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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야링
작품등록일 :
2021.05.1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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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3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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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5,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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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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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178. 없던 기억

DUMMY

“아, 여기서 내가 말한 그 작자는 ‘남은 쪽’이야.”


“알기 쉽게 여신이라고 해.”


“어라, 괜찮아? 그렇게 부르는 건 불편해할 줄 알았지.”


확실히 불편하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일개 호칭에 불과하다.


“근데 그게 어떻게 오류야.”


“오류지. 내가 종전 직전에 발견했던 게 정말 ‘멸망’이라면, 그때 사라진 게 되는 데. 누가 봐도 나타났던 게 사라지면 오류처럼 보이잖아.”


“그럼 여신이 이미 손에 넣었다는 얘기는.”


“말 그대로야. 그때 여신이 슬쩍하는 바람에 사라졌다고 인식한 거야. 간단하게 인식의 오류. 사실 우리가 받은 의뢰품은 멸망으로 보이는 또 다른 무언가라는 거겠지.”


“멸망으로 착각할 만큼의 무언가? 굳이 그 정체까지 숨기면서 찾고 싶은 이유가 뭔데? 멸망이 있으면 전부 해결, 그런 거 아니었나?”


“흐음·········”


메타트론은 잠시 제 책상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까 내려놓은 모형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이미 이들의 이야기를 머나먼 소설처럼 듣고 있던 데니는 제 자리에 앉아 하품만 늘어놓고 있었다.

한동안의 토론이 있던 장소엔 모처럼의 정적이 흐른다.


“저 아저씨······ 사실 저 여기 왔을 때부터 조금 거슬리던 게 있었는데요.”


잠자코 있던 지아가 이 틈을 이용해 하루에게 말했다.

어째선지 지아는 적잖이 불편한 기색이었다.


“어디 불편해?”


“예. 아니, 그게 아니고 저거요.”


그녀가 가리킨 건 다름 아닌 메타트론이 뚫어지게 응시하던 모형.


“저게 왜?”


“어디서 본 적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녀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던 메타트론이 지아에게로 홱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하루 역시 그녀의 말에 조금은 얼굴에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확히 봤다기보단, 뭔가 봤을 때 속이 울렁거려서요. 조금 떠올렸는데 익숙한 것 같아요. 아저씨하고 만났을 때 이후는 아니고, 조금 더 이전에······”


확신하지 못하고 지아는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닌데······ 만났을 때가 맞나······. 아저씨를 만나기 전의 아저씨를 만난 후에 봤다던가······”


그런 그녀를 보는 메타트론의 미소는 이전보다는 조금 더 어색했고, 더 긴장감이 가미되어 있었다.


하루는 지아의 어깨를 조심스레 붙잡았다.


“일단 진정부터 해.”


그럼 지아는 하루와 눈을 마주쳤다.

한없이 흑색인 그 안구가 무척 안심되었다.


지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조금은 진정된 것 같았는데, 이번엔 메타트론이 다소 불안한 감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가 의문이라는 얼굴을 해도 그녀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한다.


“왜 그래?”


“······내가 봤던 게 멸망이 아니었다면.”


“아, 새로운 가설이라면 사양할게. 벌써 머리가 아프려고 하니까.”


그렇게 반박하면 메타트론은 제 책상에서 모형을 덥석 잡아 들었다.


“이게 멸망이 아니라고!”


갑작스레 언성을 높이는 탓에 하루는 당황하는 듯했다.

뒤이어 메타트론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탓에 지아가 그녀를 피해 하루의 뒤로 이동했다.


메타트론이 하루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붙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동시에 방금 들고 온 모형을 이번에도 함께.


“애초에 멸망은 그 작자가 시키는 거였다면서. 네가 온 근본이 어딘지는 몰라도, 거기서 네가 본 그 작자. 틀림없이 남자였어?”


이 여자, 처음부터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진작에 얘기를 꺼냈어도 좋을 것 아닌가.

그보다 어떻게, 라는 의심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답을 건넸다.


“나도 구제 불능이었던 천계인들의 조사 기록을 엿봤거든. 네가 고작 ‘구약’이자 ‘첫 구절’이라고 표현했던 것들.”


「신의 음성이 내린 날

양들은 기괴한 형체 앞에서 울고,

유일하게 어린양만이 그것을 그로 봤다.」


다시금 구절을 되뇌던 메타트론이 제 이마를 탁 쳤다.

그대로 몇 발짝 뒷걸음치더니 다시 책상에 걸터앉았다.

자신이 들고 있던 모형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피식 비웃는다.


“왜 그걸 이제 떠올렸지.”


