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커: 12. 지저분한 놈 5
북미에서의 트럭운전은 매일 모르는 곳을 찾아다녀야 하므로 트립플랜을 잘 짜야 합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 하이웨이 번호, 엑싯넘버, 마일 마커, 도시이름, 트럭 주유소 위치, 트럭 검사소, 도로이름 및 방향 등등······.
나는 종이에 자세한 길 안내를 써서 앞에 대시보드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럼 이놈이 그걸 보고 길을 찾아가기 쉽게 하려는 배려지요.
물론 잘못 들어가고 턴해야 할 곳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초보들이 제일 많이 하는 실수입니다.
경력이 오래된 저도 종종 길을 잃어버립니다.
북미 대륙의 트럭운전사는 길을 잃거나 늦게 도착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길은 누구나 잘 못 들어갈 수 있는 거다. 더 중요한 것은 잘못 들어가거나 방향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안전하게 제 길을 찾아서 돌아올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워낙 말이 없는 놈이라 대답도 없습니다만 잘해 보기로 마음먹은 이상 열심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아침 청소하면서 트럭을 샅샅이 뒤져서 마침내 침대 한쪽 구석에 떨어진 선글라스 찾아 주었더니 이놈 기분이 좋은 모양입니다. 운전 열심히 잘하고 있습니다.
그걸 보니 나도 기분 좋습니다.
오늘따라 길도 잘 찾아가고 있네요.
‘어! 이상하다?’
내가 길 안내를 써서 대시보드에 붙여 준다는 것을 깜빡 잊었네요.
그런데 제대로 잘 찾아가고 있어요.
“너,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
“예스.”
자신 있게 대답하네요.
“어떻게 아냐? 너 나하고는 여기 처음 가는 곳인데.”
“전에 간 적이 있는 곳이다.”
“언제?”
“한 달 전에.”
“누구랑.”
“다른 트레이너랑.”
“뭐 다른 트레이너? 너 그럼 전에도 트레이닝을 받은 거야?”
“그랬지, 한 달 동안."
맙소사!
뒤로 자빠집니다.
그러니까 이놈은 왕초보가 아니라 이미 트레이닝을 받은 놈입니다.
그것도 한 달씩이나 배웠다는 놈이···
도대체 뭘 배운 거지?
트레이닝은 보통 2주에서 4주 정도 걸립니다. 트레이너가 합격점수를 주어야 비로소 트럭을 배정받고 정식으로 솔로 트럭 드라이버가 됩니다.
이놈은 저에게 오기 전에 이미 트레이닝을 한번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놈을 재 트레이닝을 받게 하려고 작정하고 있었는데 그러면 이놈은 트레이닝만 3번, 무려 석 달 동안 받게 되겠군요.
어쨌든 할 말 없습니다.
다시 또 신경질이 슬슬 돋아나네요.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선글라스 찾아 준 게 후회가 됩니다.
아니 이미 트레이닝을 한 달이나 받은 놈이 이따위입니까?
누가 제발 좀 이놈을 말려 주세요!
정말 못 말리는 놈입니다.
드디어 여섯 번째입니다.
오늘 또 트레일러 문도 안 열고 닥에 댔습니다.
지게차 운전사가 악을 쓰듯 소리칩니다.
이놈은 다시 앞으로 트럭을 빼고 나서 뒤로 너털너털 걸어갑니다. 역시나 다시 돌아옵니다.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빈손으로 갔습니다.
볼트 커터 꺼내야지요. 제 손가락만 한 굵기의 강철 볼트가 채워져 있는데···
그냥 이빨로 물어뜯으라고 할까요?
-트레일러 문 안 열고 닥에 대기
이미 세계 신기록을 달성했을 것입니다. 기네스북을 뒤져봐야 하겠습니다.
월마트에 괜히 데려갔습니다.
이것저것 사더니만 이제 비닐 백, 빵, 먹고 버린 칩스봉지,
바닥에 퍼질러 놓습니다.
쓰레기통이 트럭 바닥으로 이사 왔습니다.
도대체 이놈을 어찌해야 합니까요?
제 물건은 단 하나도 없고 몽땅 그놈 물건들입니다.
그놈이 먹는 빵도 그냥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습니다.
처먹고, 흘리고, 밟고, 비닐봉지, 장갑······.그냥 바닥에 버리고.
저는 장갑은 항상 트럭 뒤에 있는 툴박스에 넣습니다.
기름 묻은 장갑이 실내를 더럽히니까요.
이놈 첫날에 '장갑은 툴박스에 넣어라.' 일렀건만 딱 그때 한번 넣고는 그 후부터 내내 트럭 바닥에 놓습니다.
‘시동을 끄면 라이트도 꺼라.’ 했건만 10번도 넘게 못 하고 있어요.
배터리 죽이기로 맘먹은 놈입니다.
아침에 세 번째 대청소를 했습니다.
바닥엔 땅콩 잼 같은 것이 찐득하게 붙어 있어서 드라이버로 긁어내야 했습니다.
18!, 18!,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소리입니다.
(참고로 트럭과 트레일러 타이어는 모두 18개입니다.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미친놈 처럼 중얼거리면서 트럭 바닥을 깨끗하게 물걸레질해서 닦았습니다.
레몬 향기 세척제로 얼룩까지 지웠고요 .
그놈 물건도 정리해서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고 깨끗합니다.
그러고 나서 잠깐 화장실 갔다 오는 사이, 정확하게 5분 만에, 벌써 그 녀석의 지도하고 바인더가 바닥에 굴러다닙니다.
한국인 트럭커의 자존심을 건 인내심에도 이미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은근과 끈기의 민족의 후손이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아! 그리고 이놈 뒷모습을 보니까 생각났어요.
덤 앤드 더머(Dumb and Dumber)에 나오는 친구들,
거 있잖아요, 짐 캐리 말고 그 파트너, 제프 다니엘스
딱 그놈입니다.
생긴 것도 그놈, 어기적어기적 똥 싼 바지 입고 걷는 폼도 그놈 딱 맞습니다. 딱! 그놈!
더머(Dumber)
덤 애스(Dumb Ass)
어제 기둥뿌리 붙잡고 나 스스로 찌질 한 놈이라고 반성한 거 전격 취소합니다.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지저분한 놈,
이제 끝입니다.
오늘이 이놈과 함께하는 마지막 밤입니다.
그놈의 선글라스가 또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제 눈에 보이지 뭡니까?
마침 그놈은 화장실 가고 없습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지요.
‘투드득’
징이 박힌 안전화로 지그시 밟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더 확인 사살까지!
‘뿌직!’
지난 2주 동안 쌓이고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방에 화~악 날아가는 소리입니다.
이제 내일 아침에 오리발 내미는 일만 남았습니다.
오늘 밤은 드디어 잠이 잘 올 거 같네요,
여러분 모두에게도 좋은 밤 되세요.
ㅋㅋㅋㅋㅋㅋ······.
이상 성질 더럽고 고약한 북미의 트럭커,
울프의 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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