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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야링
작품등록일 :
2021.05.1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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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3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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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5,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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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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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69. 신기루

DUMMY

사라지는 순간까지 지그시 쳐다보던 아이의 얼굴을 기억한다.

마지막 순간에 아이는 전생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아이는 틀림없이 웃고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전쟁을 치른 건 흔한 일이었어. 더군다나 종전도 전에 절멸한 종족들이라면, 섬에 있는 이들은 서로 누군지 기억해줄 수도 없잖아.”


“단순히 기억해주는 존재가 안식의 키라고요?”


“정확하겐 그들이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주는 존재지. 누구도 몰랐던 모비딕의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준 것처럼. 그들에겐 희소성 자체가 안식을 가질 수 없던 이유인 거야.”


줄리엣은 지아와 하루의 대화를 듣다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 종족만이 알고 있을 구전 같은 건, 확실히 도움이 될지도.”


“근데, 그 많은 인원에게 언제 다 그런 걸 일일이 해줘요?”


방금까지 함께 대화를 나눴던 이가 맞는지, 하루는 입을 텁 다물었다.

그럼 지아도 게슴츠레 하루를 쳐다봤다.

예상했던 대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마 하루님만이 가능할 테니, 역할을 나눌 수도 없습니다.”


아론마저 의문을 달았다.

산 넘어 산이라.


“그동안 자기 종족만이 가진 특징이 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나?”

“그 기억이 안식의 키가 될 거라고 여긴 이들은 없었겠죠. 저희도 귀신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쯤 되면 포기하고 사는 이들도 있겠지.”

“지금에라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무리야. 자신에겐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에서, 특별하다고 여기는 점을 떠올리는 건 생각보다 고난이란다.”

···


넷은 한동안 강구하고 논파하기를 반복했다.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던 의논이 끝났을 땐 다들 맥없이 소파에 눕듯이 기대있었다.

이미 혼이 나간 것처럼 그들의 눈동자가 멍하다.


기어코 방도를 찾지 못했다.

지금에야 떠올린 방법으론 결국, 언제 끝날지 모를 노가다 뿐이라는 것이었다.


“섬을 전부 돌면서 그들에게 안식의 계기를 주라고?”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자신들마저 섬의 주민이 될 것이었다.


“주민들의 명단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 봤자 한 번에 전할 수 있는 법도 없긴 합니다만.”


“그러고 보니 축제 때는 주민들이 모이지 않아요?”


“섬의 인원들을 전부 수용할 만한 장소입니다. 모인다고 해도 쉬운 규모는 아닐 거예요.”


“이럴 때 영혼 치료사라도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지아의 말에 백번 동의했다.

뭣하면 지금 당장 나가서 마을을 뒤져서라도 데려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만의 치료법이라도 알 수 없으려나요.”


“그런 게 따로 있을까.”


“그래도 전해져 오는 전통 같은 게 있지 않겠어요?”


반 생각 없이 던진 말에 하루의 맥없던 눈동자는 빛을 띠었다.

가만히 보고 있던 빈 천장에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기억인지 기록인지 모를 머릿속 자료들에 하루가 퍼뜩 상체를 바로 세웠다.


“노래.”


대뜸 중얼거린 단어에 셋은 천천히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살던 곳에선,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노래나 음악을 쓰기도 했어.”


“노래? 계기를 주려면 연관성이 있어야 했던 거 아니었어?”


“가사를 새로 써서······ 거기에 맞춰 음악을 만들면············”


말하다 말고 하루는 다시 침묵해야 했다.

자신이 꺼내면서도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미리 깨달아버렸다.

무엇보다 음악의 제작이라니.

여기에 그럴 만한 인재가 있을 리가.


“제 아내가 작곡할 줄 알긴 합니다.”


전부 포기하고 싶을 때 생각지도 못한 수확.


“하지만 가사는······.”


아론이 하루를 쳐다봤다.

지아와 줄리엣도 그의 시선을 쫓았다.


애써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려던 하루의 고개를 지아가 양손으로 붙잡았다.


“어차피 아저씨 말고는 주민들의 특징을 알만한 인물이 없잖아요.”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 싶다.

속으로 한숨을 크게 내쉴 때 아론은 이미 서랍에서 명단 하나를 꺼내왔다.


“일단 근처 마을까지 포함된 명단입니다. 새 주민이 생겨날 때마다 꾸준히 모으긴 했습니다만, 전부 있다고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발뺌하던 때는 언제고 이젠 완전히 이 의견에 오른 모양이다.


