 거로 놀라고 그래? 쿨하지 못하게.”


“사부는 사부 이전에 부활한 사람을 본 적 있습니까?”


정훈의 물음에 광현은 휴대폰 카메라를 켜 자신의 모습을 비췄다.


“아니. 나도 처음이야. 근데 막상 보니까 별로 특별하게 생긴 것도 없네. 팥빵 좋아할 만한 얼굴은 아닌 거 같고.”


광현의 농담에 정훈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잘은 먹더군요. 빵 봉지까지 안 씹어먹은 게 신기할 정도로요. 하여튼 요새 가장 인기 있는 말이 ‘아닌데’ 와 ‘그럴 리가 없어’ 혹은 ‘말도 안 돼’ 라는 건 알아두십시오. 상식이 무너지는 세상입니다. 방심한다면 그 괴물들에게 군이 당할 지도 모릅니다.”


라고 정훈이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난 존재에게 말했다.



광현이 살아난 건 땅에 묻은 뒤 하루가 지나서였다.


민기와 광현이 죽고 정훈은 핸드폰 연락처를 뒤져 민기의 부모에게 연락했다. 정훈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민기의 부모는 굉장히 어려운 과정 끝에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척 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런 척이나마 할 수 있었던 것에 정훈의 유창한 설명은 사실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보다는 언론의 도움이 컸다.


남대문과 중구 일대의 괴물과 테러에 대한 보도들이 홍수를 이루었고 정훈은 설명 대신 티브이를 켜기만 하면 됐으니까.


보도의 효과가 대단해 민기의 부모가 그걸 다 보고 난 후 그나마 당신 아들은 시체라도 찾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말까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하여튼 이미 일어난 죽음을 사회에 이해시키는 과정을 거친 후 민기는 경기도의 한 야산에 묻기로 했다. 민기 친가가 소유한 가문의 땅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정훈은 민기의 부모에게 살아 생전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많이 끼쳤지만, 지금은 다행히 죽어서 그럴 일 없는 시체 한 구를 그 산에 같이 묻어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민기의 부모는 승낙했고 정훈은 광현의 시체를 민기의 무덤 근처에 묻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 인간이 죽어서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거라고는.


장례식을 치르고 다음 날 광현이 살아났다. 정훈은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번호를 받지 않으려다 혹시나 해서 전화를 받았고 콜렉트콜까지 승낙을 한 후 사람이 부활하면 뭘 제일 먼저 먹고 싶은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짜장면과 족발 그리고 텐트 하나를 들고 산으로 찾아간 정훈의 눈앞에는 갓 부활해서 그런지 짜증이 잔뜩 난 사람 하나와 큐브 군체가 있었다. 신호등 인간이 나타난 것은 그날 오후부터였다.



“그나저나 소득은 좀 있었습니까?”


정훈의 물음에 광현은 바닥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큐브 군체를 바라보았다. 그런 광현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래. 재미있는 걸 발견했지.”


되살아난 광현이 자신의 무덤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 그것은 바로 자신의 부활을 조사하고 싶어서였다.


광현의 부활과 함께 나타난 큐브 군체와 신호등 인간. 그리고 괴물들의 진격. 광현은 그 모든 것들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부활한 이유를 밝히면 그들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훈을 시켜 언론사에 큐브와 신호등 인간의 관계를 말하게 한 것도 모두 광현의 의도였다. 자신으로 인해 일어난 이 일을 조금이라도 수습해보고자. 덕분에 살아난 직후 줄곧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재밌는 거? 뭡니까?”


광현은 빙글거리며 웃더니 낚시 의자 아래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날카로운 날을 가진.


“식칼? 그걸로 뭘 하려는 겁니······”


정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광현이 자신의 목에 힘껏 칼을 박아 넣었다.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광현이 쓰러졌다.



“우걱우걱. 사실 그걸 어떻게 다 설명하겠냐? 그냥 때려 맞춘 거지. 아 씨 팥빵 개새끼야.”


우물거리며 빵을 먹는 광현을 내려다보며 정훈은 정신이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목에 칼을 찌른 광현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하지만 잠시 뒤 광현의 시체에서 예의 큐브가 생겨났고 정확히 30분이 지나자 죽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 광현이 큐브 근처에서 나타났다. 살아난 광현의 첫마디는······


“배고파.”


였다.


“대체 어떻게 살아난 겁니까?”


“몰라. 넌 대체 왜 팥빵을 이렇게 많이 사 온 거냐?”


“그게 제일 많이 남아있었으니까요. 혹시 죽고 나서 부활할 때까지 기억도 있습니까?”


“없어. 젠장. 야 딱 봐도 팥빵이 맛 없으니까 안 사 간 거잖아. 그래서 남은 거고. 그것도 몰랐냐? 사람들이 많이 사는 빵을 사 와야지.”


