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웹소설 > 일반연재 > 스포츠, 일반소설

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최근연재일 :
2024.05.26 21:53
연재수 :
206 회
조회수 :
1,094,624
추천수 :
34,168
글자수 :
1,916,779

작성
19.09.05 20:27
조회
2,811
추천
102
글자
23쪽

121. 사냥개와 들개들 (2)

DUMMY

인버네스 칼레도니언 시슬전, 안토니오 델 레오네의 컨퍼런스.


“내일 하일랜드 더비 선발 명단에 블랜차드 선수가 들어가는지?”


오늘의 핵심이 될 질문이 던져지자 모두의 고개가 한쪽을 향해 돌아갔고, 기대가 담긴 그 시선들을 한 몸에 받은 로스 카운티 감독은 마치 애를 태우려는 양 느긋한 동작으로 넥타이를 고쳐 잡으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경기를 앞두고 선발 명단을 공개해서 우리가 얻을만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뒤이어 흘러나오는 작은 탄식.


‘젠장, 오늘은 왜 또······.’


며칠 전만 해도 둘 사이에 뭔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묘한 뉘앙스를 풍겨 놓더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을 떼며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다.


가끔씩 파격적인 발언이나 재치 있는 입담으로 회견장을 들썩이게 만들다가도, 어떤 날에는 기삿거리 하나 써내기 어려울 만큼 비협조적으로 나온다. 물론 이탈리안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이미 이 바닥에서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졌지만.


‘감질나서 미치겠군.’


그럴 때마다 기자들의 입은 바짝 마르곤 한다.


안토니오 델 레오네의 컨퍼런스는 그들 사이에서 주로 고급 레스토랑에 비유된다.


간간히 나오는 애피타이저는 맛이 좋고 식욕까지 돋워주지만, 포만감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너무 양이 적어서 간에 기별도 안 오는 요리들뿐이다.


그러나 이곳의 주방장은 좀처럼 메인 디시를 내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주린 배를 움켜쥐며 장기간 앉아 기다리고 있어도 말이다.


프리미어십을 취재할 때 로스 카운티가 빠지는 건 이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다. 저 얄미운 이탈리안의 영향력은 스코티시 축구계에서 날이 갈수록 커지는 중이며, 그가 내뱉는 한 마디에 따라 기자들은 상사에게서 잔소리 혹은 칭찬을 듣는 운명에 놓인다.


그렇기에 과감히 자리를 박차고 이 식당을 나올 수도 없다.


“그러면 선발이 아니더라도 그가 명단에 포함되는지는 말해줄 수 있나요?”


“궁금한 점은 내일이 되면 모두 알 수 있을 겁니다.”


‘제발 좀······.’


몇몇은 벌써 자신의 미래가 눈에 그려지는지 초조한 얼굴로 볼펜이나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평범한 경기도 아니고 하일랜드 더비를 앞둔 컨퍼런스. 작은 소득이라도 어떻게든 얻어가야만 하는 자리인데.


“솔직하게 말하죠.”


결국 참다못한 기자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블랜차드는 작년부터 칼레 시슬 킬러라는 별명까지 붙을 만큼 하일랜드 더비에 강한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팬들은 이번 경기의 성공을 위해서 그가 출전하길 열망하고 있고요. 근데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만 보면 내일 과연 선발인 건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


“핵심 선수의 부상으로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인 건 압니다. 하지만 다들 블랜차드 선수의 존재는 전술보다 위에 놓여야 한다는 평이 지배적이에요. 그가 필드에서 지닌 비중이 결코 가볍지가 않으니까요. 그건 델 레오네, 당신도 인정하지 않나요?”


여기까지 들은 감독의 얼굴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살짝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제 팀에 확고한 주전이라는 건 없습니다. 모두가 매 순간 경쟁하는 마음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으며, 그걸 지켜보고 심사숙고하여 내린 판단으로 선발 멤버를 정할 뿐입니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블랜차드는 팀 내에서 공격 포인트 지분이 높은 선수잖아요? 그런데 뜬금없이 경쟁에서 밀려나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상하다 여길 수밖에 없죠. 일각에서는 그가 전술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말까지 나오는 중이고요.”


“······.”


“좀 더 사실대로 말하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어떤가요?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감독으로서 설명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델 레오네는 그를 대담하게 몰아붙여 세우는 기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발의 기준은 그 선수의 기량만 보는 게 아닙니다. 다른 요소들까지 전부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죠. 우리는 부상을 포함해 여러 변수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거의 강제적으로 로테이션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감독의 자리에서는 어떤 것이든 가볍게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결과물을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죠. 이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렇다는 건 그 요소 중에 결국 전술이 포함되어 있다는 얘긴지?”


