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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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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최근연재일 :
2024.05.26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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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25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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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120. 사냥개와 들개들

DUMMY

파격적인 발언까지는 아니다.


제임스 블랜차드는 삼일 뒤에 있을 스코티시 컵 경기에도 선발 출전할 것. 감독은 단지 그렇게 얘기했을 뿐이었고, 문장 그대로 받아들여도 이상할 게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회견장에 있던 모두는 읽어낼 수 있었다.


그 평범한 멘트 속에 ‘후보 선수들과 함께’라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는 걸.


내내 심드렁한 태도만 보이더니 블랜차드에 관한 질문을 받자마자 자세를 고쳐 잡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조금만 생각해 봐도 되는 일이다.


로스 카운티가 그다음에 만날 그리녹 모턴(Greenock Morton)은 2부 리그 소속으로, 이전에 붙었던 피터헤드보다 상위 전력이나 프리미어십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팀. 당연히 리그 컵 4강전에 셀틱을 상대했던 멤버들이 이어서 선발 출격할 확률이 높다.


그런데 감독은 여기에도 블랜차드를 내보내겠다고 공언했다.


스코티시 컵을 치른 후 다시 사흘 뒤에 정규 리그를 소화해야 하는 일정. 심지어 리그에서는 인버네스 CT와 올 시즌 세 번째로 격돌하는 하일랜드 더비. 이런 상황에서는 비중이 좀 더 떨어지는 컵 대회에 후보 선수들을 쓰면서 주전에게 휴식을 주는 게 보통인데.


풀타임을 뛰고 지쳐있을 그를 연달아 내보낸다는 건 다음 경기 선발 명단에서 제외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니면 이제 와서 그를 혹사시키기라도 하겠다는 얘긴가?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 능글맞은 이탈리안이 재미있는 화두를 던져준 셈이다.


세 경기를 연속으로 교체당하고, 끝내 해밀턴전에서는 선발에서 제외되기까지 했던 로스 카운티의 10번을 당분간 주요 플랜에서 빼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앞으로의 험난한 일정을 대비하기 위해 그의 체력을 비축해두려던 속셈이었던 건지.


블랜차드가 지니고 있던 위상을 생각해보면 후자로 짐작하는 것이 맞겠으나, 알렉산더 캐리가 스쿼드에서 이탈하고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과 필드 내에서 묘하게 흘러가던 기류는 오히려 전자를 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언론사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호의적인 몇몇 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은 로스 카운티가 더 높은 성공 가도를 달리는 시시한 이야기보다 스타덤에 올라선 그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으니까 말이다.


“역시 기회는 기다리면 오는 법이야.”


데일리 메일 소속의 마이클 길버트 같은 부류가 그러했다.


누구보다 딩월시의 작은 팀이 분열되길 바라고 있던 그는 행복한 얼굴로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신나게 키보드를 두들기며 일을 즐기는 중이었다.


[ 블랜차드는 스코티시 컵 이후에 있을 하일랜드 더비에서 또다시 벤치에 앉게 될 거라는 감독의 말을 듣고 격분했다. 내부 소식에 따르면 그는 어제 라커룸에서 팀 동료에게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이번 여름에 왔었던 셀틱의 제안을 뿌리치고 잔류를 선택한 것을 진심으로 후회한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


사실무근의 지어낸 헛소문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경험이 쌓일 대로 쌓여 이런 데에 통달해 있는 골수 마니아들이 아니고서야 일반인의 대다수는 언론이 보도해주는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뿐, 진위 여부에는 크게 관심이 없을 테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


블랜차드가 실제로 감독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지 아닌지 따위의 것들은 알 바가 아니라는 거다. 흔들어댈 수 있는 빌미를 얻어낸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며, 정확한 정보는 어차피 도청 장치를 몰래 달아두지 않는 이상 알아내기 어렵다.


물론 그런 걸 붙여두고 내부 상황을 엿들을 수 있다면 최상이겠지만.


“이 부분은 이렇게 쓰는 게 더 자극적이려나? 그래, 이게 더 낫겠어.”


잭 마틴 흔들기에 실패하여 좌절을 겪었던 이후, 워낙 물고 늘어질 건수가 없어서 에드빈 데 루어 같은 피라미들이나 휘젓는 나날을 반복하던 때만 해도 이렇게 블랜차드를 가지고 재미난 기사를 쓰고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입질이 전혀 오지 않아 잠잠하던 낚싯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다가 대어가 갑작스레 걸려든 기분이다. 길버트는 들뜬 마음으로 열심히 줄을 감아올리고 있었다.