“많이 사니까 품절 된 거 아닙니까? 품절 된 빵을 무슨 수로 사 옵니까? 혹시 부활하는 무슨 특별한 조건 같은 거라도 찾은 겁니까?”


정훈이 딱 거기까지 말을 했을 때였다. 광현이 먹던 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정훈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다.


“못 찾았어. 아니. 그냥 내가 죽고 나면 살아나는 것 같아. 마치 세상이 내가 죽지 못하게 하는 느낌이랄까? 여기서 중요한 건······나만 된다는 거지. 젠장. 그것 때문에 이 지랄을 한 건데.”


광현이 어딘가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곳에는 새로 만든 듯 아직 뗏장도 자라나지 않은 무덤 하나가 있었다. 민기의 무덤이었다.


사실 광현이 부활에 대해 이토록 열성적으로 연구한 이유는 바로 민기를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자신이 살아났다면 민기를 살릴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론은 뜻대로 나지 않았다.


“젠장. 어떻게든 그 새끼는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민기의 죽음은 사부 때문이 아닙니다.”


“나도 알아. 새끼야. 근데 옛날부터 내 주변 사람들이 엄청 죽어 나갔어. 그것도 대부분 나 때문에. 그래서 그런지 이젠 좀 병이······됐나 봐. 누구든 죽으면 내 탓 같고. 혹시 내 행동이 그 죽음에 무슨 영향을 끼친 건 아닌지 계속 생각이나. 젠장.”


“사부.”


말을 하는 광현의 얼굴은 별 변화가 없었다. 분노하지도 그렇다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냥 메말라 보였다. 하지만 그건 어떤 표정보다도 절망에 가까워 보였다.


“씨발. 이래서 무림 뜬 건데. 여기도 너무 오래 살았나?”


“저도 살리고 싶은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게 좋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사실 정훈도 광현 못지않게 기구한 신세였다. 당가의 차기 가주로까지 인정받던 엘리트에서 불법 체류자가 됐으니까.


그 또한 주변 사람들을 많이 잃었다. 너무도 많이.


정훈의 말에 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근데 네 말을 뒤집어보면 난 죽었다 살아났으니까 나쁜 거냐?”


“그런 말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살아나기 전부터 나쁘셨는데.”


정훈의 농담에 광현이 기분이 나아졌는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뭐 이 새끼야! 너 뒈지고 싶냐? 이게 나이 처먹었다고 내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하네.”


하지만 정훈이 맞을 리가 없었다. 고개를 까딱까딱하는 것만으로도 광현의 공격을 모두 피했다.


“와 이 새끼 장난으로 치는데 내공까지 쓰면서 피하는 거 보소. 이 새끼야 이리 안 와?”


억울한 듯 광현이 소리를 질렀지만 자신보다 무공이 뛰어난 정훈을 잡을 수는 없었다. 결국, 지친 광현은 주먹질을 멈추고 낚시 의자에 앉았다.


“아오. 젠장. 시발 새끼. 야 안 때릴게. 이리 와. 이리 와봐. 진짜 할 말 있어서 그래.”


하지만 정훈이 가까이 와 앉자 광현은 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물론 맞출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오 개새끼. 얍삽한 새끼. 노인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좀 맞아주지. 삼강오륜 말아먹은 새끼.”


분통을 터뜨리던 광현이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는지 전화기를 꺼냈다.


“넌 이제 뒤졌다. 한 3시간 38분쯤 뒤에. 여보세요. 야 난데 아직 그거 안 팔아먹었지? 뭐 돈? 개새끼야. 너도 내가 졸로 보이냐?”


한참을 화를 내며 전화하던 광현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정훈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정훈은 광현이 또 때릴 거 같아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야. 씨발 안때려 안때려. 대신 잠깐 말 좀 들어봐.”


“뭡니까?”


“너 돈 좀 있냐?”


뜬금없는 광현의 말에 정훈의 얼굴이 구겨졌다.



정훈에게 사정과 협박을 번갈아 가며 사용한 끝에 광현은 돈을 뜯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대체 어디 쓰려고 하시는 겁니까?”


정훈은 궁금했다. 정훈이 아는 광현은 먹고 자는 것만 충족되면 물욕이라고는 없는 인간이었다.


물론 과거에 혼자 국가 단위 예산을 굴렸던 적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 때도 꽤 검소했다고 했다. 결론은 그냥 벗지 않고 굶지 않으면 그만인 인간이었다.


물론 은근히 편식이 심하긴 하지만.


‘예전에는 더 카리스마가 있었던 것 같은데.’


결국 돈을 뜯어낸 광현은 나가더니 몇 시간이 지나 얼굴이 시뻘게져서 들어왔다.


“아오 개새끼들. 무슨 이자를 이렇게나 받아먹고 지랄이야.”


