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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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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최근연재일 :
2024.06.22 18:58
연재수 :
20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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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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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9.09.1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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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글자
26쪽

122. 사냥개와 들개들 (3)

DUMMY

후반전에도 양 팀의 승부는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점수를 더 벌려내느냐,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느냐. 기세를 잡으려는 한 방 싸움이 필드에서 벌어지는 동안 터치라인 바깥에서는 두 감독이 격식 있게 정장을 차려입고 나란히 서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다.


현 스코티시 내에서 가장 뜨거운 더비를 잘 나타내주는 장면이었다.


“좋지 않아.”


인버네스 CT 감독, 스티브 클라크는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전반에 승부를 결정지을 수도 있었는데 막판에 터진 로스 카운티 주장의 강력한 프리킥이 그들을 절망 속에서 구원해 냈다. 이제는 역전에 혈안이 되어 강하게 밀어붙여 온다.


겉으로는 팽팽해 보이지만 미묘하게 밀리고 있다.


“왼쪽에 마크를 계속 놓치잖아! 정신 차려!”


코치진도 사태를 파악했는지 벤치에서 나와 선수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분명 이 판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우리인데.’


라인을 내려 앉혀 진형을 견고하게 갖추고 있으면 결국엔 초조해져서 전반에 역습을 허용했던 그때처럼 허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클라크였으나 상대가 사기를 완전히 회복하여 공격을 연거푸 퍼붓는 지금의 상황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축구는 흐름의 스포츠. 버텨내다 보면 인버네스 쪽으로 턴이 돌아오겠지만, 버티지 못한다면 경기 종료까지 휘둘리게 될지도 모른다.


‘변화를 주어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유지?’


클라크의 두뇌는 갈등으로 끊임없이 회전했다. 후반 시작 후 이렇다 할 공격도 없이 십 분여 내내 공격만 받아내고 있으니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그 순간.


삐익 -


주심이 휘슬을 길게 불면서 파울이 발생한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공격을 끊어낸 인버네스가 간만에 중앙선을 넘어 패스를 찔러주던 과정에서 폰투스 얀손이 아론 도란의 볼을 끊어내는 걸 보고서 말이다.


몸이 돌아 있을 때 뒤에서 덮치긴 했지만, 정확히 볼을 먼저 건드렸기에 정당한 몸싸움으로 봐도 이상할 게 없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마크 라일리(Mark Reilly) 주심은 더비전의 격렬한 분위기에 휘말려 버린 것인지,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하는 도란의 액션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경기장을 발칵 뒤집는 선택을 내리고 말았다.


“레드카드!”


클라크는 주심의 손에 들려있는 빨간색의 물질을 보고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경고 누적 퇴장. 얀손은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기만 했고, 도리어 로스 카운티 선수들이 주심을 에워싸면서 항의하는 중이었다. 거기에 인버네스 선수들까지 뒤엉키면서 필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오늘은 여러모로 운이 좋은데.”


전반에는 페널티킥 파울을 얻었고, 이번에는 상대의 핵심 수비수가 퇴장 처리를 받았다. 이쯤 되면 축구의 여신이 승리하라고 떠밀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홈팀 스탠드에서는 이 모든 것을 가능케 만든 선수를 찬양하기 위해 두 개의 단어를 묶어서 빠른 템포로 힘차게 연호하고 있었다.


숫사슴 -

사냥꾼 -


칼레 시슬 킬러라는 거슬리는 호칭에 대응하려는 목적으로 인버네스 팬들이 만든 아론 도란의 별명, 숫사슴 사냥꾼(Stag Hunter). 당연히 로스 카운티의 상징을 저격한 것이다.


하일랜드 더비에서 빛나는 건 제임스 블랜차드만 있는 게 아니다. 숫사슴 놈들을 벌벌 떨게 할 선수는 우리도 가지고 있다. 그런 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엔 이만한 방법이 없다.


이어서 그들은 벤치에 잠자코 앉아 있는 칼레 시슬 킬러를 조롱하기 시작하면서 더비전의 묘미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분위기가 인버네스 쪽으로 넘어왔다는 얘기다.


“역시 수비를 투입할 수밖에 없겠지.”


로스 카운티에서 내린 결정은 에드빈 데 루어를 불러들이고, 대니 패터슨을 얀손의 자리에 채워 넣는 것이었다. 퇴장으로 수세가 불리해졌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제 상대도 수비적으로 나오면서 기회를 노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인버네스로서는 좀 더 경기 운영에 여유가 생기게 될 테고 말이다.