“그 거만한 놈이 선수단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결국 이렇게 빈틈을 보이게 되어 있다니까.”


전술에 심취하여 지나치게 집착하는 감독들은 선수와 충돌을 빚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만들어둔 틀에 억지로 끼워 넣으며 도구 취급을 하거나 그 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배척해버리기도 하는 게 소위 전술가라고 불리는 작자들의 실태 아니던가.


캐리의 부상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대고 있지만, 아무리 전술 수정이 불가피해졌다고 해도 팀 내 핵심 선수를 갑자기 플랜에서 제외한다는 건 그저 기행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결국 그놈도 미치광이 전술가라는 게 드러난 거지.”


비록 악성 루머를 퍼뜨리기 위해 작성하고 있는 기사였지만, 길버트는 이것이 마냥 허구가 아닐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부임하자마자 스쿼드의 반 이상을 갈아엎고, 어린 선수들을 기용했던 인간이다. 이미 전례가 충분히 존재한다. 어쩌다 그 선수들의 활약과 요행이 잘 따라주어서 성적을 냈지만, 이런 타입들은 본인의 생각이 절대로 옳다 여기기 때문에 고꾸라지는 것도 금방이다.


지금처럼 독단적인 짓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 제 손으로 무덤을 파게 될 것이다.


우스운 건 블랜차드는 그 괴팍한 이탈리안이 리저브에서 올리고 기존의 주전들을 내쫓으면서까지 정성 들여 키운 애제자 중 하나라는 점이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자마자 전술의 문제를 이유로 들면서 진작 팽했던 선임자들처럼 홀대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잔혹하기 짝이 없는 처사란 말인가?


물론 진심으로 그러길 바라는 중이다. 고집불통의 전술가가 스스로 능력을 과신하여 팀의 충실한 일등 공신을 쉽게 내치는 순간, 셀틱과의 경쟁 싸움은 물거품이 되어버릴 테니.


“제자와 스승이 동시에 침몰해 가라앉는 꼴도 상당히 볼 만은 하겠어.”


길버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 Scottish Sports ] 델 레오네 “블랜차드는 모턴전에 선발 출전한다.”


[ Football Focus ] 리그 컵에 이어서 스코티시 컵까지 선발, 그 의도는?


[ Daily Mail ] “셀틱 갈걸 그랬어.” 결국 불만 터진 제임스 블랜차드


[ The Scotsman ] 로스 카운티, 클리프턴빌의 공격수 리암 보이스와 접촉 중


*******


모두가 블랜차드에 관한 이슈에 주목하고 있을 때 더 스코츠맨은 발 빠른 소식통을 이용하여 로스 카운티의 다른 뉴스를 제일 먼저 보도하는 데 성공했다.


뜬금없이 수면 위로 떠 오른 리암 보이스(Liam Boyce)라는 선수와의 링크.


첫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스코티시 내에서는 너무 생소한 이름이었기에 사람들은 그저 스쳐 지나갈 하나의 이적설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언론사에서도 본격적으로 기사가 줄줄이 나오더니, 링크에서 가시화, 가시화에서 확정에 이르기까지 고작 반나절이 소요될 정도로 무서울 만큼 빠르게 진척되고 있었다.



[ Scottish Sports ] 리암 보이스, 20만 파운드(약 3억 5천만 원)에 거래 완료



“미드필더가 더 시급한 거 아닌가? 공격수는 굳이 영입할 이유가 없는데?”


“공격수가 하나 더 필요하긴 했지.”


미적지근했던 반응은 뜨겁게 가열되면서 둘로 나뉘었다.


4-2-3-1을 쓰면서 공격수를 더 영입할 필요는 없었다는 쪽과 최전방을 혼자 도맡을 수 있는 공격수가 더 필요하다는 쪽으로.


하지만 그 공격수가 20경기를 뛰면서 13골을 넣었다는 정보가 퍼지자 로스 카운티의 팬들은 잭 마틴이 영입되던 당시의 그 막연한 설렘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골을 넣을 수 있는 공격수가 하나 더 추가된다면 나쁠 건 없을 테니까.