“남는 주민이 있으면, 그건 그때 생각하면 되겠지.”


하루가 명단을 펼쳤다.

중복된 종족들도 많아, 정리해보면 생각보다 터무니없는 수는 아니다.

처음부터 개개인보다 종족별로 묶어 생각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이번 축제를 최대한 활용하는 게 좋을지도.”


조금씩 의견이 더해지면 문득 그런 생각까지 도달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가사에 전부 욱여넣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피로하면 될 뿐이었다.


“연극도 괜찮겠어요.”


지아를 시작으로 더욱 많은 의견이 보태진다.


“아론, 주민들의 도움도 필요하겠어.”


“축제를 더 고조시키려고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이니까, 아마 흔쾌히 협조할 겁니다.”


그 답을 들은 이후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눈치채고 보면 아론의 부인이 어느새 붙어있고, 축제준비를 하던 이들이 차례차례 옆으로, 옆으로 붙었다.

거실은 순식간에 인파가 가득했다.

누구의 목소린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열띤 토론이 잇따랐다.


어쩌다 축제의 위원회 같은 형태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하루는 심취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띠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지금의 기분이 뭐였는지.

스스로 몇 번을 더 되뇌어도 알 수가 없다.

단지 지금부터가 축제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


“곧 연극이 시작합니다!”


호객꾼이 외치는 쪽으로 일부 인원들이 몰린다.


“음? 이거 설마 우리 얘기 아니야?”


서로 호기심을 갖는 종족들도 있었다.

거리는 뭣하나 할 것 없이 호황이다.

먹거리나 놀잇거리를 주로 한 점포들에서도 호객행위는 이어졌다.


하루는 전망대에 올라 지그시 그런 광경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본인이 만든 축제라고 생각하면, 새삼 시야엔 조금 더 색다르게 비춘다.


문득 저 밑에 있는 지아와 줄리엣을 발견했다.

한창 만끽하는 건지, 둘의 들뜬 발걸음을 눈으로 쫓고 있으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슨 짓을 해주신 건가요.”


시비인지 질문인지 모를 말이었지만, 딱히 추궁하는 억양은 아니었다.

별 반응하지 않고 틀에 기대고 있자니, 천천히 다가오는 발소리는 제 옆에서 멈췄다.


힐긋 눈동자를 돌리면 디아블이 그곳에 있었다.


“올 줄 몰랐는데.”


“평소하고 명백히 다른 느낌이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이제까지 하곤 다른 축제네요.”


달라진 거라곤 단지 인간과 그 일행 몇이 있다는 것뿐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달라질 일인 건가.

디아블은 의심하면서도 눈앞의 변화를 충분히 새기고 있었다.


“당신은 뭡니까.”


대뜸 그렇게 물어오는 디아블을 다시 힐긋 쳐다봤다.


디아블의 시선은 여전히 거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거리에 있는 인원들 하나하나를 쫓아 움직이고 있다.


“대체 뭔데 저들의 이야기를 전부 알고 있는 겁니까.”


그럼 하루도 그가 저들이라 칭한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마주쳤는지도 모를 얼굴들.

그리고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 사라졌을지 모를 얼굴들.

이 세계에서 처음 자신을 주운 그처럼 신기하게도 아직 새겨져 있다.


“딱히 중요한 건 아니잖아.”


반박할 수 없을 정론이다.

디아블이 피식 웃는다.


제 옆에 있는 남자가 누구든 이 상황을 감히 막을 순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고 여겼다.

제 혈육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말 것이었다.


저 인파 속에서 용케도 찾아냈다.

디아블은 정말 오랜만에 아론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일부 지역에선 사라지는 인원들의 목격담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


“당황하던 자들도 이젠 아무렇지 않게 축제를 즐기고 있습니다.”


“아, 그래.”


“제 짓이란 건 이미 알고 있잖습니까. 왜 그랬는지 묻지 않는 겁니까.”


“곧 클라이막스가 시작될 거야.”


갑작스럽게 무슨 얘기를 하나 싶으면, 하루는 어째선지 태양을 찡그린 눈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디아블이 그를 따라 일몰인지 일출인지 알 수 없는 형태를 본다.

이윽고 햇빛 때문에 잠시 움찔하던 미간의 주름이 조금 더 깊어진다.