터엉 -


그러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굉음에 클라크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브리튼이 날린 회심의 중거리 슛이 골대를 강타하면서 뒤로 넘어간 것이다. 먼저 위협적인 공격을 시도한 건 열 명이 뛰고 있는 팀이었다.


“괜찮아,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거야! 저쪽 8번, 오늘 킥 감각이 유독 좋으니까 공간을 내주지 마!”


코치진들은 브리튼을 지적하고 있었지만, 클라크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라인을 안 내리겠다고?’


예상과 달리 로스 카운티는 수비적으로 나오기는커녕 오히려 아까보다 더 과감히 올라와 응수하고 있다. 조금 전의 중거리 슛도 라인을 끌어올렸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마지막 발악? 정말로 그런 걸까? 어차피 지금 점수는 뒤처져있으니 공격에 계속 투자할 수밖에 없다는 건가? 단순히 그런 의도가 아니라 뭔가 꿍꿍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온갖 생각이 맴돌았지만, 클라크는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이럴수록 우리는 침착하게 잘 지켜내기만 하면 돼. 저렇게 저돌적으로 나오면 오히려 뒷공간을 공략하기에는 더 수월하지.”


그러면서 흘러가는 필드의 상황을 조용히 훑어보았다. 로스 카운티가 과감히 라인을 올린 탓인지, 얀손의 퇴장으로 분위기가 과열된 탓인지 중앙에서의 볼 다툼은 더 거칠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도 한 명이 부족하니 공격은 확실히 전보다 무뎌진 모습이다.


“음?”


한동안 열심히 관찰하던 클라크는 뭔가 미심쩍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설마.”


그러다 문득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러셀! 지금 바로 리치를 준비 시켜. 바로 나올 수 있게······.”


서둘러 수석코치에게 지시를 내렸지만 수정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두 선수가 떨어지는 공중볼을 받으려다가 서로 부딪치며 쓰러지고 또 다른 선수들이 달려들면서 쟁취하려고 몸을 던지는 치열한 중앙 장악 다툼.


끝내 볼을 잡아낸 건 제임스 빈센트였는데, 어느새 아래까지 내려온 에이든 딩월이 힘껏 어깨로 밀어내면서 가로채는 부분까지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볼을 빼앗긴 빈센트가 다시 쫓아가면서 슬라이딩 태클로 딩월을 쓰러뜨리자 그걸 앞에서 보고 있던 케틀웰이 격분하여 그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치는 걸 발단으로 양 팀의 쌓여있던 감정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너 내가 똑똑히 봤어. 발을 보고 들어갔잖아, 더러운 자식아!”


“더러운 건 진즉에 퇴장당한 네놈들 수비수고!”


다행히 흥분한 쪽보다 뜯어말리는 선수가 더 많아서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는 사건이다. 사태가 진정되자 주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먼저 격한 말다툼을 벌였던 케틀웰에게 옐로카드를 꺼내 보였다.


“이런.”


클라크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다음으로 주심이 보고 있는 선수는 빈센트였고, 얀손 때와 마찬가지로 옐로카드와 함께 교차로 들어 올린 레드카드가 정확히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


“정말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닐 스튜어트가 외쳤다.


“라인을 올려서 맞불을 놓은 게 제대로 효과를 보았습니다!”


“경기가 과열될수록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선수는 저도 모르게 거칠어지기 마련이지.”


델 레오네가 웃으며 말했다.


“중앙 싸움을 유도해서 전반에 받았던 빈센트의 옐로카드를 좀 더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군. 하지만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네, 닐. 여전히 앞서고 있는 건 저쪽이니까. 이제 서둘러 다음 작전으로 나가야 해.”


감독은 필드를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대니가 왼쪽 센터백에 자리해 있고, 서로 퇴장을 주고받은 상태······ 상대 중앙 미드필더는 둘······.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할 거야.”


그러기를 마치자 곧장 스튜어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임스를 준비 시켜 주게.”


*******


후반 65분.


어쩌면 원정팬들이 가장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을 선수가 벤치에서 일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환호가 쏟아졌다. 반대로 홈팬들은 엄지를 거꾸로 내리면서 야유를 퍼부어댔다.


스코틀랜드에서 최고로 핫한 신예, 제임스 블랜차드의 등장만으로도 경기장이 크게 들썩이고 있었다.


