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웹소설 > 일반연재 > 스포츠, 일반소설

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최근연재일 :
2024.06.22 18:58
연재수 :
207 회
조회수 :
1,098,282
추천수 :
34,200
글자수 :
1,928,975

작성
19.03.01 18:29
조회
3,853
추천
144
글자
21쪽

108. 상관없어요

DUMMY

“사실 내가 제일 선호하는 건 미드필더를 세 명 두는 거야.”


감독의 말이었다.


“후방에 레지스타를 두고······ 그 앞에 메짤라를 내세운 형태로.”


“······.”


“레지스타······ 쿠르소레······ 그리고 인쿠르소레.”


“······.”


“팀의 사정마다 달라지겠지만 내 기준으로는 가장 이상적인 조합이지.”


“그렇군요······.”


닐 스튜어트는 멍한 얼굴로 대꾸했다.


해석을 못 해서 그런 건 아니다. 감독은 전술적 토론에 심취할 때면 가끔씩 자신의 국적인 이탈리아에서 쓰는 용어를 섞곤 했으니까.


습관인 탓도 있겠지만 그는 영국 축구가 워낙 단순하게 분류되어 있어 무언가를 설명할 때 한계가 있다고 불만을 표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얘기들이 낯설지는 않았다.


다만 뜬금없는 대답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그저 들뜬 마음으로 감독실에 들어와 올림피아코스를 상대로 거둔 짜릿한 역전승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는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함께 지낸 지 일 년이 넘어가는데도 저 사람과의 대화는 여전히 적응 안 될 때가 있단 말이야······.’


언급한 것들은 이탈리아식으로 표기한 미드필더의 명칭이다.


우선 메짤라(Mezz'ala)는 해석하면 하프 윙이 되지만, 현대 축구에서는 단순히 세 명의 미드필더를 둔 시스템에서 한 명을 후방에 내린 역삼각형일 때 위에 있는 양쪽 미드필더를 그렇게 부른다.


이후 나온 세 개의 이름은 더 세부적으로 나눈 역할이다.


레지스타(Regista)는 연출가란 의미가 담겨 있으며, 경기 템포를 조율하고 전방으로 볼 배급을 해주는 필드의 사령관이자 지휘자로서 현재 알렉산더 캐리가 수행 중인 역할이다.


쿠르소레(Cursore)는 일꾼이란 뜻으로 공수 양면을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활력소를 불어넣는 팀의 엔진. 리차드 브리튼이 맡고 있는 포지션이다.


이 나라에서는 박스 투 박스(Box to Box) 미드필더라고도 불리는데 우리 팀 페널티 박스와 상대 팀 페널티 박스를 계속 쉴 새 없이 왕복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인쿠르소레(Incursore), 직역한 의미는 습격하는 자.


“훈련했던 기간이 짧아서 약간은 모험 수를 두는 심정이었는데 이렇게나 잘해주다니. 정말 기특한 녀석이야. 뭐, 잘 해낼 거라 믿고는 있었지만.”


“······.”


“제임스 말이네.”


“아, 예······. 그렇죠.”


감독은 커피의 향을 음미하며 진심으로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로선 생각지도 못한 방안이었습니다.”


스튜어트가 말했다.


“감독님이 제임스를 중앙 미드필더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계실 줄은.”


지난번 그에게 받았던 블랜차드의 새로운 훈련 세션은 철저히 올림피아코스전을 초점에 두고 계획된 파일이었다. 그 말은 잭 마틴의 부상 여부와 관계없이 애초부터 4-4-2를 쓸 생각이 없었다는 얘기다.


훈련 세션의 내용은 대부분 중앙 미드필더들이 수행하는 것들. 정확히는 작년 로버트 퀸에게 부여했던 공격적인 3선 미드필더의 역할들이었다.


“올 시즌 4-3-3이 계속 삐걱거렸던 이유는 밸런스가 지나치게 수비적으로 기울면서 발생한 문제점 때문이야. 그건 자네도 알고 있을 테고.”


이탈리안이 커피잔을 사뿐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메짤라 중 하나를 공격 가담에 능한 선수로 배치하려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지. 우리 팀의 베테랑 미드필더들은 듬직하긴 하나 빠르게 전방으로 힘을 실어주지는 못하거든.”


