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 김무결의 임무 (1)
불 판에 삼겹살을 올려놓자마자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미세한 기름이 튀기 시작했다. 변소희가 맞은편에 앉아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고기가 익는 모습을 말 없이 지켜보았다.
“이런 자리까지 만들지 않으셔도 되는데.”
변소희가, 아니 마약 조직을 위해 일하는 이 이중 첩자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삼겹살을 보고 저렇게까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연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에요, 생명의 은인인데 사실 삼겹살로도 부족하죠.”
“하긴 그렇네요. 기왕이면 한우로 사 주시지.”
이인 씨가 변소희에 대한 발표를 하고 며칠 뒤, 사무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불러내서 오늘 같은 자리를 마련하라고 했었다.
“뭐라구요? 변소희하고 저녁을 같이 먹으라구요?”
말도 안 되는 부탁이라고 생각했다. 사무실에서 몇 번 마주쳤을 때도 적대감이나 어색함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써야 했는데, 아예 단 둘이 저녁을 같이 먹는다는 건 무리한 요구였다.
“변소희가 가진 정보가 필요해요.”
이인 씨가 아주 순진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그런 이야기는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정보···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무결 씨가 딱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우리가 시키는 대로 따라와요.”
“아니, 뭐가 딱인데요?”
이인 씨가 눈을 굴렸다. 왜 이렇게 질문이 많으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사람한테 자꾸 토 달 거예요?”
“그건 그렇지만···”
“하기 싫으면 나가시든가.”
“네?”
대놓고 협박까지 하는 그녀였지만 협박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굉장한 부탁을 아무 것도 아닌 일처럼 말하는 그녀의 정신 세계가 궁금했다.
“어려운 일 아니에요. 일단 목숨 구해줘서 고맙다고 삼겹살 쏘겠다고 하세요.”
“왜 목숨 구해준 사람한테 삼겹살을···”
“초면에 너무 비싼 거 사면 서로 경직돼서 안 좋아요. 친해지는 게 목적이니까 시키는 대로 해요.”
“그럼 그냥 삼겹살만 같이 먹으면 되는 거에요?”
이인 씨가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내게 한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캬~”
변소희가 소주를 한 잔 들이키더니 오만상을 찌푸리며 쾌감을 표현했다. 기자라서 그런지 여자 치고 털털한 모습이었다.
“여기 고기 아주 맛있는데요?”
변소희가 한 점 더 입에 넣기 전에 말했다. 사실 이인 씨가 추천해준 곳이었는데 다른 곳에 비해 가격은 좀 있었지만 고기 질이 월등히 좋은 느낌이긴 했다.
“많이 드세요. 오늘은 제가 쏘는 거니까.”
“사실 이런 대접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닌데, 너무 맛있어서 계속 들어가니까 염치가 없네요.”
“아닙니다. 한 잔 더 드세요.”
그녀의 잔에 소주를 채우며 말했다. 이것도 이인 씨가 다 시킨 일이었다. 잔이 비면 무조건 가득 채우고, 병이 비면 무조건 추가하라고. 그녀를 취하게 만드는 게 오늘의 미션이라고 했다.
“내일 일 어떡하지. 큰일났네.”
변소희는 계속 먹었고 따라주는 술도 빠르게 비웠다. 모든 것이 이인 씨의 예상대로 흘러가서 살짝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 언니, 삼겹살만 맛있으면 소주는 금방 두 세 병 비우는 타입이거든요. 변소희만 많이 마시는 거 티 안 나게 무결 씨도 적당히 보조 맞춰요.”
이인 씨의 조언이었고, 지금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그녀의 말을 뒷받침했다.
“그런데, 저 그렇게 밖에 있어도 될까요?”
삼겹살 미션을 수행하기 전에 드는 가장 큰 걱정이었다. 또 누군가가 와서 나를 잡아들이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 그런데 이인 씨가 콧방귀를 뀌며 내 말을 무시했다.