“물론입니다. 필드 위의 선수들을 하나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니까요. 종종 간과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에게는 오히려 중요시되는 기준입니다.”


감독은 계속 시선을 고정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언급하셨던 전술의 위에 올라설 수 있는 선수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되려면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활약을 보일 정도는 되어야겠죠.”


“블랜차드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란 말인가요?”


“제가 설정한 허들은 더 높습니다. 칼레 시슬 킬러는 불과 작년에 생긴 별명일 뿐이죠. 다른 것들을 전부 제쳐두고 염두에 둘 만한 통계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뭐,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됐어!’


조용히 앉아있던 나머지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미온적인 반응의 상대에게서 원하는 걸 얻어내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불확실한 것도 기정사실로 몰아붙이면서 자존심을 끊임없이 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발은 성공한 듯했다.


‘전술의 희생양’이라는 말에 저 포커페이스의 미간이 약간 꿈틀거리더니 만족할 만한 분량을 뽑아낼 수 있을 만큼 제 스스로 의견을 술술 털어놓지 않는가?


태연한 척하지만 심기가 불편했던 게 분명하다.


게다가 이 정도면 블랜차드가 하일랜드 더비에 선발로는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걸 확고하게 밝힌 셈이다. 더불어 나중에 가서는 내분이 발생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할 것이고 말이다.


‘조만간 메인 디시를 배 터지도록 먹을 수도 있겠는걸.’


기자들은 벌써 포만감에 취한 얼굴로 잔뜩 들떠있었다.


*******


[ Daily Mirror ] 델 레오네 “칼레 시슬 킬러는 나에게 의미 없는 수식어.”


[ Daily Telegraph ] 하일랜드 더비 선발 명단에 제임스 블랜차드는 없을 것


[ Daily Mail ] 분열의 신호탄? 컨퍼런스 룸에서부터 느껴졌던 심상찮은 기류



컨퍼런스가 종료된 후 각 언론사에서는 불과 몇 시간도 안 되어 곧장 기사를 작성했고, 인터넷 뉴스부터 띄워 올리기 바빴다.


최대한 많은 조회 수를 차지하기 위한 물량과 속도 경쟁. 한쪽에서 스타트를 끊으니 다른 쪽에서도 질세라 줄줄이 올리는 게 미디어들끼리 치열한 전쟁이라도 벌이는 것 같았다.


“제목들 한번 맛깔나게 지었군.”


그리고 그 원인의 인터뷰를 제공해주었던 주동자는 감독실로 돌아와 여유롭게 앉아서 기사들을 찬찬히 훑어보는 중이었다.


“닐, 이것 좀 보겠나? 요즘 들어 로스 카운티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게 새삼 느껴진단 말이지. 다들 이렇게 챙겨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으니.”


그의 호출로 불려온 닐 스튜어트 수석 코치는 모니터로 다가가 날조와 왜곡으로 가득한 악성 기사들을 보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좋은 의도로 신경 써주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의도야 어찌 되었든, 재밌지 않나?”


감독이 웃으면서 말했다.


“고작 몇 번의 경기에서 교체 좀 했다고 시끌벅적하더니, 선발 제외하자마자 각종 음모론들이 고개를 치미는 상황이 말이네. 단지 스코티시 컵에 내보내겠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나와 제임스는 어느새 서로 으르렁거리는 앙숙이 되어 있군. 이토록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는 건가? 어떤 면에서 보면 참 대단해.”


“언론이라는 게 다 그런 식이죠. 요새 제임스가 차세대 스타로 떠오르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급증하다 보니 작은 일에도 이슈 거리가 되기도 쉽고······.”


“간혹 보면 몇 명은 진로를 잘못 잡은 게 아닌가 싶어. 기자가 아니라 차라리 소설가가 되었다면 더 성공했을지도 모르는데. 별것 아닌 일에도 온갖 의미를 부여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거든.”


스튜어트는 방금 한 말이 델 레오네 방식의 비아냥거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들이 창작 열의를 마음껏 불태울 수 있도록 장작을 몇 개 좀 던져 주었지. 인터뷰 도중에 갑자기 처음 보는 기자가 어설프게 도발을 걸어오더군. 짐짓 넘어가는 척하면서 언짢은 티를 냈더니 아주 좋아라하던데. 그 친구는 지금도 아마 흥에 겨워서 열심히 기사를 뽑아내고 있을 거야.”