“특히 대런이 그 부분에서 많이 취약하긴 하죠.”


“포스트플레이에 능했던 요앙 아르킨이 떠나고 팀의 스타일 또한 롱볼에서 연계 위주로 변화하면서 상황이 더욱 어려워졌어. 잭을 세우면 위에서 고립되어 버리고, 에이든은 나름 괜찮긴 하나 너무 내려와서 전방이 텅 비어버리는 사태가 일어나지.”


“그래서 4-3-3을 개선하려면 공격의 수를 더 적극적으로 도와줄 선수가 필요하고, 그 적격자가 제임스란 말씀이시군요.”


“제임스는······.”


감독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에 놔도 기본은 할 거야. 그만큼 충실하지. 물론······ 녀석은 왼쪽에서도 훌륭했어. 하지만 중앙으로 옮길 경우 자네도 봤다시피 활용 범위가 대폭 넓어지지.”


그가 발걸음을 옮긴 쪽은 동그란 자석들이 붙어있는 전술 보드였다. 로스 카운티를 표시하는 파란색의 자석들은 이미 4-3-3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요즘 에드빈 데 루어를 중앙에 놓고 4-2-3-1을 가동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들이 나오던데.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소리! 사람들은 로스 카운티가 이제 막 바닥에서 수면으로 올라온 팀이라는 걸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야.”


감독의 손가락이 좌측 중앙 미드필더, 즉 저번 경기에서 블랜차드가 섰던 위치의 자석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기에서 뛰는 선수에게는 몇 가지 요구되는 조건이 있네.”


그가 계속 말했다.


“첫째로는 당연히 높은 공격 성향을 지녀야 하고, 제2의 득점원이 되어서 해결할 줄도 알아야 할 것. 둘째로는 상황에 따라 알렉산더 캐리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도록 내려와서 도와주어야 하지. 이 둘을 수행하기 위해서 반드시 체력이 받쳐줘야 해.”


“확실히 에드빈에게 그 역할을 맡기기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죠.”


심폐지구력 부문의 상위권을 차례대로 나열한다면 단연 에이든 딩월이 제일 맨 윗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그 뒤로 리차드 브리튼과 제임스 블랜차드 순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런 면을 따져 봤을 때 사실 스튜어트로서도 고안해 볼 수 있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는 아니다. 단지 저 이탈리안처럼 과감히 실천에 옮기지 못할 뿐.


생각해보면 레프트윙이 그의 최적 포지션이라고 말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왼발을 아주 못 쓰는 건 아니지만 주로 사용하는 게 오른발이라는 점, 앤드류 톰슨이나 소피앙 부팔과 비교하면 윙치고는 그리 폭발적인 주력을 지니지 못했다는 점 등만 고려해 봐도 말이다.


단지 그가 입단하면서 뛰기 시작한 곳이었고(유소년 담당자, 데이비드 위어의 말에 따르면 입단 당시 레프트윙을 뛸 사람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그쪽에 배치했다고 했지만), 거기서 무난하게 잘해왔으니까. 1군에 올라와서도 좋은 활약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으니까. 아무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 그래도 요새 반대발 윙어, 소위 말하는 인사이드 포워드가 유행하는 시대 아니던가. 마침 레프트백과도 좋은 호흡을 보여주던 참이었으니 굳이 뜯어고칠 이유가 없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직 제임스 외에 아무나 할 수 없는 하나가 남았어.”


자석을 짚으며 설명하던 손가락이 스튜어트에게로 향했다.


“바로 전술적 유연함.”


“······.”


“4-2-3-1이니, 4-1-4-1이니 하는 건 그저 숫자 놀음일 뿐이야. 중요한 건 그 숫자가 정답에 가까워지도록 맞춰보는 과정이지. 퍼즐도 한 번에 따닥따닥 전부 끼워 넣는 경우는 없지 않나?”


감독은 다시 보드로 고개를 돌렸다.


“핵심은 경기 중에도 계속 유동적인 변화를 가져가는 것. 제임스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팀의 진형이 계속 달라지면서 상대에게 혼선을 줄 수 있게 돼.”