“무슨─”


“우리 둘 다 완전히 바보였잖아. 이 경우엔 나만 그랬다고 해야 하나. 멋대로 이딴 형태가 멸망이라고 단정해버렸으니. 아니지, 멸망이 아니라 ‘그 작자’라고 명명해야 하나.”


이윽고 그녀가 손바닥을 펼치면, 손가락을 타고 모형은 스르르 흘러내렸다.


톡─

톡, 데구르르


바닥에 떨어진 모형이 굴러 하루의 발 앞에 멈췄다.

하루가 멍하니 그것을 응시하고 있을 때,


“거봐. 넌 그걸 보고도 아무런 감흥도 없잖아.”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던 메타트론이 읊조린다.


“처음부터 넌 멸망과 함께 있었을 텐데.”


하루는 마치 자신에게 그걸 본 적이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 메타트론을 마찬가지로 빤히 쳐다봤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끝까지 그녀가 답을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치직,

지지직


그때 하루의 머릿속에선 지저분한 노이즈와 함께 본 적 없는 영상이 떠올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산함을 내뿜는 구체가,]

─······─······──

─[대교 위에 나타나 교통이 마비되고 사람들의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어떤 매체 할 것 없이 모두가 그것에 관해 떠들던 때.

이건 틀림없이 그녀가 ‘근본’이라 불렀던 세계에서 들었던 음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곧 하루의 눈앞에 나타난 건 어디서도 없던 장면이었다.


#


황폐하다.

그런 단어 하나로 정리할 수 있을 만한 장소였다.


바람은 곧잘 불었다.

재인지 모래인지 모를 것을 머금어 텁텁하기 그지없었다.


뭘 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마냥 서 있었다.


─칠십팔조 삼천 팔백구십억의 실패네.


아직 알아듣는 게 가능한 단위였다.

그것마저 터무니없는 수였는데, 또 터무니없이 작은 수 같기도 했다.


하루는 뒤돌았다.


그곳엔 방금 수를 읊조리던 그 작자가 있었다.


그 작자가 제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는 게 느껴졌다.


─첫 번째의 너를 회상하고 있었니.


아니나 다를까 숨기지도 못한 듯했다.

다시 시선을 돌려 끝을 알 수 없는, 변함없이 이번 생에도 석양이라는 이름이 지고 있는 지평선을 바라봤다.


공허했다.

저렇게까지 꽉 들어찬 붉음을 간직하고 있다는데, 이렇게 공허할 수 있는 법인가 생각했다.


그러다 다시 그 작자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땐, ‘그 녀석’도 있었다.

하루가 그 녀석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그 작자는 녀석에게로 뒤돌아보더니 오라고 손짓했다.


육중한 몸이 움직였다.

아니, 여린 것 같기도 했다.

용종이라고 했던가.

그중에선 확실히 유려한 몸 선을 지니고 있었다.


날갯죽지부터 타고 내려와 등으로 이어지는 이음새, 그 주위의 흰 것에 가까운 금빛 비늘은 특히 그랬다.

아름다움을 차마 감추지 못해 새어 나온 것만 같았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 작자는 제 눈동자를 살피고 웃더라.

하루가 지그시 미간을 좁히고 있으면, 그 작자가 손을 내저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 이번 생에 오기까지 네가 관심을 보인 건 없었으니까, 특이하다고 생각해서. 나도 모르게 또 희망을 품고 말았어.


그럼 녀석은 기다란 목을 부드럽게 내려 그 작자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때의 투명한 눈동자가, 왜 그렇게까지 안쓰러워 보였을까.

녀석의 이야기를 듣던 그 작자의 올라간 입꼬리가 조금 슬프게까지 느껴졌다.


─그러네. 네게도 미안. 이번에도 그의 선택이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어. 나도 언젠가 네가 역할에서 벗어날 때가 오기를 빌게.


무엇에 관한 위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작자는 조심스레 그 녀석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돌연 아이 같이 환한 웃음을 하루를 향해 내었다.


─그렇지. 세계의 결말에 한해서라지만, 사실 너흰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잖아. 이름을 붙여주는 게 어때?


그건 그 녀석에게 이름을 붙여주라는 의미였을까.

하루가 그 작자의 말을 듣자마자 입을 떼면, 그 작자는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아아, 내 생각을 고집하는 건 아니야. 지금이 아니어도 좋아.


그럼 하루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녀석이 커다란 눈동자로 하루를 빤히 응시했다.

하루도 녀석의 눈을 마주치면, 그 작자는 둘 사이에서 번갈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작자가 얕은 콧숨을 내쉴 땐 하루도 때가 왔다고 알아챘다.