이탈리안 감독은 유니폼을 추스르며 터치라인에 선 블랜차드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한 채 은밀히 뭔가를 말하고 있었는데, 전술에 대한 지시를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필드를 나올 선수로 지명받은 건 소피앙 부팔이었고, 두 선수는 한 번 서로를 가볍게 포옹한 뒤 교체를 진행했다.


마침내 로스 카운티의 10번이 필드에 들어서자 다시 한번 크게 함성이 일었다.



후반 70분.


다시 숫자가 동등해진 로스 카운티에게 거리낄 것은 없었다. 그들은 더 과감히 골문을 두들겼고, 갑자기 분위기가 뒤집어져 버린 인버네스는 막기 급급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델 레오네의 전략은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수비적으로 움직이던 리 월리스가 넓게 퍼져서 공격에 가담하는 방식. 그 말은 곧 블랜차드가 제일 익숙하고 잘 할 수 있는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는 변화를 안 주는 건가?’


인버네스의 선수들은 벤치 쪽을 계속 흘끔거렸다.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 변화를 줄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어떻게 변화를 주어야 할지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사령탑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선수들도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의 집중력이 일순간 흐트러질 때쯤이었다.


아메드 델샤드 쪽에서 길게 좌측 대각선으로 내지른 롱볼이 인버네스의 중앙을 단번에 넘기며 나아가고 있었다.


“수비진, 뭐해!”


인버네스의 벤치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 패스에 맞춰 절묘한 타이밍으로 오프사이드 라인을 허물며 뒤로 빠져나간 블랜차드를 수비보다 먼저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 쪽으로 떨어지는 볼을 가슴으로 받아내며 땅으로 떨어뜨린 뒤 한 번 길게 치고 나갔다. 그나마 빠르게 알아채며 뒤따라간 수비수는 옷자락을 붙잡아보려 했으나 스텝이 꼬여버리는 바람에 잔디에 나뒹굴고 말았다.


순식간에 발생한 단독 찬스. 트워드지크 골키퍼가 황급히 달려 나왔으나 상대는 득점 순위 10위권에서 놀고 있는 미드필더였다. 무성의하게 내지른듯한 땅볼 슛이 키퍼의 가랑이를 통과하여 그물을 흔들어냈다.


기어이 터져 나온 동점 골에 원정팀 스탠드는 흥분의 도가니로 휩싸였다.



후반 75분.


경기는 난타전의 흐름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점수를 지키기 위해 소극적인 운영으로 나오던 인버네스도 더 이상 방패에 몸을 가리고만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양 팀의 그 누구도 무승부에 만족할 이는 없었다. 과감하게 공격을 시도하는 도중 잦은 턴 오버가 연달아 나오면서 뺏고 뺏기는 숨 막히는 전투가 필드에서 벌어졌다.


순수하게 축구팬으로서 즐기러 온 사람들은 그저 재미있어할 뿐이었지만, 한 팀을 진지하게 응원하는 서포터들은 심장 떨리는 순간의 반복이었다.


철썩 -


다시 팽팽한 균형의 실이 끊어졌고, 먼저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건 인버네스 쪽이었다.


측면으로 빠져서 패스를 받은 도란이 뒤따라온 패터슨을 드리블로 돌파하며 크로스를 낮게 깔아주었고, 쇄도하던 코너 페퍼가 발에 먼저 맞추면서 다시 점수를 앞서나갔다.


3 : 2


시건방진 원정단의 콧등을 찍어 누른 인버네스의 팬들이 다시 ‘숫사슴 사냥꾼’을 연호하며 블랜차드를 조롱해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로스 카운티의 팬들은 이를 갈며 분을 삭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짜 제임스(Fake James) -

가짜 제임스(Fake James) -


이제는 아예 블랜차드가 볼을 잡을 때마다 시끄럽게 야유를 퍼부어대기까지 했다.


그리고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우와아 -


이번에 환호를 지른 건 원정 스탠드 쪽이었다.


오버래핑해 올라간 리 월리스가 수비를 붙이기 모호한 위치에서 얼리 크로스를 크게 올렸고, 높이 휘어져 멀리 날아간 볼을 블랜차드가 미사일처럼 몸을 던지며 강력한 다이빙 헤더로 그물에 꽂아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더니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홈팀 스탠드를 바라보며 전반에 빈센트가 했던 것처럼 손을 귀에 살며시 갖다 대고 인버네스 팬들을 도발하고 있었다.