감독은 그렇게 말하며 흡족한 듯 양 손바닥을 비볐다.


“그렇다면 이번까지는 언론의 장단에 맞춰주는 게 좋겠지.”


“괜찮을까요?”


스튜어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루머가 양산되다 보면 나중에는 해명을 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언론이 블랜차드를 잡고 흔들어대는 건 그다지 불안한 축에도 끼지 않는다. 그는 로스 카운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게 깊으며, 구단과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니까.


문제는 떠들썩한 소문들이 마냥 거짓도 아니라는 점이다.


전술의 영역으로 접근했을 때 그의 위치가 모호해진 것도 사실이며, 감독은 코치진들을 전부 소집하여 이 부분에 대해 지속적인 토론을 거치기도 했다.


알렉산더 캐리의 부재로 빌드업이 약해지면서 블랜차드가 발휘하는 영향력이 크게 줄었고, 폰투스 얀손이 오른쪽으로 옮기고 나서부터는 함께 공격을 이끌던 리 월리스마저 오버래핑을 자제하니 왼쪽이 제대로 기능하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감독은 해결책으로 주변 팀원과의 연계보다 온 더 볼(On the Ball : 볼을 가지고 있을 시) 상황에 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소피앙 부팔을 레프트윙에 배치하면서 개인 기량으로 혼자 풀어가게 하였고, 그 선택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부팔에게 왼쪽을 맡기자는 것이 공식 회의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중앙 2선 역시 에드빈 데 루어가 최상의 폼을 보여주고 있어 딱히 뺄 이유가 없는 상황. 이렇게 되면 블랜차드는 정말로 벤치에 앉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며, 언론들은 그것만 보고서 파렴치하고도 악질적인 루머들을 계속 생산해댈 것이다.


그런 건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내부가 튼튼하다 해도 외부의 공격을 계속 받다 보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법이다.


감독은 이번 블랜차드 이슈를 이용하여 언론의 뒤통수를 쳐보려는 속셈인 것 같지만, 굳이 그들을 자극할 필요까지 있을까? 결과는 통쾌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화를 입게 될지 알 수 없는 게임이 될 텐데.


“생각이 많군.”


스튜어트의 얼굴을 지켜보던 괴짜 이탈리안이 웃으며 대꾸했다.


“닐, 나는 행복한 감독이야.”


“······예?”


“훌륭한 선수들이 많아서 누구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벅차거든. 다들 특색이 강하니 다양한 시스템을 고안해내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지. 스코티시에서 나 같은 생각을 하는 감독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예······.”


“제임스는 똑똑하고 강인한 녀석이야.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언론의 장난질이 계속되어도 딱히 상관은 없다만······ 그럴 수도 없을 테니까.”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튜어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여하튼 이건 더 신경 쓸 것도 없는 일이라는 거지. 복잡한 생각은 그만두게. 언론에서 열심히 헛물을 켜는 동안 우리는 내일 있을 칼레 시슬전의 마지막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먼저 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스튜어트는 작게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래야죠.”


*******


< 14-15 Scottish Premiership 25 Round >

인버네스 CT : 로스 카운티

2015년 2월 5일 (목) 19:30

칼레도니안 스타디움 (관중 수 : 7,750명)



[칼레도니안 스타디움에 빈자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일랜드 더비 역사상으로는 최초의 매진 기록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로스 카운티 효과가 큰 걸까요? 홈팀 쪽 스탠드도 꽉 메워져 있는 걸 보면 두 팀의 상승세가 엄청나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겁니다.]


주말도 아니고 주중에 치러지는 경기였지만, 글래스고 레인저스의 몰락 이후 스코티시 최고의 라이벌전으로 발돋움 중인 하일랜드 더비답게 경기장은 매진을 달성한 관중들의 함성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저녁의 여가를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겠지만, 이들이 전부 하일랜드 지방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이 경기를 직관하기 위해 먼 지역에서부터 찾아온 이들이 존재한다는 얘기니.


평소에 주인이 없는 자리가 듬성듬성 보이던 7천여 석은 너무나도 부족하게만 보였다.


이윽고 스타팅 멤버가 하나씩 호명되자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열띤 환호를 보내주기 시작했다.