─언젠가 네가 그럴 기분이 들면. 그게 언제가 될진 몰라도, 난 지금 네 변화를 확실히 목격했으니까. 끝까지 이 순간을 상기시키면서 가능성을 놓지 않을게.


그 작자는 마지막 말을 내놓듯 던졌다.

신호라도 되듯 그 녀석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녀석에 관한 기억이라면 매번 각 세계의 결말에서야 겨우 떠올리는 정도였지만, 지금이 어느 때보다도 숨을 들이쉬는 방식에 망설임이 보인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들이쉬던 그 녀석의 숨이 끝에 다다랐다.

칠십팔조 삼천 팔백구십억 째의 세계에서, 자신을 지우기 위한 결이 뿜어졌다.


#


허억!


악몽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하루는 멎은 숨을 되찾는 경험을 했다.

놀라긴 주변에서 지켜보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뭘 본 거야.”


메타트론이 하루의 어깨를 붙잡고 물으면 하루는 그녀를 묵시했다.

그녀는 그가 무언가를 봤다고 확신했다.


“그 작자······.”


“그 작자? 어느 쪽. 남은 쪽? 이미 사라진 쪽?”


“사라진 쪽. 내게 익숙한 쪽의 그 작자가 거기 있었어. 어딘지는 몰라. 분명 몇 번째 세계······ 칠십조······”


말하다 금세 떠올리지 못하고 포기했다.

하지만 메타트론은 찰나에 새어 나온 숫자만으로 제 가설이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서 뭘 하고 있었어?”


핑그르르─

그녀가 잔뜩 고조되었다는 것 정도는 정수리 위에서 빠르게 돌아가는 고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한껏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지만 하루는 질문에 답했다.


“······아무것도.”


그 말과 더불어 지그시 눈을 감고 떠올리던 기억을 읊던 하루가 퍼뜩 눈을 떴다.

뒤이어 그 눈이 향한 곳은 지아였다.


투명한 눈동자.

틀림없이 그곳에서도 마주했었다.


영 엉뚱한 곳을 대뜸 쳐다본 것처럼 지아가 그의 시선을 어색하게 받고 있을 때, 마찬가지로 그의 시선을 쫓은 메타트론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다시 올라갔다.

그녀의 식은땀이 이마에서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온다.


“지아라고 했던가.”


이번엔 메타트론이 이름을 부르면 지아는 그녀와 그를 번갈아 봤다.


“뭐, 뭐예요.”


“이전에 말했지? 하루를 만나기 전의 하루라는 거, 정확히 언제야.”


정리 안 된 방을 뒤지던 것처럼 횡설수설하던 말을 떠올릴 리 만무했다.

지아의 꿈틀대던 눈썹과 깜빡거리던 눈꺼풀은 그 와중에도 그것들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다 떠올린 건,


“황폐한 곳. 외로운 남자.”


둘이었다.

하루의 반응만 살피자면 다행히도 두 가지의 키워드를 제대로 짚어낸 모양이었는데, 반대로 그들의 반응이 다행인 일인지 의심하게끔 했다.


하.


먼저 헛바람을 내놓은 건 메타트론이었고, 목울대를 꿀렁이던 건 하루였다.


“잠깐.”


그러다 메타트론이 양손을 들고 말한다.


“이참에 고백하나 해도 될까나.”


“뭐야 갑자기.”


그녀는 구석에서 턱을 괴고 이젠 모르겠다는 표정인 데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전에 사실 지아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거든. 글로리아때 사건은 둘 다 알지······?”


지아와 하루가 서로 잠자코 시선을 나눴다.

동시에 떠올릴 수밖에 없는 건, 잊고 싶지만 잠재된 기억.


둘이 상기시켰다는 걸 확인하고 그녀는 다시 얘기를 재개했다.


“어쨌든 이전에 내 소속이었던 녀석이 휘말린 일이니까······ 아니, 여긴 사실대로 말해야겠지. 지아한테 관심이 있었어.”


“저요?”


“정확하겐 네가 가진 능력.”


하루도 그제야 그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게 뭐였는지 눈치채고 이제껏 없던 당혹감을 드러냈다.

잇따라 메타트론의 꿈틀대는 한쪽 입꼬리와 불안한 눈빛.


“하하······ 그래. 네 예상과 내 가설이 맞는다면 지아겠지.”


“뭐가 전데요?!”


여전히 둘만 아는 듯한 태도에 참다못한 지아가 발끈할 때,


콰직, 창!


귀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셋 사이에 있는 허공이 깨졌다.

구석에서 방관하던 데니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치 깨진 유리 파편처럼 드러난 허공의 틈 속에서, 이쪽을 섬뜩하게 주시하고 있다.


그 작자의 ‘남은 쪽’이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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