시즌이 진행되는 도중에 열리는 겨울 시장에서 팀의 핵심을 빼 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북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리그 격차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면 성사되기 어려운 이적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전 소속팀인 클리프턴빌이 낮은 순위까지 떨어져 올해 높은 목표를 바라보기엔 이미 늦어졌다는 것과 그들의 형편으로는 거절하기 어려운 액수를 제시받았던 것이 거래가 손쉽게 성사될 수 있는 원인이기도 했다.


선수와의 개인 협상은 훨씬 수월했다. 그로서는 쌓여나가고 있던 북아일랜드에서의 기록을 포기하면서까지 도전할 가치가 있는 곳에서 불러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 아침에 떠서 이렇게 순식간에 성사될 수가 있나?”


사람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된 이적 작업에 여전히 얼떨떨해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 당사자가 이미 북아일랜드를 떠나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여 하일랜드에 들어선 상황까지 왔을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일은 모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은밀하게, 그리고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


“후, 긴장되는데.”


보이스는 ‘Welcome to Dingwll’이라 쓰인 군청색의 표지판을 보고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운전대를 꽉 붙잡았다.


스코티시의 절대 권력, 셀틱의 굳건한 왕조를 위협하고 있는 기적의 군소 클럽.


로스 카운티의 명성은 그가 살던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 지역까지 흘러들어와 이미 유명해진 수준에 있었다. 주저 없이 이적을 결심한 건 그 때문이었다.


이 한적하고 초라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도시에서 어떻게 그 셀틱과 경쟁하는 팀이 나올 수 있었던 건지. 그 일원이 되어서 직접 느껴보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긴장으로 미세하게 손까지 떨고 있는 것은 근거가 없는 무성한 소문 중에서도 신경이 계속 쓰이던 얘기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등장한 팀이 어떤 스코티시 구단도 대적하지 못했던 전통 깊은 챔피언을 곤경에 몰아갈 정도면 얼마나 독기를 가득 품은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겠냐는 소문.


그리고 외국에서 건너와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베일에 둘러싸인 이탈리안 감독까지.


“침착하자. 침착해.”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로스 카운티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우연히 저승사자 그림을 보고 나서 더욱 신경 쓰이는 탓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환경의 두려움과 부풀어 오르는 기대심.


하일랜드 고원의 바람이 몰고 온 추위는 창문에 부딪혀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지만, 휩싸인 흥분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팀에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잘 적응해야 할 텐데.”


멀리서 모퉁이를 조금씩 드러내는 빅토리아 파크를 바라보면서 보이스는 한 번 더 마음을 다잡은 뒤 비장한 표정으로 페달을 밟았다.



“감독님은 지금 못 만날 거예요.”


“못 만난다니요?”


“분석 방에 들어가셨거든요. 언제 나오실지는 저희도 몰라요. 시간이 매번 달라서요. 거기 들어갔을 때는 노크도 하면 안 돼요. 한다고 해도 나올 사람이 아니지만.”


단단히 다지고 들어온 각오는 초장부터 흐트러져버렸다.


‘이게 다 무슨 말이지? 분석 방은 또 뭐고?’


미리 밖에 마중 나와 있던 대런 코너 단장과 인사를 나누기까지는 정상적인 흐름으로 가나 싶었는데, 곧이어 생각지도 못한 일에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로스 카운티의 선수로 합류한 첫날인데 감독을 만날 수가 없다니?


“그나마 어제 초저녁에 들어가셨다고 하니까······ 그래도 가능하면 오늘 볼 수도 있겠네요.”


마리 코넬이라고 하는 주근깨가 도드라져 보이는 여성은 이런 일이 익숙한지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선은 팀원들부터 만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라커룸으로 안내해 줄게요.”


“그건 제가 맡죠, 마리.”


사무실에 들어온 남자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 그래 줄래요? 이쪽은 팀의 주장을 맡은 리차드 브리튼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이제 같은 팀이니 리암이라고 불러도 되나?”


“얼마든지요.”


자신보다 신장은 작았지만, 강인함과 함께 품위가 느껴지는 주장이 건넨 손을 잡으며 보이스는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과연 셀틱과 경쟁할 팀을 이끌 정도의 인물인 것처럼 보였다.


‘역시 주장이 이 정도니까 그 밑에 있는 선수들도 예사롭지 않겠지.’


