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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손 님의 서재입니다.

무주택자 무신론자 무연고자 김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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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손
작품등록일 :
2020.05.1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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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2 23:14
연재수 :
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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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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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
글자수 :
414,107

작성
20.07.20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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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44화 - 새로운 시작 (3)

DUMMY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가입식은 거창한 행사가 아니었다. 우려했던 것처럼 조직에서 높은 사람이 참석하는 자리도 아니었다. 그 의식은 아주 허름한 창고 같은 곳에서 몇몇 행동대원 같은 남자 여러 명이 둘러 서서 특별한 절차나 권위 없이 간단하게 진행됐다.


“한 대 피워.”


반사적으로 변소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해 굳이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물론 여기에 오기 전에 점심을 먹으면서 조직에 합류하면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지나가듯 말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런 순간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가, 감사합니다.”

“귀한 건데 그래야지.”


남자 한 명이 건네준 담배를 받아 손에 쥐었다. 흔히 피우는 담배와는 달리 직접 종이를 말아 만든 거라 굵기가 일정하지 않아 울퉁불퉁했고, 조금 가느다란 느낌이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넣어 라이터를 꺼냈다. 이제 불을 붙이는 일만 남았다.


“물건을 팔려면 제품부터 파악해야지. 어서 피워.”

“아, 네.”


중독성 물질을 종이로 말아 만든 긴 원통형 물체를 불로 가열하여 그 물질이 연소하면서 생긴 연기를 폐 안으로 빨아들이는 행위는 무척이나 익숙했지만, 지금 손에 쥔 건 평소에 이용하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중독성 물질이어서 긴장이 되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는 덜 되어 있었다.


“어이! 신참! 빨리 빨리 하자고!”

“네!”


남자의 재촉에 서둘러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였다. 일반 담배라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있었는데 전혀 다른 향과 완전히 새로운 질감의 연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지자마자 반사적으로 기침을 토했다. 행동대원들이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야, 누가 그걸 무식하게 처음부터 그렇게 많이 빨아. 담배는 펴 봤냐?”

“네, 담배는 많이 펴 봤는데··· 콜록.”

“살짝 돌았네, 저 자식.”


뒤쪽에 있던 남자가 한 마디 거들었다. 모욕감을 느낄 새도 없이 신체에 변화가 찾아왔다. 상한 걸 먹고 체했을 때처럼 속이 메슥거리고 식은땀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의 표면으로 신경이 집중되어 살짝 뜨거운 감각도 있었다.


“한 모금 더 해 봐. 이번에는 조금만.”

“네.”


남자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지금 상태의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주 조금이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한 모금을 아주 살짝 빨아들였다. 처음에 길게 들이마셨을 땐 누가 뱃속까지 기다란 풍선을 집어넣은 기분이었다면, 이번에는 목을 건드리는 느낌만 날 정도였다.


“이리 와서 앉아.”


남자가 편의점 앞에 흔히 널려 있는 하얀색 플라스틱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창고에 있는 다른 사람은 변소희와 다른 두 남자뿐이었다. 마치 면접 자리처럼 의자 세 개와 한 개가 마주보는 형태로 놓여 있었는데, 나보고 앉으라고 한 의자는 의외로 세 개의 의자 중 가운데 자리였다.

앉으라고 말한 남자는 외따로 떨어진 의자에 앉았고, 다른 두 남자가 내 양 옆에 자리를 잡았다. 변소희는 계속 창고 입구 쪽에 서 있었다.


“거기도 앉을래? 앉을 거 하나 갖다 줘?”

“괜찮아. 여기 서 있을래.”

“맘대로 해.”


다른 남자들도 내가 피운 것과 같은 모양의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남자가 말했다.


“환영한다, 미친 놈아. 편하게 있어. 어차피 오늘은 별 거 없으니까.”

“아··· 네.”


자리에 앉아서 엉겁결에 한 모금 더 빨았는데, 더 안정된 자세에서 피워서 그런지, 아니면 벌써 이 새로운 물질에 적응이 된 건지 연기가 더 편안하게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다시 연기를 내뿜는 모습을 보더니 왼쪽에 앉은 남자가 놀란 듯 말했다.