[인버네스 CT / 4-3-3]

FW : 코너 페퍼

WF : 라이언 크리스티 / 아론 도란

MF : 압둘 오스만 / 제임스 빈센트

DM : 로스 드레이퍼

DF : 라이언 맥기븐 / 제이크 맥라렌 / 게리 워렌 / 매튜 쿠퍼

GK : 단 트워드지크


[로스 카운티 / 4-2-3-1]

FW : 에이든 딩월

AM : 소피앙 부팔 / 에드빈 데 루어 / 앤드류 톰슨

CM : 대런 케틀웰 / 리차드 브리튼

DF : 리 월리스 / 스콧 보이드 / 폰투스 얀손 / 아메드 델샤드

GK : 마크 브라운



“이번에도 블랜차드를 안 쓴다고? 정말로 기자 나부랭이들이 지껄였던 게 맞는 거야?”


로스 카운티의 선발 명단을 확인한 피터 블랙이 불만스러운 투로 말했다.


“아니, 대체 왜 안 쓰는 거지? 칼레 시슬 놈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존재가 블랜차드일 텐데?”


“스코티시 컵에 선발로 풀타임을 뛰었을 때부터 예견한 일이잖아, 피터.”


친구 토드 홉킨스가 대꾸하자 블랙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건 그런데······ 대체 왜······.”


이 일대에서 가장 은밀한 작업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꼽으라면 단연, 이 둘이 될 것이다.


로스 카운티가 기치를 높이 흔들며 세간의 이목을 끌어내 그 존재감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시선 속에 숨어서 대업을 이루기 위한 준비 작업을 착실히 진행 중이었으니까.


간단히 말하면 저번 셀틱과의 경기에서 나왔던 첫 매진 기록과 지금 스탠드를 꽉 채우고 있는 상황 역시 이 두 명이 아니었다면 힘든 일이었다.


현재 칼레도니안 스타디움 원정석에 앉아 있는 관중들의 일부는 블랙과 홈킨스가 모집하여 모은 사람들이니 말이다.


일단 주변에 아는 사람들을 포섭하는 게 시작이었고, 더 이상 끌어들일 인원이 남아있지 않게 된 후에는 범위를 서서히 넓혀 갔다.


기준은 딩월시, 크게는 하일랜드 지방까지를 우선 기준으로 잡아 ‘축구 동호인 모임’ 정도의 자극적이지 않은 문구를 내세워서 인터넷의 포럼부터 해서 신문에 작은 광고를 내는 등의 방식으로 로스 카운티를 좋아했거나, 이제 막 관심이 생겨가는 이들을 꼬드겼다.


물론 발로 직접 뛰면서 전단을 붙이거나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꼬드긴 이후엔 며칠을 두고 지켜보다가 신뢰가 간다고 판단되었을 때 본래의 목적을 설명하고 뜻이 같은 사람들을 찾아냈다.


그렇게 하나둘 모인 인원들이 집단이라고 불릴 만큼의 규모로 성장할 동안에도 블랙과 홉킨스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며 환호하는 관중들 속에 철저히 숨겨왔다.


대업을 일으킬 시기적절한 때를 기다리기 위해.


그리고 그 대업이란 당연히 저쪽에서 한 영역을 버젓이 차지한 채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더러운 무리와 담판을 짓는 것이다.


다 같이 한마음으로 모여서 응원을 하는 공간에 따로 결계라도 친 듯 험상궂은 분위기를 발산하며 주변에 앉은 사람들까지 불편하게 만드는 저 무리 말이다.


‘성난 숫사슴들’이라 불리는 불량배 집단. 최근에는 로스 카운티가 워낙 잘나가고 있어 예전보다 기세가 많이 줄은 탓에 침묵만 지키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 그 누런 송곳니를 언제라도 드러낼 놈들이다.


블랙은 모아둔 인원으로 정규군을 결성해서 힘으로 제압하고 아예 씨를 말려야 한다고 주장했었지만, 그러면 우리도 똑같은 수준밖에 되지 않을 거라는 홉킨스의 일침에 잠자코 있는 중이었다. 그 말만 아니었다면 혼자라도 쳐들어가서 한판 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블랙조차도 이번만큼은 살짝 구단에 불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블랜차드를 이번에 안 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그는 블랜차드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걸 떠나서라도 칼레 시슬 킬러라 불리는 젊은 에이스를 선발에서 왜 제외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와아아 -


킥오프와 동시에 홈팀 스탠드에서 함성을 먼저 터뜨렸고, 원정팀 스탠드에서 같이 맞받아치면서 7천여 명의 소리가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이에 보답하듯 양 팀의 선수들은 서로 시원한 공격을 펼치면서 각각 슈팅을 하나씩 빠르게 가져갔고, 초장부터 거친 몸싸움까지 벌이면서 열기를 더욱 돋워냈다.