약간의 황당한 일로 긴장이 풀려버리고 말았지만, 라커룸에 가까워질수록 다시 가슴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길 안내를 맡던 브리튼은 한 곳에 멈추더니 여기로 들어가면 된다며 문 하나를 가리켰고, 보이스는 마른 침을 삼키며 천천히 그가 앞으로 계속 생활하게 될 공간으로 들어섰다.


“오오, 리암이다.”


“새로운 리암이야.”


그리고 곧장 눈에 들어온 건 한곳에 옹기종기 모인 선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쳐다보며 익살스럽게 환영하는 모습이었다.


“새로운······ 리암?”


“예전에 리암 마크센이라는 친구가 있었거든. 아쉽게도 적응을 못 해서 다른 팀으로 떠나버렸지만. 그래서 새로운 리암이라면서 반기는 거야. 이번엔 다들 잘 되길 바라고 있어.”


멍한 얼굴로 대꾸하는 보이스의 곁으로 또 다른 이가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난 스콧 보이드라고 해. 이 팀에서 부주장 역할을 맡고 있지. 근데 너 나랑 성도 제법 비슷한 거 같은데?”


“그러네. 스콧하고 성이 비슷해. 발음에 주의해야겠는걸.”


“어차피 이제 이름으로 부를 텐데 무슨 상관이야, 알렉스.”


“리암이라는 이름이 나는 참 멋있는 것 같아. 왠지 자식이 누군가에게 납치되기라도 하면 나쁜 놈들 모조리 때려 부수면서 구하러 갈 거 같은 이름이지 않아?”


“나도 그 영화 봤어.”


“난 록밴드가 먼저 생각나던데.”


“아, 고든 너는 잉글랜드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네.”


라커룸은 순식간에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생각하고 있던 것과 너무 다르다.


숨이 막혀올 정도는 아니더라도 뭔가 엄숙하거나 고요한 분위기이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클리프턴빌의 라커룸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아니, 그보다 더 화기애애한 모습이다.


‘독기를 가득 품은 맹수들의 집단?’


보이스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정말 말 그대로 근거가 없는 소문들이었으며, 그동안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고 나니 맥이 탁 풀려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속보오오오오오!”


누군가가 호들갑을 떨면서 라커룸의 문을 박차고 들어와 손에 든 신문을 크게 흔들어대더니 활짝 양옆으로 펼치면서 큰 소리로 기사를 읊기 시작한 것이다.


“블랜차드와 델 레오네 감독의 사이에서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갑자기 왜 신문을 읽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고작 한 줄 읽었을 뿐인데 여기저기서 피식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다음 리그 경기에서도 선발에서 제명될 거라는 통보를 받고 기어이는 불만이 터진 것이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여 라커룸에서 동료들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블랜차드는 셀틱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할 정도로 구단에 깊은 애정을 보여주었으나 지금처럼 감정의 골이 깊어지게 되면 앞날이 불투명해질 수 있는 상황에 놓일지도 모른다.”


“응, 재밌는 이야기네.”


“저 감독 바라기가?”


“쓸데없는 기사 좀 가져오지 말라니까, 에이든.”


내용만 보면 심각해 보였지만, 모두 귓등으로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신문을 들고 있던 그는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있는 누군가에게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마이크를 들이대는 시늉을 하면서 이번엔 기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블랜차드 선수, 정말로 셀틱에 가지 못한 걸 후회하고 계시는지? 한 말씀 해주시죠!”


블랜차드라 불린 남자의 오른손에 들고 있던 물병이 우드득거리며 살짝 찌그러지는 소리를 내자 몸을 움츠리면서도 끝까지 깐족거리는 모습이었다.


“신문, 저리 치워.”


“네에, 저리 치우라는 소식입니다.”


“킥킥킥.”


여기저기서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신없어······.’


보이스는 이 상황을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어, 못 보던 얼굴이네?”


느닷없이 나타나서 일순간 라커룸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주동자가 이제야 보이스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해맑게 웃으며 인사했다.


“반가워요! 난 에이든 딩월이라고 해요!”


“네, 반갑······.”


“이번에 온다던 그 공격수 맞죠? 이름이 리암 보이스라고 했던가? 편하게 리암이라고 부를게요. 이제 같은 식구니까. 저도 간단하게 에이든이라고 불러줘요.”


“아, 네······.”