“이야, 벌써 자세 나오는데?”

“미친 놈이잖아.”

“타고 났네. 진작에 들일걸 그랬어.”


세 남자가 서라운드 음향처럼 껄껄대며 웃었다. 그 와중에 나는 정신이 살짝 몽롱해지는 걸 느꼈다. 옆에 앉은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동굴 속에서 메아리 치는 것처럼 희미하게 겹쳐 들렸다. 어떤 사람은 이걸 피워도 아무 느낌을 얻지 못한다고도 하던데 나한테는 아주 잘 맞는 모양이었다.

정신이 희박해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감각이 둔해지고 주위 사물이 분간하기 어려운 형태로 뭉그러졌다. 사람들은 자꾸 주변에서 웃고, 어느새 나도 웃고, 뇌세포가 모든 즐거움을 일순간에 빨아들인 것처럼 쾌락이 머리에 콱 꽂힌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처음 경험해 보는 사람에게 더 효과가 강력한 모양이었는지, 내가 뭐라고 할 때마다 사방에서 폭소를 터뜨렸다. 미쳤다, 돌았다,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말들이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맴도는 듯했다.

배가 고팠다. 뭐라도 당장 입으로 쑤셔 넣고 싶은데 눈 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 안을 돌아다니는데, 뭐가 그렇게 웃긴지 뒤에서 웃음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저 새끼 배 고프네.”

“아, 맞네! 그거네!”


지들끼리 말해놓고 또 좋다고 한바탕 더 시끄럽게 웃었다. 계속 먹을 것을 찾아 걷다 보니 어느새 변소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것을 한 모금 더 피워 그녀의 얼굴에 뿜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정신 차려요.”

“이거 해 봤어요?”

“당연히 해 봤는데, 다행히 나한테는 안 받더라구요.”

“허, 안 됐네요. 지금 내 기분이 어떤 줄 알면 엄청 아쉬울 텐데.”


말이 끝나자마자 기관총처럼 웃어 젖혔다. 변소희가 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으로 가져갔다. 갑자기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온 몸이 허전했다.


“물론 그렇겠죠. 아무리 그래도 지금처럼 너무 빠져 버리면 이 악마의 손아귀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글쎄요.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진작 빠졌을 것 같은데요.”

“정신 차리라구요.”


변소희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다른 남자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나와 그녀가 사실은 이 조직을 위해 이 조직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하지만 지금의 나는 원래의 내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라는 말도 똑똑히 알아들었지만, 알아듣는 것과 실행에 옮기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요. 흐흐흐.”

“알았어요. 그럼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줄게요.”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 때 변소희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정신이 몽롱한 내가 꾸며낸 눈빛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런 모습을 본 것은 사실이었다.


“이따가 다시 얘기해요.”

“지금이 진심일 수도 있는 거예요.”

“알겠어요. 일단은 새로 사귄 친구들한테 가 봐요.”


안 그래도 고개를 돌려 내가 앉아있던 쪽을 바라봤더니 세 남자가 빵 봉투를 흔들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 빵이다!”


당장 달려가서 저들이 흔들고 있는 저 빵을 입 속에 쑤셔 넣고 싶었다. 허겁지겁 달려가다가 바닥에 넘어지자 남자들의 환호가 더 거세지고 웃음 소리는 더 거칠어졌다. 어떤 놈은 배를 잡고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도 이것보다는 덜 개판이었던 것 같다.

어디가 다쳤는지 통증도 느끼지 못한 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원래의 목적지로 달려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내 무릎 위에 온갖 종류의 빵이 쏟아졌다. 낱개로 포장해서 파는 크림빵, 단팥빵, 소보루빵, 소라빵, 피자빵 등등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흔히 파는 것들이었다.