그의 손에 의해서 자석들이 끊임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4-2-3-1, 4-1-4-1, 혹은······ 4-4-1-1. 경기 흐름에 맞춰서 공수 밸런스를 부드럽게 가져갈 수도 있고, 전술적 패착이 생겨도 비교적 빠른 수정을 할 수 있지. 전반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손톱만 물어뜯고 있을 필요가 없단 얘기야.”


이번에는 블랜차드의 자석과 브리튼의 자석이 2선 위치까지 올라갔다.


“동시에 리차드의 범용성 또한 높아져. 4-4-2 체제에선 안정감이 필요했기 때문에 수비적인 역할에 치중해야 했지만, 사실 그는 예전에 라이트윙에서도 뛰었을 만큼 괜찮은 공격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박스 바깥에서 띄워 올리는 얼리 크로스는 팀 내 최고 수준이지.”


스튜어트는 어느새 열변을 토하고 있는 감독의 설명을 조용히 경청했다.


감히 그의 말에 토를 달 생각도 없었지만, 대체로 수긍이 되는 얘기들이었다. 오히려 이견을 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올림피아코스전, 로스 카운티는 블랜차드의 맹활약 속에서 브리튼의 결승 골로 역전을 이루어냈다. 그저 이론이라고 치부하기엔 모든 게 증명된 경기였다.


스튜어트가 묻고 싶은 건 하나뿐이었다.


“그러면 이제 4-3-3을 주력으로 운영할 계획이신 겁니까?”


한창 설명에 열중하던 감독은 동작을 멈추더니 천천히 스튜어트 쪽을 돌아보았다.


“······아니.”


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로스 카운티의 주력 포메이션은 여전히 4-4-2가 될 것이네.”


“예? 하지만 감독님은 분명 세 명의 미드필더를 선호하신다고······.”


“닐, 어차피 시즌 내내 한 가지 플랜으로만 버틸 수는 없는 법이야.”


감독은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런 팀은 오래갈 수 없네. 괜찮아. 조급해할 것 없어. 그저 지금은 하나의 시스템을 추가로 완성해 나가고 있다는 기쁨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들을 수 있는 답변은 거기까지였다. 이 이상은 더 캐물어 본다 한들 소득이 없을 것이다.


‘뭐, 감독님에게 무슨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이제는 의구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가 해왔던 건 이제껏 전부 옳았으며, 팀을 결코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고 갈 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확고한 신뢰가 있으니까.


스튜어트는 여느 때처럼 그저 믿고 따르기로 하며 조용히 감독실을 나왔다.


*******


< 14-15 Scottish Premiership 14 Round >

로스 카운티 : 해밀턴 아카데미컬

2015년 11월 10일 (월) 19:45

빅토리아 파크 (관중 수 : 6,076명)



[로스 카운티 / 4-3-3]

FW : 에이든 딩월

MF : 에드빈 데 루어 / 제임스 블랜차드 / 리차드 브리튼 / 앤드류 톰슨

DM : 알렉산더 캐리

DF : 리 월리스 / 스콧 보이드 / 대니 패터슨 / 스티브 샌더스

GK : 마크 브라운



로스 카운티는 지옥과도 같았던 6연전을 3승 2무 1패로 최종 마무리했다.


두 번의 무승부와 라이벌인 인버네스 CT에게 무기력한 패배를 내준 게 아쉬울 수는 있겠지만, 줄부상의 악재 속에서 거둔 성적이었으니 나름 칭찬할 만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축구 종사자들이 이를 6연전으로 묶어서 표현한 이유는 어쨌든 기나긴 터널을 지난 뒤에는 따스한 빛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번에 갓 승격하여 온갖 고초를 다 겪고 있는 강등권 팀 해밀턴과의 홈경기를 치른 뒤 A매치 주간을 맞아 2주가량의 휴식을 부여받는다. 로스 카운티에게 이만큼 숨 돌리기 좋은 타이밍도 없을 것이다.


물론 해밀턴으로선 죽을 맛이겠지만 말이다.



“큭.”


해밀턴의 라이트백 지기 고든(Ziggy Gordon)은 등을 지고 자신의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상대 10번에게 밀리지 않으려 애를 쓰다가 그만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는 전반 20분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벌써 풀타임을 소화한 것 같은 힘겨움을 느끼고 있었다.