묘한 위화감을 확인하기도 전에,


“안 가봐도 되겠냐.”


하루는 다시금 디아블을 향해 던졌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파악할 새도 없이 디아블은 입을 슬쩍 벌렸다 다물었다.

이후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내려갔다.


혼자 남은 전망대에서 하루는 이번엔 고개를 들었다.

슬금슬금 드리우는 보랏빛과 자줏빛의 경계가 이제야 정체를 확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일몰이었냐.”


키이잉──


축제의 거리 곳곳에서 스피커의 날카로운 노이즈가 울려 퍼진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했을 때 거리는 순식간에 적막이 드리우고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지아와 줄리엣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다.

두 얼굴에 미소가 감돌면, 어디선가 낯선 전주가 깔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아련한, 또 누군가는 서러운 기억을 되살리는 운율은 음악에 얹혀 첫 마디를 떼었다.


한곳에 머문 이몽(異夢)이 떠오른다.

공통된 단 하나의 결과만이 그들이 지나온 울분을 덜어내리라.


종전.

한때 혈육의 존속만이 소망이었던 그들은 이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다음 세대에 이상을 맡기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어떤 짐을 덜어내지도, 맡기지도 않은 채 털어냈다.

사실은 그저, 이번에야말로 축제를 즐겼던 것뿐일지 모른다.


“형님.”


아론은 그 와중에 생각지도 못했던 한마디를 들었다.

다시 한번 녀석의 입으로 들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던 한때도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녀석의 얼굴을 마주하니,


“미안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짐은 무겁기 그지없었다는 걸, 잊고 있었어.”


이미 오래전 내었어야 할 한 마디만 튀어나왔다.


디아블의 굳게 닫힌 입술이 떼어졌다 붙었다 몇 번 반복했다.

뒤늦게 크게 떼어졌을 땐, 이미 그가 뿌연 별빛이 되어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해가 진다.

곳곳에서 흩어지던 혼의 조각들은 노래가 끝나기 직전까지도 오랫동안 잊혔던 밤을 메워갔다.


디아블이 턱을 들고 한동안 제자리에 있었다.

열린 입은 이제 누굴 향해 내어야 하는지 방황했다.

그렇게 한참을 또 헤매던 숨을 삼키고 내뱉는다.


“끝까지 치사하다. 사과 한마디 정도는 듣고 가라고···.”


스피커에서 마지막 구절을 읊던 가수의 목소리마저 은은하게 사라져 간다.


섬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방금의 축제가 정말이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하루가 멀리서 다가오는 지아와 줄리엣을 발견했다.

그리고 옆에서 다가오던 디아블도.


그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자니, 그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하루는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섬을 나와 자신들이 고정해둔 나룻배로 따라올 때까지도.


그러다 오르기 전 물었다.


“갈 거냐. 아직 남은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다시 봐도 선착장인지 뭔지 모를 다리 위에 다다라서야 디아블은 뒤돌았다.


“아······.”


지아가 먼저 반응하며 음을 흘린다.

그녀의 반응에 하루가 고개를 들어 보면, 섬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거대한 혼이 떠나가는 것처럼.


디아블이 다시 하루에게 보란 듯이 고갯짓으로 섬을 가리킨다.


운이 좋았다.

그들이 우연히 축제를 안식의 방식으로 삼고 있던 점이나 그런 행사가 주는 분위기, 기타의 요인들은 틀림없이 지금의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쩌면 디아블도 그 요인들에 가담했을지 모를 일이지만, 하루는 구태여 입에 담지 않고 배에 올랐다.

디아블의 시선이 섬에 박혀 움직이지 않는다.


노를 젓기 시작하자, 그에 맞춰 방금 딛고 있던 섬의 바닥까지 사라져 갔다.

방금까지 축제가 벌어진 곳인지 의심할 만큼 흔적도 없이.


그건, 간절한 자의 꿈이 기록된 신기루였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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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177. 가설 22.01.04 50 2 13쪽
177 #176. 심연 22.01.03 44 2 12쪽
176 #175. 주인 21.12.31 43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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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172. 재회 21.12.28 48 2 12쪽
172 #171. 인계 21.12.27 48 2 12쪽
171 #170. 다시, 21.12.24 53 2 12쪽
» #169. 신기루 21.12.23 52 2 13쪽
169 #168. 안식 21.12.22 48 2 13쪽
168 #167. 축제 준비 21.12.21 55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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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164. 불가사의 21.12.16 49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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