“정신 차려요. 지금 같이 삼겹살 먹을 사람이 조직원이라구요! 그런 자리에 사람을 불러서 무결 씨를 잡아가겠어요? 어차피 무결 씨를 조직 밖에 두고 감시하려는 게 목적인 것 같으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알겠어요.”
“여자는 몇 명이나 꼬셔봤어요?”
“네?”
“질문 다시 들려드릴까요?”
“사귄 건··· 한···”
생각을 해봤다. 연애에 특별히 목마른 타입은 아니지만 사귄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는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오, 생각해야 될 정도로 많아요? 안 그렇게 생겼는데.”
“···여덟 명?”
“딱이네요. 길게 사귄 적 없죠?”
“그··· 그렇긴 하죠.”
“썸 타는 거 좋아하는 타입이네. 그럼 됐어요. 걱정 안 할게요.”
그 땐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다.
“왜 나만 마시는 것 같지? 짠해요, 짠~”
어느새 변소희는 기분이 올라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동작으로 삼겹살을 집어 입으로 쏙 넣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저런 사람이 마약 조직을 위해 일한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속사정이 얼마나 은밀하고 추악할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런 생각이 얼굴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술을 몇 잔 마셨더니 취기가 오르고, 취기가 오를수록 조금씩 대담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짠~!”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건배했다. 물론 임무를 수행하는 자리였지만 이렇게 바깥에서 자유롭게 고기를 구워먹으며 술도 한 잔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고맙게 느껴졌다. 차 사고가 난 뒤에 한 번도 이런 자유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우리 고기 쪼끔만 더 먹을래요?”
변소희는 이미 취한 것 같았다. “쪼끔만”을 발음할 때 엄지와 검지가 닿을락 말락 하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그 모습이 코미디언처럼 과장돼 보여서 웃음이 나려는 걸 참아야 했다.
“여기 삼겹살 2인분···”
“아니! 삼겹살 말고 항정살 두 개 더 주세요!”
변소희가 나의 주문을 가로막고 자신이 원하는 메뉴를 외쳤다. 살짝 큰 목소리여서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이 쪽에 눈치를 주는 다른 손님은 없었다.
“나 화장실 갔다올꺼니깐, 여기 꼼~짝 말고 앉아 있어요, 알았어요?”
“네, 다녀오세요.”
변소희가 휘청거리며 젊은 남자 종업원에게 화장실 위치를 물어보았다. 그는 뭔가 큰 인형이 달린 열쇠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면서 내 쪽에 슬쩍 눈길을 주었다. 왜 잘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화장실까지 데려다 주지 않느냐는 듯한 뉘앙스였다.
“소희 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변소희가 살짝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내 쪽을 봤다.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갠차나요, 노땡큐!”
발음이 많이 새고 있었다. 확실히 많이 취해 보였다.
그런데 그 때 전화가 왔다. 이인 씨였다.
“여보세요?”
“데려다 주지 마세요.”
“네? 그걸 어떻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대체 어디에서 나를 보고 있는 걸지 궁금했다.
“두리번거리면 내가 보일 줄 알고?”
그 말에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어차피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닌 것 같았다.
“생각보다 잘 하고 있어요. 여러 번 더 만나게 하려고 했는데, 그냥 오늘 2단계로 넘어가도 될 것 같아요.”
“네? 뭐라구요?”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빽 질렀다. 변소희에게 화장실 열쇠를 건네줬던 종업원이 다시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자리에 앉으며 이인 씨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하지만··· 제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요!”
“풋. 그건 내 알 바 아닌데요. 2단계 안 할 거면 집에 들어올 생각 말아요.”
전화가 뚝 끊어졌다. 아무리 얹혀살고는 있다지만 수시로 거주지를 가지고 협박하는 그녀가 얄미웠다. 조금 뒤 변소희가 다시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했는지 긴 머리의 가장자리가 촉촉해 보였다. 걸음걸이는 더 꼿꼿한 것 같았다.