“저도 공격수거든요. 골 기록은 아직 좀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노력 중이에요. 북아일랜드에서 상당히 많이 넣었던데. 혹시 가지고 있는 슈팅 노하우가 있는 거예요? 있으면 저 좀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여긴 제대로 성의 있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거든요.”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처음에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밝은 환경이었지만, 보이스는 다른 의미로 이곳에서 잘 어울릴 수 있을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아, 오셨네요.”


라커룸에서의 정신없던 인사치레가 끝난 후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자 이번엔 코넬이 활짝 웃으면서 맞았다.


그녀 옆에는 아까 전엔 못 봤던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넥타이를 맨 하얀 와이셔츠와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제대로 면도가 되지 않아 턱수염은 덥수룩했고, 간단한 세면만 하고 나온 모양새였지만, 그럼에도 드러나는 기품을 숨길 수가 없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리고 단번에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안토니오 델 레오네, 이 팀의 감독입니다. 어서 와요, 리암.”


“예······. 감사합니다.”


보이스는 내민 손을 맞잡았고, 그가 짓는 미소를 마주하자 신기하게도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


< 14-15 Scottish Cup 5 Round >

그리녹 모턴 : 로스 카운티

2015년 2월 1일 (일) 16:00

캐필로우 파크 (관중 수 : 4,369명)



[로스 카운티 / 4-4-2]

FW : 필립 로스 / 잭 마틴

MF : 제임스 블랜차드 / 대런 케틀웰 / 리차드 브리튼 / 앤드류 톰슨

DF : 고든 스미스 / 대니 패터슨 / 스티브 샌더스 / 딜런 갈브레이스

GK : 데이비드 밀스



“요즘 나오고 있는 불화설은 정말인 걸까, 조지?”


“그따위 헛소문을 믿어?”


케니 풀러의 물음에 조지 맥도넬은 정색하며 다그쳤다.


“그저 과장된 부풀림이야! 고작 한 번 선발에서 빠지니까 이때다 싶어서 흔들어대는 언론사 놈들이 웃기는 거라고. 난 절대 믿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는 한데······. 이번 경기에 정말 선발로 나왔잖아.”


풀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여전히 교체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말이야. 이런 상태라면 정말 다음 리그 경기에 나올 확률이 낮은 거 아니야?”


“그건······.”


하지만 다음 질문에 맥도넬은 결국 말을 흐리고 말았다.


이미 두 골을 넣고 승기를 잡아놓은 상황이다.


선발 멤버 중 가장 영향력이 미미했던 톰슨은 후반 65분에 부팔과 교체되어 나갔고, 70분에는 이번에 합류한 리암 보이스가 투입되면서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75분이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블랜차드는 필드에서 뛰고 있다.


선수가 불만이 있다는 얘기는 콧방귀도 뀔 생각이 없는 맥도넬이지만, 감독이 현재 전술 때문에 그를 뒷순위로 미뤄둘 가능성은 마냥 배제할 수만은 없다.


“몇몇 전문가들이 블랜차드를 쓰기가 모호해졌다 말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해리 윌슨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정말 다음 리그에 선발로 나올 것 같지가 않은데.”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야.”


상대가 전력이 약한 팀이긴 하지만, 오늘 블랜차드의 활약은 마치 감독이 틀렸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엄청난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


지공 상황에서 브리튼이 박스 외곽에서 찍어 올려준 크로스를 머리에 맞추면서 선제골을 만들었고, 이후 갈브레이스의 크로스를 골문 앞에서 받아 이마로 가볍게 옆으로 떨어뜨려 놓으면서 쇄도해 들어오던 브리튼의 발에 연결해주는 플레이로 1골 1어시스트.


이 정도면 벤치로 불러들이면서 관중들의 박수를 받게 해줄 만도 한데.


[모턴 선수들, 쉽게 전진하지 못합니다. 블랜차드의 압박으로 볼을 빼앗기는 모턴. 이어서 들어가는 패스, 리암 보이스에게 도달합니다.]


“오오!”


[리암 보이스, 달려 들어갑니다. 수비가 전부 뒤처진 상황! 옆으로 볼을 주고!]


“골이다!”


맥도넬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복잡한 생각들은 집어치우고 눈앞에 펼쳐진 추가 골에 일단 기뻐하기로 했다.


[블랜차드의 압박으로 시작된 공격과 패스, 리암 보이스의 데뷔전 어시스트, 잭 마틴의 쐐기 골로 모턴의 추격 의지를 완전히 꺾어놓습니다!]


