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커: 15. 놈 아닌 놈 1
지구가 멈추지 않는 한 트럭은 달린다.
울프의 트럭도 달린다.
뜨거운 모래바람을 맞으며 모하비 사막을 달리고 눈 덮인 스노퀄미 패스를 넘었다.
쉐난도우 계곡을 관통하고 스모키 마운틴을 지났다.
미시시피 강을 건너고 걸프 만을 따라 운전 했다.
그레이트 레이크를 일주하고 엘로우스톤 리버를 지나 데블스 타워를 올랐다.
울프의 고독한 트럭운전은 계속 되고 새로 시작을 꿈꾸며 찾아오는 운전사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는다.
트레이닝도 2주마다 새로운 트레이니를 만나 같은 교육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었다.
한심한 놈, 지저분한 놈, 웃기는 놈, 놈들도 점점 잊혀지고 바보 같은 놈 허버트도 내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 희미해지고 있을 무렵, 나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전무후무한 초보 운전사를 만나게 되었다.
월요일 아침, 3일간의 휴식을 마치고 다시 2주간의 운행에 나서는 날이다.
회사에 도착하여 내 트럭에 라면, 쌀, 물, 옷가방, 컴퓨터가방, 카메라 등 준비물을 옮겨 싣고 와이프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항상 그랬다. 내가 운행을 떠나는 날은 아내는 안절부절 못하고 서운해 한다. 마치 내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가는 것처럼 발길을 차마 돌리지 못하고 돌아보고 또 돌아 본다.
손을 흔들며 안녕이란 작별인사를 하고 또 한다.
“걱정 마, 잘 갔다가 올게, 이메일과 메신저를 꼭꼭 확인해, 내가 메시지 남길 테니까 알았지?”
“그래, 잘 갔다 와. 안녕!”
꼬옥 안아주고 아내의 뺨에 키스를 해 주었다.
이번 트레이니는 또 누구일까 생각하면서 회사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사무실 쪽에서 한 사람이 내 트럭 쪽으로 걸어왔다.
구질구질한 청바지가 바닥을 질질 끌렸고 검은 가죽잠바가 눈부신 햇살에 반사되었다. 핑크빛 야구 모자를 꾹 눌러썼는데 그 옆으로 금빛 머리칼이 펄럭였다.
나를 향해 정면으로 걸어왔다.
아내도 뭔가 예감이 심상치 않았는지 가다 말고 저만치 서 있었다.
금발머리?
여자??
설마???
여자 초보 운전사????
그럴 리가??????
불안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안녕하세요, 울프님이세요?”
“그렇습니다만”
“제 트레이너시군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저는 티나 라고 합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악수를 청 했다.
나는 손을 내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와이프가 서 있는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아내가 큰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일이야? 트레이니가 이 여자래? 당장 안 된다고 해!, 어떻게 말도 안 돼!”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 좁은 트럭 안에서 처음 보는 서양여자와 함께 먹고 함께 자고 다닌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2주 동안이나······., 나야 못 할 이유는 없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잠깐만 기다려요. 나 사무실 좀 갔다 올 테니까”
금발여자에게 말을 남기고 사무실 쪽으로 갔다. 아내가 내 뒤를 따라 오면서 분개했다.
“미쳤어! 무슨 여자 트레이니를 데리고 가라고 해? 당장 안 된다고 해! 당장! 웃기는 사람들이야 정말”
“그러게말야, 나도 여자 트레이니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내가 지금 매니저를 만나서 안 된다고 말 할게”
바로 매니저의 문을 두드렸다.
“하이! 토마스, 할 이야기가 있다”
“헤이 헤이, 울프 무슨 일이냐?”
“이번에는 트레이니를 데리고 나갈 수 없다.”
“왜?”
“보면 모르냐? 여자라는 말은 안했잖아?”
“왜 여자는 안 되냐?
“나는 상관없는데 아내가 허락 않는다.”
“어? 그래! 그럼 안 되지 당장 취소할게, 이번 운행은 트레이니 없이 그냥 가라.”
“나는 그 여자에게 직접 말하기 곤란하니 토마스, 네가 직접 그 여자에게 말해라. 그리고 앞으로도 여자 트레이니는 절대 안 된다.”
“알았다. 걱정 마”
나는 다시 아내에게 돌아 왔다.
”어떻게 됐어? 안된다고 했어?”
“그래 말 했어. 이번에는 트레이니 없이 나 혼자 가게 됐다”
“매니저란 놈 미친놈이야! 어떻게 남자에게 여자를 붙여줘?”
아내는 분이 안 풀렸는지 씩씩 댔다.
“걱정 하지 마. 앞으로도 절대 안 된다고 했으니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그럼, 이번에는 혼자 심심하겠다. 자기”
“잘 됐지 뭐, 혼자 조용하게 클래식 음악이나 감상하면서 다녀야지. 자 그럼 갔다 올 게”
“그럼, 저 여자는 어떻게 돼?”
“모르지, 다른 트레이너가 데리고 나가든지, 지금 트레이너가 없으면 누가 데리고 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될 거야”
“응, 그렇게 되는구나!”
이때, 그 금발머리의 여자가 우리 쪽으로 왔다. 우리는 대화를 멈추고 그녀가 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까이 와서야 그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수수한 얼굴에 몸은 통통한 편이고 예쁘다고는 할 수 없고 억척스런 시장 아줌마 같은 인상이었다.
청바지에 가죽 재킷을 걸쳐서 멀리서 볼 때는 사내 녀석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톰보이 같은 스타일 이였다. 핑크빛 야구모자와 그 옆으로 길게 날리는 곱슬곱슬한 금발 머리칼만 아니면 영락없는 남자다. 나이는 40이 좀 넘어 보였다.
“울프님! 저 좀 데리고 가 주세요. 부탁입니다”
이미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린 듯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해 왔다.
“음, 미안하지만 나는 안 되겠소”
내가 대답하자마자 아내가 바로 말을 이었다.
“안 돼요. 안 돼!”
“왜 안 되죠?”
그녀가 반문 했다.
“당신은 여자잖소”
“나는 2주 동안이나 트레이너를 기다렸어요. 또 언제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요.”
나는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설득해야 할 상대가 내가 아니고 아내임을 알았는지 아내에게 매달렸다.
“나는 이 직업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직업을 그만두고 트럭운전 배우느라 여러 달을 쉬어서 나의 경제사정이 아주 나빠요. 집 몰게지도 갚아야 하고 각종 세금 공과금도 내야하고 잘못하면 집도 뺏기게 됩니다.”
“그래도 안돼요.”
아내는 조금은 누그러진 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아내를 정면으로 보면서 말을 이었다.
“절대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약속할 수 있어요.”
나는 난감했다. 그녀는 나와 아내를 번갈아 살피더니 차분한 어조로 말 했다.
“저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16살짜리 딸이 하나 있는 싱글 맘이랍니다. 딸 하나 키우며 사는 게 제 행복입니다. 이제 내년이면 대학에 가는데 학비도 준비해야 하고 걱정이 태산입니다. 저는 꼭 이 직장이 필요해요. 다시 부탁할게요. 저를 트레이닝 시켜주세요. 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나는 아내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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