“와핫! 저 녀석 역시 보통이 아니야. 하는 짓이 정말 마음에 든다니까!”


두 번의 근사한 동점 골을 넣고서 홈팬들까지 보기 좋게 한 방 먹이는 그 모습을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피터 블랙도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3 : 3



후반 80분.


로스 카운티는 실점의 빌미가 되긴 했지만 쉬지 않고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빈센트의 퇴장까지 유도해 낸 에이든 딩월을 벤치로 불러들였다.


마지막 카드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선발로 나올 때보다 교체로 들어오는 순간이 더 위협적인 공격수.


‘잭 마틴······.’


인버네스의 수비수들은 가뜩이나 쫓기는 기분이 들던 차에 그 절정을 찍어줄 9번이 필드에 진입하자 긴장으로 온몸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블랜차드가 발휘한 두 번의 영향력이 제법 여파가 컸던 때문일까. 로스 카운티의 사기는 완전히 되살아나 하늘을 찌를 듯했고, 인버네스 CT는 잠깐 다시 앞서갔을 때 기세등등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혼란에서 헤어 나오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벤치 쪽에서도 리치 포란을 투입하여 지친 미드필더를 바꿔준 것 외에는 별다른 해결책을 꺼내지 못하고 있으니 더욱 그런 듯했다.


한 번의 좋은 역습 찬스에서 라이언 크리스티가 시도한 슈팅이 마크 브라운 키퍼의 선방에 막혀 무산으로 돌아간 이후엔 계속 공격권을 상대에게 내주기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로스 카운티가 인버네스 진영에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해두었을 무렵.


다시 한번 델샤드의 대각선 롱패스가 높이 솟아올랐다.


라인이 깊게 밀려있어 아까처럼 뒷공간을 내주는 불상사는 모면할 수 있었지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번엔 직접 박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그 패스를 따라서 골문으로 맹렬히 쇄도하고 있는 건 블랜차드였다.


‘이건 내주면 안 돼!’


수비 한 명이 쫓아가며 속으로 부르짖었지만, 몸은 그의 생각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경합을 이겨내고 먼저 뛰어오른 블랜차드는 관자놀이를 갖다 대며 옆으로 토스하듯 볼을 넘겼고, 당연히 해트트릭을 노리고 직접 헤더 슛을 시도할 거라 생각하며 달려든 키퍼와 경합에 패배하여 필드에 주저앉은 수비수는 동시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노마크의 누군가가 달려와 다리를 뻗고 있었다. 수비들이 전부 잭 마틴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발 빠른 이 선수를 순간 놓쳐버린 것이 분명했다.


‘당했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일이었다. 블랜차드의 부드러운 패스를 받은 앤드류 톰슨은 발바닥으로 비어있는 골대에 밀어 넣으며 역전 골의 주인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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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버네스 CT 3 : 4 로스 카운티 >

제임스 빈센트(PK 21‘)

로스 드레이퍼(33‘)

코너 페퍼(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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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브리튼(40‘)

제임스 블랜차드(73‘, 78‘)

앤드류 톰슨(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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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델 레오네의 경기 후 인터뷰.


“블랜차드 선수가 오늘 경기를 뒤집어낸 것 같은데요.”


“오늘은 그의 독보적인 무대였습니다. 의심할 것도 없는 최고의 활약이었죠.”


“교체로 들어와서 세 개의 골이나 관여했으니까요. 이제는 명실상부한 칼레 시슬 킬러로 입증이 된 셈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를 다시 기용할 마음이 생기셨는지?”


“······그게 무슨 뜻이죠?”


“선발의 기준은 선수의 기량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요.”


“전술이 중요시되는 기준이라고 하면서 그를 주전으로 쓸 생각이 없음을 밝히셨고요.”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군요.”


감독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전 그를 안 쓴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만.”


“예? 하지만 델 레오네, 당신이 분명 그렇게······ 아니, 그런 뉘앙스로······.”


“뭔가 착각하신 모양입니다. 인터뷰 기록을 다시 살펴보십시오. 제가 정확하게 블랜차드를 기용하지 않겠다고 말한 내역이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전 그렇게 말한 기억이 없군요.”


질문하던 기자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뭐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기자들도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아니면 능청스럽게 연기하면서 바보로 만들려는 수작인지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인터뷰해온 내용은 전부 블랜차드의 기용 여부와 그의 기량을 두고 논해온 것들이지 않았는가? 굳이 말 안 해도 서로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고?