전반 6분 만에 가열되는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주심의 구두 경고가 들어갔지만, 결국 잠잠해지지 않자 11분 만에 제임스 빈센트에게 옐로카드가 주어졌다. 이에 그치지 않고 15분에는 폰투스 얀손이 경고를 받으면서 양 팀은 카드까지 사이좋게 주고받고 있었다.


“가라고! 칼레 시슬 놈들을 박살 내버려!”


블랙 또한 어느새 다 잊어버리고 경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삐익 -


하지만 때론 이렇게 팽팽한 접전이 허무하게 식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수비진이 아론 도란의 움직임을 빠르게 감지하지 못하면서 위험한 상황을 노출했고, 스콧 보이드가 다급하게 그를 쫓다가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누르면서 변명의 여지도 없는 페널티 킥을 내주고 만 것이다.


키커는 경고를 받았던 빈센트였다. 그는 마크 브라운 키퍼를 완벽하게 반대로 따돌리며 오른쪽 구석에 깔아 넣더니, 원정팀 스탠드를 바라보며 귀를 갖다 대고 어디 한 번 함성을 또 질러보라는 제스처를 취하기 시작했다.


“저 망할 자식이······.”


그 도발을 정면으로 맞은 블랙은 속이 끓는 듯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복수하는 방법은 로스 카운티 선수들이 점수를 따라잡아 주는 것뿐.


True James is Vincent. It's Not Blanchard.

(진짜 제임스는 빈센트지. 블랜차드 따위가 아니란다.)


그래야 홈팀이 걸어놓은 저 말 같지도 않은 현수막이 내려가는 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뜻밖의 일격을 얻어맞은 로스 카운티는 반격에 나섰지만, 칼레 시슬의 감독 스티브 클라크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행운의 골이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전체 라인을 아래로 깊이 내렸고, 공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방어적인 태세로 들어갔다.


“부팔이 볼을 잡을 때마다 최소한 두 명, 많게는 세 명까지 달라붙고 있어. 최근 폼이 좋은 걸 알고서 협력 마크를 지시해 놓은 것 같아.”


홉킨스의 말 대로였다.


부팔은 마크맨 하나만 붙여두기에는 위험한 선수다. 그걸 상대가 모를 리가 없었고, 방어적인 진형을 갖추었을 때는 빠르게 두세 명의 수비가 달라붙기 용이해진다.


인버네스의 영리한 경기 운영에 로스 카운티는 좀처럼 활로를 뚫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브리튼이 찔러 준 회심의 패스를 받고 박스 안에서 날린 데 루어의 슈팅이 키퍼에 품에 얌전히 안겼던 게 그나마 가장 위협적인 찬스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반 32분.


2선 아래까지 내려왔던 에이든 딩월이 앞으로 내달리던 앤드류 톰슨을 향해 보내주었던 패스가 상대에게 가로채였고, 상황은 인버네스의 역습으로 이어졌다.


패스를 차단한 라이언 크리스티가 앞으로 내몰던 볼은 차례대로 코너 페퍼, 압둘 오스만, 제임스 빈센트를 거치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빠르게 전개되었다.


아론 도란은 안쪽으로 들어오며 다시 박스 안으로 침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번에는 리 월리스가 그를 시야에 두며 쫓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뒤로 다른 선수가 돌아가는 걸 눈치채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뒤를 봐야지!”


답답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필드까지 들릴 리는 없었다.


월리스의 뒤로 돌아서 몰래 침투하는 데 성공한 로스 드레이퍼가 빈센트의 패스를 받아서 니어 포스트를 노리는 오른발 슈팅을 시도했고, 오늘 그들은 말 그대로 되는 팀이었다.


“제기랄!”


블랙은 결국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지난 더비전의 악몽이 떠오른다. 시간은 다르지만 두 골을 실점하고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패배했던. 그날에도 캐리와 블랜차드는 나오지 않았었고, 딩월은 최악의 폼을 보여주었다.


아직 후반이 남아있었지만, 연관성이 있는 기억들이 불안감을 조성한다.


“좋지 않은데.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느낌이 너무 강해.”


홉킨스도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이거 뒤집지 못해서 안 좋은 결과라도 얻게 된다면 성난 숫사슴들도 좀 기운을 차리게 될지도 모르겠어.”