“아, 오늘 너무 달린 것 같아요. 아무래도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변소희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화장실에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온 모양인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오늘 ‘2단계’를 실행해야 하는 몸이었다. 그녀를 집에 보내버리면 나는 되돌아갈 집이 없어져 버리는 상황이었다.
“아직 항정살 안 나왔잖아요. 일단 그것부터 먹고 생각해요.”
살짝 애원조로 말했다. 변소희가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아 내가 오버한 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들 무렵 그녀가 깔깔거리며 식탁을 가볍게 내리쳤다.
“호호호, 그렇네요. 내가 시켜놓고 까먹었네.”
“그럼 까먹은 기념으로 한 잔 짠!”
이런 대사가 잘도 나온다 싶었다. 생존이 걸린 문제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 놓인 내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짜안~!”
변소희는 다행히 즐거워 보였다. 그녀의 술잔을 꽉 채우고 나니 병이 비워져서 종업원을 향해 손을 들었는데, 변소희가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왜요? 또 뭘 더 시키시려구?”
화장실에 가서 술이 좀 깨서 돌아온 줄 알았더니 노골적으로 내 손을 꽉 쥔 그녀의 모습은 한 층 더 흐트러져 보였다. 훅 들어온 그녀의 스킨십에 갑자기 긴장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아··· 그··· 술병이 비어서··· 아니··· 소주를 시키려고···”
“뭐야, 귀엽게.”
그녀가 내 손을 놓아주면서 말했다. 그러더니 방금 채워 준 잔을 단숨에 비워 머리 위에 털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금새 머리가 헝클어져 얼굴 앞으로 쏟아지고 부스스해 보였다.
“오늘 이렇게 맛있는 걸 사주셨는데, 쏘주로 마무리하면 섭하죠. 내가 2차 쏜다!”
“아··· 그럴까요, 그럼?”
평소 같았으면 너무 취했으니까 집에 가자고 할 타이밍이 이미 지났음에도, 변소희가 직접 준 기회를 덥석 물었다. 이인 씨가 말한 2단계를 수행하려면 변소희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꽐라가 되어야만 했다.
“앙주 머그러 갈뤠요? 앙주? 위스끼! 위스끼 마셔여?”
이미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을 데리고 양주를 마실 만한 곳이 있나 싶기도 했다. 유선형 대리와 함께 갔던 위스키를 파는 곳은 이런 사람이 오면 정중히 돌려보낼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어디 아는 데라도 있으세요?”
“아는뒈 뫈쵸. 다 아롸. 내가 다아롸!”
이번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컸다. 조금씩 우리 테이블을 바라보는 눈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일단 나갈까요? 나가서 정해요, 어디로 갈지.”
“죠은 생각! 옥~케이!”
계산을 하고 길거리에 나왔는데 변소희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버렸다. 긴 머리가 그녀의 몸 전체를 덮어 마치 작은 초가집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변소희 씨, 괜찮으세요?”
“아임 오케이, 파인 땡큐.”
그녀가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2차에 가지 않고도 2단계를 실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몸도 못 가누는 상태였다.
“집으로 갑시다.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아니, 안 과도 돼. 시러.”
길거리에 앉아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2차만을 외치는 그녀 곁에서 택시를 불렀다. 주소가 뭔지 형식적으로 그녀에게 묻긴 했지만 대답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사전에 이인 씨가 변소희의 집 주소를 알려줬었다.
얼마 뒤에 도착한 택시에 그녀를 욱여 넣고 나도 옆자리에 탔다.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기가 무섭게 이인 씨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나이스 이제 마지막 단계만 잘 해주세요]
[마지막 단계를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우려의 문자를 보내자마자 이인 씨의 문자가 또 도착했다.
[모두 무결 씨만 믿고 있어요]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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