화를 내는 광현의 손에는 길이 50센티미터 정도의 검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 칼 뭡니까?”


칼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언뜻 보면 분명 그냥 칼이었지만 그 안에서 어떤 기척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생물?’


살아있는 존재와 비슷한 기척이었다.


“정훈아 너 예전에 맹에서 연구하던 내공 반작용 구조라고 기억하냐?”


들어본 적은 있었다. 내공과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지속 가능한 사이클을 만들어내는 구조. 쉽게 말하자면 내공을 기반으로 한 인공 생명체였다.


“그거 실패했다고 들었는데요? 내공 상보성이 생각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서.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궁극 원인 이야기까지 돌았고. 지금 내공 체계에 대한 가설만으로는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다고.”


“멍청한 새끼들이 말로 하려고 하니까 그렇지. 뭐하러 돌을 돌이라고 부르냐 그냥 던지면 되는데. 하여튼 그래도 아예 헛짓은 아니라 이게 나왔지. 내공 친화형 금속. 사용자 특유의 내공에 적응해 내적 결합 구조를 바꾸는 금속이다 이 말이야.”


“그걸로 뭘 하려고 그럽니까?”


“뭘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미 했다.”


광현이 칼 들더니 눈앞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검기······”


희미하게나마 칼의 표면에 기가 실려있었다.




광현이 하는 설명의 요는 이러했다.


내공에 반응해 내적 결합 구조를 바꾸는 칼의 특징을 이용해 칼 내부에 인공단전을 만들었다.


내적 결합 구조란 분자나 원자구조처럼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형성되는 형이상학적 구조를 말했다. 내공 또한 이러한 형이상학적 구조가 물리적 영향력을 동반하도록 변형된 것이었고. 물론 그렇게만 말하기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서 칼에서 그런 기척이 느껴진 거로군요. 대체 그 칼은 어디서 얻은 겁니까? 저보다 더 먼저 무림을 떠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그런 게 있었으면 왜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은 겁니까?”


“뭐 얻은 경위를 최대한 짧게 말하면······땄어. 그리고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거고.”


“왜요?”


“펐으니까. 그리고 그거 제대로 사용하려면 내공을 주입해서 내부 구조를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야 해.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내공을 쓰면 삼도천 건너는 체질이라.”


“그럼 대체 지금은 어떻게 내부 구조를······아······”


질문을 하려던 정훈은 생각이 아직 상식에 묶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공을 쓰면 죽는 체질이라면 죽으면 된다. 어차피 다시 살아나니까.


“그럼 지금까지······”


“죽다 살아······아니구나, 죽고 살아났지. 한 이 천만 원 번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장례식 한번 하는데 한 500 드냐? 뭐 그렇게 따지면 4번이나 죽었는데 장례식을 한 번도 안 했으면 이천 번 거지. 하여튼 이제 다 맞춰놔서 내 내공은 쓸 필요가 없어. 진짜 단전처럼 내 의식만으로도 작동되거든. 뭐 내부에 내공이 별로 없어서 아직은 약하지만.”


“그 칼 잠깐 봐도 됩니까?”


칼을 받아든 정훈이 내공을 이용해 검을 살피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칼 내부에는 진짜 단전의 구조가 재현되어 있었다. 그것도 그냥 모양만 있는 게 아니라 작용까지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었다.


정훈은 내공을 주입해 그 구조를 잠깐 변형시키려 해보았다. 아주 미세하게 구조가 그에 반응하며 변형을 일으켰다.


하지만 정훈의 예상과 정확히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진짜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변수가 많아 의도대로 제어하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칼 자체가 불완전한 기술로 만든 물건이기도 했고.


“대체 어떻게?”


그런데 광현은 그 불완전한 물건을 가지고 단전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단전이라는 건 신체라는 물리적 실체에 근거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히 물리적인 건 아니야. 각 기혈과 장기 간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어떤 시스템이지. 덕분에 의식이나 내공 같은 것들에 반응할 수도 있고. 그 칼은 조악하긴 해도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데 최적화되어있어.”


광현의 말을 요약하면 칼이 좋아서였지만 솔직히 정훈은 그 칼을 다발로 가져다 줘도 단전을 만들어낼 자신이 없었다. 한때 무림 최고수였던 광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공도 조금이지만 쓸 수 있고. 그럼 이제 널 쥐어 패볼까?”


칼을 오른손에 잡은 광현이 왼손으로 정훈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내공이 실려 일반 사람이라면 눈으로 볼 수조차 없는 빠르기. 하지만······


“휘릭!”


정훈은 상체를 가볍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광현의 공격을 피했다. 이어진 광현의 공격도 모두 고개만 까딱거리며 피했다. 결국 광현은 씩씩대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젠장. 좀만 기다려라. 내공만 더 쌓으면 아주 아작을 내줄테니까.”