“이로써 오늘 수훈은 블랜차드의 몫이 되겠는데.”


윌슨이 말했다.


“그 공로에 대한 화답은 결국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나서야 받을 것 같지만.”


마지막 교체는 에이든 딩월이었고, 박수를 받으며 나가는 건 잭 마틴이었다.


“그럴 것 같네.”


맥도넬도 결국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면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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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녹 모턴 0 : 3 로스 카운티 >

제임스 블랜차드(32‘)

리차드 브리튼(61‘)

잭 마틴(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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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빅토리아 파크.


“이쪽으로!”


손을 흔들며 요청하는 부팔에게로 들어간 패스가 케틀웰의 다리 사이를 통과한다. 이어서 월리스가 앞을 가로막아 섰지만, 유려한 발재간에 스텝이 꼬여버리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철썩 -


가볍게 골망을 흔들어낸 부팔이 입고 있는 조끼를 잡아당겨 엠블렘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더니 양팔을 벌리며 월리스를 향해 도발적인 셀레브레이션을 취해 보인다.


“하, 역시 넌 드리블이 대단한 것 같아.”


월리스는 천천히 일어나며 웃음으로 화답했다.


“얄밉긴 하지만, 정말 네 기술은 막기가 어려운걸. 우리 팀에 있는 게 다행일 정도야.”


“그렇게 대놓고 칭찬하면 도발한 게 무안해지는데.”


“세인트 미렌이랑 경기했을 때 나왔던 그 골은 아직도 생생하지.”


두 사람의 대화에 케틀웰이 끼어들었다.


“그때는 도저히 해답이 안 보인다고 생각했었는데, 소피앙 너 혼자서 다 만들어낸 수준이었으니까. 나는 진짜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았잖아.”


“아니, 갑자기 왜 또 분위기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교체로 투입된 이후 양쪽 발을 한 번씩 사용해 두 명의 수비를 제쳐내고 골망을 흔들었던 당시의 짜릿함은 부팔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아 한동안 잠자리에서 뒤척이기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부터 달라졌다.


부팔은 이제 로스 카운티 내에서 테크니션의 일인자로 거론되는 중이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전문가들 또한 스코티시를 통틀어서 상위권을 다투는 윙어라는 평가를 내리기 시작하고 있다.


팀원들은 평소에도 라커룸에서 친절하게 대해주지만, 이제는 필드 내에서도 선수로서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으며, 패스 하나를 보내줄 때도 그 볼 안에 뭔가를 해주리라는 기대가 담겨있음을 느끼는 중이다.


확실히는 몰라도 그중 몇몇은 크게 내색은 안 할 뿐, 자신에게 경외심 비슷한 감정을 가지기까지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여튼 다음에는 나도 쉽게 뚫릴 생각은 없으니까······.”


“에이 참, 괜찮다니까!”


월리스의 말을 가로막는 시끄러운 소리에 세 사람은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딩월이었고, 톰슨이 그에게 손목을 붙잡혀 질질 끌려오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미 옅게 붉어진 볼을 애써 감추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면서.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딩월은 소심한 청년을 끌어다 놓고는 가볍게 땀을 훔쳤다.


“우리는 다 같은 한 팀이잖아. 나한테 털어놓았던 것처럼 당당하게 얘기해 보라니까?”


“무슨 일이야, 에이든?”


“앤드류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제가 직접 데려왔어요.”


“누구한테?”


케틀웰의 물음에 딩월은 고개로 부팔을 지목했다.


“나?”


부팔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고, 딩월이 끄덕이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톰슨 쪽으로 향했다.


“······.”


“정말인가 보네.”


억지로 끌려왔긴 했지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확실히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얘긴데?”


부팔의 물음에도 톰슨은 여전히 불안한 듯 몸을 꼬면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짧게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서도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직접 얘기해 줄까?”


“아니! 내가 얘기할게요!”


톰슨은 딩월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완강한 의사 표현을 하고는 다시 부팔을 바라보았다.


“그······ 그러니까······. 내가······ 아니, 나······ 나한테······.”


“······.”


시선을 회피한 채 답답할 정도로 말을 더듬던 톰슨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더니 이내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한테 드리블 좀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작가의말

조금씩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이번 주말도 잘 마무리하시고 알찬 한주를 보내시기 바라겠습니다. 

제 글을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 _)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foir  님

이풍 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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