하지만 감독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그는 블랜차드를 쓰지 않겠다고 직접 말한 적은 없었으니까. 심적 증거는 있어도 물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뭐, 일단 넘어가죠. 다른 질문 있습니까?”


이탈리안은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


더비전이 끝나면 보통 희비가 크게 엇갈린다.


승기를 잡았다 확신하던 인버네스의 팬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에 넋이 나갔고, 이제 로스 카운티의 팬들이 가슴을 펴고 다닐 차례였다.


“블랜차드는 정말 대단한 선수야! 난 뭔가 해줄 거라 믿었다고!”


“아까는 그가 나와도 뒤집기는 힘들 것 같다고 했었잖아, 조지.”


“그······ 그랬나? 기분 좋은 날에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자고, 해리!”


조지 맥도넬의 펍 식구들도 이 축제를 즐기고 있던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 Scottish Sports ] 블랜차드에게 날아간 세 번의 공중볼이 승부를 짓다


[ The Scotsman ] 블랜차드의 맹활약, 여전히 로스 카운티 에이스임을 과시


[ Daily Telegraph ] 블랜차드의 입지가 높아지면서 감독은 고민에 빠졌다


[ Daily Mail ] 하일랜드 더비의 주역 블랜차드, 다시 셀틱으로 이적 추진 중



언론들은 대활약을 펼치며 MOM에 선정된 블랜차드를 집중 조명하는 쪽과 여전히 흔들어대려고 몸부림을 치는 쪽으로 나뉘어 보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TV를 통해 공개된 이후다. 블랜차드를 둘러싼 악성 루머들이 사실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탈리안의 인터뷰가.


“정말 속이 시원했습니다. 감독님의 한 마디에 회견장이 고요해지던 그 순간은.”


닐 스튜어트는 감독실에 들어오자마자 웃으며 그 얘기를 꺼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열심히 해명해봤자 악의를 품은 언론들은 어떻게든 음해하려 들겠지요. 그럴 거면 차라리 제임스에게 둘러싸인 루머를 이용해서 역으로 먹인다는 감독님의 판단이 옳았던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자 델 레오네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칭찬은 고맙네만, 자네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예? 아니었습니까?”


“내가 무엇을 얻자고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겠나?”


감독이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반대야. 제임스의 루머를 이용해서 언론을 먹이려던 게 아니라, 언론을 이용한 거지.”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좋아, 그럼 시간적 여유도 있으니 가볍게 설명해줄까.”


감독은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예전에 말한 적이 있지 않던가? 선수들은 소모품이 아니라 제각기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대하는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자고. 어떤 사람은 질타보다 칭찬해주고 감싸줄수록 더 자신감이 붙지. 반대로 오히려 그렇게 하면 나태해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당근을 주기보다 채찍을 가해야 자극을 받기도 해.”


감독이 계속 말했다.


“전자는 에이든이 대표적인 경우라네. 녀석은 의외로 보기보다 여려서 다그치면 주눅 들기만 하고, 더 실수가 잦아져. 쓰다듬어주어야 신이 나서 춤을 추는 타입이지. 그럼 반대로 나태해지는 타입은 누군지 알겠나?”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스튜어트는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바로 대니야. 붙임성이 없고, 윗사람을 많이 어려워하기 때문에 그 윗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아마 축구선수가 아니었다면 군인 같은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에게는 절대적인 상사의 느낌으로 접근하는 게 효율적이라네.”


칭찬이 효과적인 건 에이든 딩월, 반대로 나태해질 수 있는 대니 패터슨. 스튜어트는 이야기의 흐름상 마지막 남은 대상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독님은 제임스에게 자극을 주려고 언론을 이용하셨단 말씀이군요.”


“그 녀석은 승부욕의 화신이야.”


감독이 말했다.


“상대 수비가 걸어오는 트래시 토크나 관중들의 야유는 오히려 제임스의 훌륭한 자양분이 되어 주지. 자네도 보았지 않은가? 홈팬들을 향해 보였던 그 도발을. 녀석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골을 넣어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할 생각밖에 없었을 거야.”


“그러면 그들이 제임스를 더 크게 조롱할 수 있도록 그동안 판을 깔아두신 겁니까?”


“아니. 난 그저 언론을 부추겨서 제임스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기사를 양산하게 할 생각밖에 없었지.”


감독이 말했다.