광현이 내공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겨우 한 줌에 불과했다. 그 정도로는 절정의 경지에 이른 정훈에게 손조차 댈 수 없었다.


그런 광현을 보며 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부 세종 청사. 대통령 임시 집무실.


“이게 뭡니까? 괴물들의 영역이 늘어났지 않습니까?”


괴물들이 중구를 점거한 탓에 이전한 대통령 집무실에서 고성이 터져나왔다. 대통령 김정미가 눈앞에 있는 장성들을 보며 한창 소리를 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벽에 붙은 서울 지도 한가운데에는 붉은색의 표시가 되어있었다. 바로 괴물들이 점령하고 있는 중구였다.


최근 괴물들이 은연중에 지켜줬던 라인이 조금이지만 무너졌다. 신호등 인간들이 신호등에만 반응한다고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간판이나 상징 같은 이미지에도 신호등 인간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덕분에 간판에 붙은 신호등 인간들을 제때 제지하지 못했고 괴물들은 여지없이 그곳까지 치고 나왔다.


뒤늦게 이를 발견한 군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신호등 인간을 막았지만 이미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신호등 인간과 괴물들의 상관관계는 밝혔습니까?”


대통령의 물음에 장성들은 침묵할 뿐이었다.


당연했다. 관련 분야에 종사하던 과학자들도 모르는 문제를 총 쏘고 탱크 모는 거로 밥 먹고 살았던 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다. 대통령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가 갈군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대통령 할아버지와 달리 대통령은 국군통수권을 쥐고 있었다.


더럽고 아니꼬웠지만 눈을 내리깔거나 다른 곳을 바라보는 정도 사과의 몸짓 정도는 해줘야 했다.


김정미 대통령은 그런 장성들의 바디 랭귀지를 한번 죽 훑었다. 의도한 바였으니까.


최대한 그들이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을 건드려 약한 모습을 보이게 하는 것. 군대가 신호등 인간이나 라인붕괴 같은 부분을 어쩔 수 없다는 건 김정미 대통령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다 아는 사실을 건드린 건 이유가 있었다.


“휴. 그래요. 다 이해합니다. 이 사태가 일어나고 여러분들이 얼마나 힘들게 나라를 위해서 싸우고 계시는지를. 전 아직도 박관형 대위가 떠나기 전 저에게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내겠다고. 전 그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의 말에 장성들의 눈에 뜨거운 뭔가가 차올랐다.


박관형 대위는 사태 초기 투입된 군 구조대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시민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괴물들을 유인한 뒤 끝내 사망했다. 덕분에 30명이 넘는 시민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박관형 대위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영웅입니다. 하지만 전 여기 계신 여러분. 그리고 지금 현장에서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 모든 장병들의 마음 또한 박관형 대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진심으로 나라를 생각하고 국민을 위하고 있다는 걸요.”


대통령의 말은 진심이었다. 굳이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았더라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진심을 왜 이곳에서 꺼냈느냐 하는 것이었다. 김정미가 대통령이 된 것은 거짓말을 잘 해서가 아니었다. 진심을 적절한 순간에 꺼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 진심을 꺼내는 이유는 다음 말에 들어있었다.


“내일 있을 작전에서 온 국민이 그 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생각하는지를. 보여주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박관형 대위와 같은 영웅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다음 날. 군의 대대적인 괴물 섬멸 작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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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5. 진짜 거지 같은 일 21.03.08 18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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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2. 옛날일 21.02.19 20 0 15쪽
21 21. 집 21.02.15 25 0 13쪽
20 20. 독의 요람 21.02.12 22 0 14쪽
19 19. 단서 21.02.10 24 0 15쪽
18 18. 공장의 내면 21.02.08 31 0 16쪽
17 17. 웰컴 투 동토의 사슬 21.02.05 20 0 14쪽
16 16. 괴물의 바다 21.02.03 22 0 14쪽
15 15. 재생 21.02.01 24 0 17쪽
14 14. 발병 21.01.29 35 0 17쪽
13 13. 굿바이 아이스크림 21.01.27 51 0 16쪽
12 12. 니르바나 21.01.25 27 0 13쪽
11 11. 놈의 몸에 생기가 돌아온다 21.01.23 26 0 21쪽
10 10. 타이밍 이쓰 에부리띵 21.01.22 32 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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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내면의 혐오 21.01.18 37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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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 플랜테이션 21.01.13 45 1 22쪽
5 5. 바이러스와 신사(3) 21.01.11 54 1 19쪽
4 4. 바이러스와 신사(2) 21.01.08 64 1 15쪽
3 3. 바이러스와 신사(1) 21.01.06 86 2 19쪽
2 2. 사우스게이트 파티 헬(2) 21.01.04 84 2 18쪽
1 1. 사우스 게이트 파티 헬(1) +2 21.01.01 234 3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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