‘뭔 놈의 힘이 이렇게 센 거야.’


로스 카운티의 종잡을 수 없는 패턴에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뛰어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밀턴의 수비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최우선 견제 대상이었던 알렉산더 캐리는 완전히 후방에 빠져 있어서 압박하기도 어려웠고, 잭 마틴은 벤치 명단에 있었다. 거기에 에이든 딩월은 전방에 얌전히 머물러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온갖 군데를 돌아다니고 있어 수비하기 더 까다롭게 만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을 등지고 있는 이 선수.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한 주제에 왜 자꾸 측면으로 빠져서 들어오는가? 그 덕에 본래 전담해야 했던 에드빈 데 루어는 그의 동료 센터백이 신경을 쓰고 있었다.


완전히 맨마킹이 꼬여버린 상태다.


“그쪽으로 간다!”


동료의 외침. 로스 카운티의 공격이 그가 마크하고 있는 10번, 블랜차드의 발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고든은 바윗돌처럼 꿈쩍도 않는 등을 안간힘을 쓰며 붙잡고 섰다.


“놓칠까 보냐.”


그때 자신의 오른쪽을 서늘하게 하는 바람이 느껴졌고, 뺏어야 할 볼이 없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리 월리스의 발에 있었다. 블랜차드의 뒤꿈치 패스를 받아 들어간 것이다.


“젠장!”


고든은 이를 악물고 쫓아갔으나 월리스의 발을 떠난 볼이 문전으로 낮게 깔려 들어가는 것과 딩월이 맹수처럼 달려 들어가 그물을 찢어발길 듯한 기세의 강슛으로 마무리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로스 카운티 3 : 0 해밀턴 아카데미컬 >

에이든 딩월(23‘)

제임스 블랜차드(74‘)

대니 패터슨(85‘)


=============================



“올림피아코스전에 이어서 이번 경기에도 MOM으로 선정됐어요. 축하해요, 제임스. 기분이 어때요?”


“기분 좋아요. 고마워요.”


블랜차드는 다시 한번 Man of the Match에 선정되었다.


선제골에서는 리 월리스가 어시스트 할 수 있는 기점을 만들어 주었고, 후반엔 앤드류 톰슨의 크로스를 받아 멋진 헤더 골을 넣었으며, 캐리와 데 루어가 교체되어 나간 이후 코너킥을 찰 사람이 없어 대신 전담한 것이 패터슨의 헤더 골로 이어지며 최종적으로 1골 1어시스트.


그것 이외에도 전체적인 부분에서 블랜차드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기자들에게 있어 이 선수가 MOM이 되는 건 작년부터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본 포지션이었던 레프트윙이 아니라 미드필더로 출전했는데 연속 MOM입니다. 오히려 중앙이 본인에게 더 잘 맞는 것 같나요?”


“글쎄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골과 어시스트를 계속하긴 했지만, 미드필더 위치에서 뛰면 그런 기록을 꾸준히 쌓아나가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요. 혹시 포지션 변화에 불만은 없나요?”


“별로······ 문제 없어요.”


“······그······ 지금 기록이 상당하잖아요. 득점도 순위권에 있고, 도움왕도 노려볼 수 있는 위치니까 욕심이 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요? 레프트윙에서 뛸 때보다는 그런 게 덜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아뇨. 딱히······ 괜찮아요. 그런 건.”


매번 이런 식이니까 말이다.


시큰둥한 표정에 단답형으로 돌아오는 인터뷰는 블랜차드란 선수를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애초에 말을 붙여보기도 힘든 수준이니까.


뭔가 단독적인 인터뷰를 진행해보려고 해도 어느새 귀신같이 경기장 바깥으로 빠져나가서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걸로 유명해져 버린 선수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길게 얘기해주면 안 될까요?”


“······.”


“제발요. 제임스······.”


기대를 접어 두고 이판사판으로 일단 던져 본 한 마디였다.


“좋아요.”


하지만 그 간절 어린 호소가 어느 정도 통했는지 뜻밖의 대답이 날아왔다. 블랜차드는 잠깐 눈을 아래로 내리깔다가 기자를 보며 말했다.