“그 이후엔 에이든을 시켜서 제임스에게 계속 신문을 보여주도록 지시해 두었다네. 그 녀석의 깐족거림은 은근히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거든.”


“그 얘기는 에이든이 들으면 섭섭해할 거 같은데요······.”


“아무튼 내가 의도한 건 거기까지였는데. 칼레 시슬 팬들께서 손수 그의 승부욕을 불태워주더군. 고맙게도.”


감독은 잠깐 말을 멈추고 커피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제임스가 날 지나치게 따르기 때문이야.”


“그건 평소에도 느껴질 정도이긴 합니다.”


“선수가 감독을 따르는 건 바람직하지만, 내 말로는 어지간해선 자극받지 않는다는 부작용이 있지. 더군다나 실수를 잘 하지도 않아. 팀 내에서도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니 그걸 토대로 지지층만 점점 높아지고 있지. 채찍을 휘두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야.”


“휘두를 일이 없다면 오히려 좋은 것 아닐까요?”


“제임스의 경우는 아니네. 그건 맹수를 온실 속에 들여서 길들이는 꼴이지.”


이탈리안이 대답했다.


“녀석은 이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우리 선수들은 대체로 프로페셔널하긴 하지만 경험이 모자란 젊은 친구들은 아직 케어해줄 필요가 있어. 방치해두면 성장이 멈춰버릴 수도 있거든. 보이는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게 감독의 역할이고.”


스튜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외부의 압력, 특히 언론을 이용하셨다는 거군요.”


“이런 상황에서 언론은 쓸 만한 수단이지.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어. 그렇다고 먹혀서도 안 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써먹는 것이지.”


감독은 조소를 띤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들을 다루는 건 훨씬 간단해. 고기를 약간만 뜯어서 바닥에 던져주기만 하면 되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왼손에 커다란 고기를 잡고, 오른손으로 뜯어서 마치 모이를 뿌리듯이 던지는 시늉을 하였다.


“배부를 수는 없지만 잊지 못할 맛의 고기를 말이네. 그거 하나 주워 먹겠다고 죄다 몰려드는 진풍경을 볼 수 있지.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고기를 던져주었던 내 손만 쳐다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게 돼. 그래, 파블로프의 개처럼.”


“······.”


“고기를 받아먹기 위해 내가 뜻하는 대로 움직이는 충실한 개가 되는 거지.”


“예······.”


스튜어트는 감독에게서 잠깐 두려움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그가 적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깔려 있는 판에 제임스를 투입하기 전 녀석을 한층 성장시킬 몇 마디만 귀띔해주면 될 일이었네. 계획은 훌륭하게 마무리되었지.”


“그때 작전에 대해 지시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런 건 훈련 때 다 대비하지 않나? 급한 수정이 아니고서야 똑같은 말을 반복할 필요는 없지. 난 그저 동기를 부여해준 것뿐이야. 다만 단순히 자극적인 말은 소용이 없기에 녀석만을 위한 메시지를 전달해주어야 했지.”


“그게 어떤······.”


“궁금한가?”


감독은 스튜어트에게 다가가 블랜차드에게 했던 것처럼 팔을 어깨에 걸치더니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언론에서 내가 떠든 말들은 전부 사실이야. 난 자네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아. 하지만 가진 재능은 언젠가 특별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지. 우선 저기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이웃들을 잠재우고 와. 그리고 내가 컨퍼런스에서 했던 말을 명심해.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활약을 보일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그 얘기를 말이야.”


“······.”


“이렇게 말했다네.”


“그······ 렇군요.”


스튜어트는 아직도 어깨에 얹힌 감독의 팔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제각기 다른 선수들의 개성을 파악하여 그에 맞는 방식으로 일일이 다루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악성 기사를 뽑아내는 언론들까지 손아귀에 놓고서 주무르려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냥개와 들개들······.’


불현듯 두 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주인의 말을 충직하게 따르는 사냥개와 호전적인 태도로 호시탐탐 목덜미를 노리는 들개 무리.


왜 갑자기 그런 이미지들이 연상되었는지 얼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옆에 그 둘을 동시에 길들이는 뛰어난 조련사가 서 있던 덕분이었다.


작가의말

글을 쓰다보면 워낙 보여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보니..

처음 의도한 것보다 더 길어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잘 조절하면서 전개가 느려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연재 속도 또한 그렇고요..

남은 추석과 주말 연휴 잘 보내시길 바라며

저는 더 빠른 속도로 찾아올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언제나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_ _)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이풍 님

언제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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