후반이 남았다는 건 만회할 기회이기도 하지만, 더 실점할 수도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블랙은 벌써 삿대질을 하며 뭐라고 외쳐대는 몇몇을 보면서 홉킨스의 말에 수긍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돼.”


하지만 좋지 않았다. 단숨에 두 골을 만들어낸 인버네스는 더욱 견고하게 수비를 형성 중이었고, 로스 카운티는 막판에 공격 횟수를 많이 가져가고 있었지만, 실속은 보이지 않았다.


삑 -


그러던 중 볼을 받아낸 톰슨이 수비와 충돌하면서 파울을 받아냈고, 로스 카운티에게 프리킥이 주어졌다.


이럴 때 데드볼 찬스를 얻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페널티 박스와 거리는 약간 멀어서 직접 슈팅을 노리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주심이 가리킨 지점에 볼을 내려놓은 리차드 브리튼은 전방에서 패스를 받기 위해 내달릴 준비를 하는 팀원들을 한번 훑어보더니 강하게 도약하며 발을 내디뎠다.


“우와악!”


그리고 블랙은 골문까지 거의 35미터쯤은 되어 보이는 긴 거리에서 날린 브리튼의 슈팅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나가면서 우측 상단에 꽂히는 걸 보고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골키퍼는 반응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서 그물에 튕겨 굴러 나오는 볼을 바라볼 뿐이었다.


벼락같은 프리킥 골을 넣으며 한 점을 만회한 주장은 셀레브레이션 할 생각도 없이 팀원들에게 빨리 킥오프를 준비하러 내려오라면서 황급히 손짓하고 있었다.


한 줄기 희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단축하기는커녕 시간이 늘어나버렸네요.

이번 연재도 좀 더 단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냉방병으로 몸살을 앓는 바람에... 면목이 없습니다.

이다음 연재는 다시금 속도를 내도록 해보겠습니다.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이풍 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_ _)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121. 사냥개와 들개들 (2) +6 19.09.05 2,812 102 23쪽
120 120. 사냥개와 들개들 +8 19.08.25 2,937 100 26쪽
119 119. 임시방편 (3) +8 19.08.16 2,956 108 27쪽
118 118. 임시방편 (2) +9 19.08.05 3,039 97 24쪽
117 117. 임시방편 +10 19.07.24 3,048 118 25쪽
116 116. 셀틱은 셀틱 (2) +9 19.07.08 3,120 115 23쪽
115 115. 셀틱은 셀틱 +5 19.06.25 3,182 111 18쪽
114 114. 인식 변화 (2) +9 19.06.10 3,342 116 20쪽
113 113. 인식 변화 +12 19.05.24 3,524 134 20쪽
112 112. 던디 쇼크 (2) +11 19.05.07 3,451 126 22쪽
111 111. 던디 쇼크 +7 19.04.21 3,687 134 21쪽
110 110. 역이용 +12 19.04.02 3,565 137 22쪽
109 109. 키포인트 +10 19.03.17 3,667 146 25쪽
108 108. 상관없어요 +16 19.03.01 3,842 144 21쪽
107 107. 고난의 6연전 (6) +11 19.02.17 3,790 143 24쪽
106 106. 고난의 6연전 (5) +10 19.02.02 3,847 122 22쪽
105 105. 고난의 6연전 (4) +16 19.01.20 4,022 149 21쪽
104 104. 고난의 6연전 (3) +23 19.01.09 4,284 145 26쪽
103 103. 고난의 6연전 (2) +16 18.12.26 4,287 141 18쪽
102 102. 고난의 6연전 +10 18.12.08 4,604 147 22쪽
101 101. 전조 +17 18.11.25 4,566 173 19쪽
100 100. 단체 면담 +26 18.11.12 4,667 182 21쪽
99 99. 밀집과 전환 +18 18.10.16 5,021 173 18쪽
98 98. 천재의 가치 +10 18.10.05 5,109 181 20쪽
97 97. 사용 설명서 +17 18.09.26 5,188 203 26쪽
96 96. 프리먼의 인터뷰 (2) +15 18.09.16 5,430 184 19쪽
95 95. 돈 값하네 +18 18.09.04 5,411 183 21쪽
94 94. 알려지는 이름 +21 18.08.25 5,461 195 19쪽
93 93. 이끌리는 사람들 (2) +18 18.08.19 5,407 208 23쪽
92 92. 이끌리는 사람들 +19 18.08.10 5,496 191 2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