“왼쪽이든, 중앙이든 그건 아무 상관 없어요. 설령 수비수로 뛰라는 지시가 내려와도 저는 군말 없이 따를 거니까요. 어떤 포지션에서 뛰더라도 그저 최선을 다할 겁니다.”


“······.”


“그런 지시가 있다면 그건 분명히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그만큼 저에게 있어서 감독님의 말은 절대적입니다. 그가 요구하면 어디서든 뛸 준비가 되어 있어요.”


“예······. 인터뷰 고마워요······.”


거의 특종이나 다름없었다. 블랜차드에게서 이 정도 내용을 뽑아내는 건 스코티시 프리미어십 기자들 사이에서는 ‘은퇴하기 전에 해봐야 할 것’ 리스트에 넣을 정도로 희귀하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갑작스러운 횡재를 맞은 당첨자는 도리어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블랜차드의 충심 어린 발언은 한동안 매스컴에서도 떠들썩하게 굴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프로페셔널하게 감독을 신뢰하고 따르는 선수였던가? 오늘 여러모로 진귀한 것들을 발견한 셈이다.


그리고 그동안은 인터뷰 스킬이 별로 좋지 않아서 회피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였잖아······.”


믹스트 존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기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 14-15 Scottish Premiership 15 Round >

마더웰 : 로스 카운티

2015년 11월 24일 (월) 19:45

퍼 파크 (관중 수 : 4,899명)



[로스 카운티 / 4-4-2]

FW : 에이든 딩월 / 잭 마틴

MF : 제임스 블랜차드 / 알렉산더 캐리 / 리차드 브리튼 / 소피앙 부팔

DF : 리 월리스 / 폰투스 얀손 / 스콧 보이드 / 스티브 샌더스

GK : 마크 브라운



“으음······.”


마더웰의 감독 이안 바라클로(Ian Baraclough)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카메라에 비춘 자신의 얼굴이 심각하게 어두워져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그는 필드의 상황에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전반기 4라운드에서 만났을 때는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고, 리그 컵 8강전에서는 주전으로 무장했던 마더웰과 달리 후보 선수로 채워진 상대에게 탈락하며 더더욱 수치스러운 경험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의 홈에서 치르는 이번만큼은 반드시 따내야만 하는 경기였다. 그렇지 않으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몇 주간 로스 카운티 대응책을 마련하여 철저하게 준비했고, 분명 계획대로 잘 풀려나가는 듯했다.


캐리의 패스 한 방이 잘 틀어막던 수비의 틈을 꿰뚫어 내며 잭 마틴의 선제골을 이끌어 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집중해! 역전할 수 있다!”


어떻게든 사기를 올리려고 소리쳐보았지만 이미 분위기는 반대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일이 터지고 말았다.


와아아 -


마더웰의 진영에서 무섭게 달려들며 기어이는 수비수를 바닥에 엎어뜨리고 볼을 뺏어내는 에이든 딩월의 전방압박은 도무지 함성을 내지르지 않고는 못 배길 수준이었다.


“마······ 막아!”


바라클로가 다급하게 외쳤고, 그의 바람대로 딩월의 슈팅은 키퍼가 간신히 막아내었다.


“세컨드 볼!”


이어서 재차 시도하는 잭 마틴의 슈팅을 미리 읽어낸 수비가 몸을 던져 막아내었다. 로스 카운티가 튕겨 나오는 볼을 처리하는 집중력이 무척 뛰어난 팀이라는 건 진작 예습해두었던 사실이었다.


철썩 -


하지만 세 번째까지는 상황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눈 깜짝할 새 박스 안으로 들어와 빈 골대에 굴려 넣은 소피앙 부팔이 만세를 부르며 기쁨의 셀레브레이션을 하고 있었다.


“젠장.”


바라클로는 이제 표정 관리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

< 마더웰 0 : 2 로스 카운티 >

잭 마틴(48‘)

소피앙 부팔(55‘)


=============================



안토니오 델 레오네의 경기 후 인터뷰.


“에이든 딩월의 압박은 정말 경이로운 수준입니다. 감독님 입장에선 무척 든든하실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그의 에너지는 팀 전체를 전염시키죠. 매우 긍정적인 현상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선수들의 활약에 100%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런 선수들을 지휘할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버네스 CT에게 패배했음에도 로스 카운티는 꾸준히 셀틱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승점 차이가 나긴 합니다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셀틱과 남은 승부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다면 불가능도 아닐 것 같은데요. 감독님도 우승을 기대하고 있나요?”