눈이 돌아갔다. 난폭하게 포장지를 뜯어 내용물을 입에 넣었다. 먹는 게 이렇게 행복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게걸스럽게 먹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적어도 확실한 건 끊임없이 먹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먹을 것이 입 안을 통과했고, 배는 전혀 불러지지 않았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내 왼손에 새로 붙인 꽁초를 쥐어주었다. 그렇게 빵을 먹고 연기를 마시고, 먹고 마시기를 반복했다.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순간에 정신이 말짱해졌다.


알고 보니 정신을 잃은 후에 다시 깬 것이었다. 어딘가에 누워 있었고, 이마에 무언가가 올려져 있었다.


“깼어요?”


변소희의 목소리였다. 누운 채로 눈알을 굴려봤지만 집은 아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더니 허름한 사무실이었다. 이마에 얹어져 있던 수건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여긴 어디에요?”

“조직의 지역 사무실이에요. 지금은 다 나가고 우리만 남았어요.”

“아···”

“앉아요. 그것도 술이랑 비슷해서 숙취라는 게 있거든요. 물론 나중에는 술도 드셨지만.”

“몇 시에요?”

“오후 5시 반이에요.”

“그것밖에 안 됐어요?”

“다음 날.”

“아···”

“생각은 나요?”

“빵 먹은 것까지는 나는데···”

“그럼 20퍼센트도 기억을 못 하시는 거네요. 축하 드려요.”

“그 뒤에도 이상한 짓을 많이 했나요?”

“흠. 모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충격 먹을 수도 있으니까 말 안 할게요.”

“네, 그래요.”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오늘 같은 전날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회오리 쳤다. 기억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치스러운데, 더 충격적인 일을 벌였다니 상상하기도 겁이 났다.


“그래도, 무결 씨의 진짜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조직원들에게는 확실히 신뢰를 얻었어요.”

“그런가요?”

“문제는 중독이에요. 지금부터는 정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무결 씨가 이 조직에 들어간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의심을 사지 않는 선에서 어제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피해야 돼요.”

“알겠어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답은 쉽게 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처음 접한 그것의 유혹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력했다. 수치스러운 기억과는 별개로 한 번 더 경험해보고 싶었다. 또 한 번 난장판을 만들어도 좋으니 그 때의 쾌락을 느끼길 원했다.


“힘들 거라는 건 알아요. 주변에서도 망가지는 사람들은 수 없이 많이 봤으니까. 그런데 그거 알아요? 이 조직에서도 오래 살아남는 사람들은 조절하는 사람들이에요. 약에 나가 떨어지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어요? 몸도 돈도 감당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절제한다고 해서 무조건 의심받지는 않을 거에요. 모든 건 김무결 씨에게 달렸어요.”

“네. 그렇겠네요. 알겠습니다.”

“좋아요. 오늘은 이만 집에 들어가세요. 저는 더 볼 일이 있어서 여기 남아야 하거든요.”

“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변소희는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뭔가를 열심히 타이핑하고 있었다.


“변소희 씨.”

“네?”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제는 죄송했어요.”

“한 번만 더 사과할 일 만들면 그 땐 저도 안 도와줄 거예요. 어차피 중독자는 말로 설득되지도 않지만요.”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기분이었다. 가입하라고 한 건 변소희였는데 살짝 적반하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밖으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을 검색하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무결 씨!”


시선이 향한 곳에는 유선형 대리가 서 있었다. 아니, 이제는 어디에서 어떤 직급으로 일하는 지는 모르는 유선형 씨가 서 있었다. 너무 오랜만이어서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그녀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어··· 오랜만이네요. 유선형 씨.”

“그렇게 안 반가우세요? 요즘 이 쪽에서 일하세요?”

“아, 네, 안 반가운 건 아니고 좀 갑작스러워서요. 일은 뭐··· 이 근처에서 일하고 있는 셈이죠.”

“그렇구나··· 연락을 할까 하다가 자존심 상해서 그냥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만나네요.”

“그러게요.”

“저 아직도 대답 못 들었는데, 언제 대답해주실 거예요?”

“네?”

“질문이 뭔지 까먹으셨어요? 다시 물어봐 드릴까요?”


질문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대답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기만 한 채로 길거리에 서 있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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