“뭐, 아직 대답하기엔 이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기회가 찾아왔을 때 마다할 감독은 없지 않을까요?”


“하하. 그건 그렇죠.”


“우선은 차분하게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해서 임하고 있습니다. 계단도 차근차근 올라가야지 너무 성급하게 내딛다가 넘어져서 굴러떨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질문 하나가 남았는데요. 로스 카운티는 올림피아코스전과 해밀턴전에서 4-3-3을 이용해 만족할만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근데 이번 경기에서는 다시 4-4-2로 회귀했던데요. 그건 여전히 4-4-2를 주력으로 쓰신다는 의미인가요?”


“물론입니다. 적어도 프리미어십에서는 4-4-2가 로스 카운티의 주 포메이션이 될 겁니다.”


“왜 그런지 알 수 있을까요? 몇몇 전문가들은 하일랜드 더비에서 드러난 4-4-2의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나왔다고 평가하던데요.”


“그건 정말로 간단한 이유입니다.”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잭 마틴을 활용하기 가장 좋은 진형이니까요. 팀 내를 통틀어서 리그 최고 반열에 있는 소중한 핵심 선수를 단지 4-3-3을 쓰겠다는 이유만으로 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단지 그것뿐입니다.”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조금씩 속도를 붙여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오늘이 삼일절 100주년이더군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며...

모두 편안한 하루와 주말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이풍 님

매번 감사드립니다 (_ _)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22 122. 사냥개와 들개들 (3) +13 19.09.14 2,757 114 26쪽
121 121. 사냥개와 들개들 (2) +6 19.09.05 2,829 102 23쪽
120 120. 사냥개와 들개들 +8 19.08.25 2,950 100 26쪽
119 119. 임시방편 (3) +8 19.08.16 2,968 108 27쪽
118 118. 임시방편 (2) +9 19.08.05 3,053 97 24쪽
117 117. 임시방편 +10 19.07.24 3,063 118 25쪽
116 116. 셀틱은 셀틱 (2) +9 19.07.08 3,136 115 23쪽
115 115. 셀틱은 셀틱 +5 19.06.25 3,198 111 18쪽
114 114. 인식 변화 (2) +9 19.06.10 3,359 116 20쪽
113 113. 인식 변화 +12 19.05.24 3,542 134 20쪽
112 112. 던디 쇼크 (2) +11 19.05.07 3,463 126 22쪽
111 111. 던디 쇼크 +7 19.04.21 3,699 134 21쪽
110 110. 역이용 +12 19.04.02 3,580 137 22쪽
109 109. 키포인트 +10 19.03.17 3,681 146 25쪽
» 108. 상관없어요 +16 19.03.01 3,854 144 21쪽
107 107. 고난의 6연전 (6) +11 19.02.17 3,802 143 24쪽
106 106. 고난의 6연전 (5) +10 19.02.02 3,859 122 22쪽
105 105. 고난의 6연전 (4) +16 19.01.20 4,035 149 21쪽
104 104. 고난의 6연전 (3) +23 19.01.09 4,294 145 26쪽
103 103. 고난의 6연전 (2) +16 18.12.26 4,297 141 18쪽
102 102. 고난의 6연전 +10 18.12.08 4,619 147 22쪽
101 101. 전조 +17 18.11.25 4,579 173 19쪽
100 100. 단체 면담 +26 18.11.12 4,682 182 21쪽
99 99. 밀집과 전환 +18 18.10.16 5,034 173 18쪽
98 98. 천재의 가치 +10 18.10.05 5,124 181 20쪽
97 97. 사용 설명서 +17 18.09.26 5,204 203 26쪽
96 96. 프리먼의 인터뷰 (2) +15 18.09.16 5,444 184 19쪽
95 95. 돈 값하네 +18 18.09.04 5,426 183 21쪽
94 94. 알려지는 이름 +21 18.08.25 5,475 195 19쪽
93 93. 이끌리는 사람들 (2) +18 18.08.19 5,424 208 2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