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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손 님의 서재입니다.

무주택자 무신론자 무연고자 김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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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손
작품등록일 :
2020.05.11 20:07
최근연재일 :
2020.10.02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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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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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48
추천수 :
359
글자수 :
414,107

작성
20.07.03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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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37화 - 정이인 (2)

DUMMY

아지트에 벌레를 기르기 시작한 다음부터 그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살아있는 사람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놓고 그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쾌감을 주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는 사실이 억울할 정도였다.


사람을 잡아두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건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정보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재미였다. 물론 후자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물리적으로 살아있고 내 눈 앞에 존재하는 생명체를 다룬다는 건 가상 공간의 디지털 신호보다 훨씬 실감나고 흥분됐다.


하지만 새로운 취미가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구천둥이 찾아와서 나의 재미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잠시 주방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놈이 나를 불러 세웠다.


“잠깐 얘기 좀 하실래요?”

“당신이랑 할 얘기 없는데요.”

“정말 그럴까요? 하는 게 좋을 텐데요.”


언제나 기를 굽히지 않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놈을 볼 때마다 묘한 감정을 느꼈다. 놈의 건방진 태도가 거슬리면서도 동시에 그런 모습에 끌리기도 했다. 이번에도 쓸데없이 허풍을 치는 듯한 놈의 모습이 가소로웠지만, 잠깐 얘기를 듣는 게 나쁘진 않겠다고도 생각했다.


“뭔데요?”


팔짱을 끼며 물었는데, 놈이 내 뒤 쪽을 보았다가 다시 나를 보며 말을 잇지 않았다. 뒤에 뭐가 있나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 가사도우미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데서나 할 얘긴 아니다, 뭐 이런 의미였다.


“회의실로 가죠.”


그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나도 모르게 이상한 상상을 했다. 어쩌면 별 얘기도 아닌데 단 둘이 있고 싶어서 저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쩌지, 난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인데. 그런 상황에선 또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하나 잠시 쓸데없는 고민까지 했다.


회의실 안 쪽에 자리를 잡고 놈이 어디에 앉는지 지켜봤는데, 의외로 나와 가장 먼 쪽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내심 가까운 자리를 잡을 줄 알았는데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할 얘기라는 게 뭐죠?”

“일단, 두 가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뭐, 시간이 남아 도는 게 아니니까 빨리 얘기하고 끝내죠.”

“그럴까요, 그럼?”

“네.”


놈은 회의용 책상 위에 두 팔을 얹으며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별 볼일 없는 팔뚝에 몸도 가늘었지만 짙은 눈썹과 반항적인 외모에 더 눈이 갔다.


“일단 두 가지를 말하기 전에, 한 가지 약속을 받아내고 싶네요.”

“뭐가 이렇게 복잡하죠? 내가 엄청나게 한가하다고 생각하나 봐요?”

“확실한 건 내가 당신의 비밀을 두 가지나 알아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비밀을 지켜주는 대신 제안을 하려고 불렀구요.”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아지트에서 기르는 벌레에 대해 알아냈다는 걸까? 만약에 그렇다면 저 놈은 또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지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아낸 게 뭔지 알아야, 또 제안이 뭔지를 알아야 협상을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에요?”

“좋아요, 그럼 말할게요.”

“빨리 좀 부탁할게요, 내가 좀 바빠서.”

“일단,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냈어요.”

“두 사람이라면?”

“당신이랑 이 집 매니저라고 불리는 사람의 관계겠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신경이 곤두섰다. 만약에 알아냈다면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걸까?


“우리 관계가 뭐 어때서요?”

“부부잖아요, 둘이.”

“뭐··· 뭐라고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랑 그 인간이 부부라니, 저 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들어나 보죠. 그리고 우리가 부부인들, 누가 알게 되는 게 그렇게 엄청난 일도 아닌 것 같은데요?”

“부부가 아니면 왜 매일 밤 같은 방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네요. 우리 앞에서 그 사실을 숨기는 이유도 궁금하구요.”

“부부가 아니에요. 숨긴 거 없어요.”

“흠, 그럼 사귀는 사이도 아니라는 건가요?”

“아니, 나랑 그 사람이랑 나이 차이만 스무 살이 넘는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사람이랑 사귀겠어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매니저 님이 당신을 보는 눈빛이··· 그러니까 아주 순간적인 눈빛이긴 했는데, 내가 그걸 우연히 엿봤거든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이었어요. 아닌 척 숨기고 있다가 아무도 안 본다고 생각한 그 찰나에 당신의 뒷모습을 쓸어 내리는 듯한 다정한 눈길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잊혀지지를 않네요.”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그 인간이 나를 다정한 눈빛으로 봤다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서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구천둥은 나의 그런 표정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갸웃했다.


“더 이상 못 듣겠네요.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로 나한테 제안을 하려고 했다는 것도 잘 이해가 안 돼요.”

“잠깐! 아직 두 번째가 남아있는데요.”

“그랬던가요. 빨리 하고 치워버리죠, 우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헛소리를 하면 회의실 밖으로 나갈 작정이었다. 놈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뻔뻔하게도 당당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 얘기한 건 그냥 던져본 거였어요. 어차피 그게 사실이더라도 별 거 아니라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었거든요.”

“알겠으니까, 본론이나 얘기해 봐요.”

“당신이 어딘가에 누군가를 가둬놓고 있다는 거죠.”


드디어 올 것이 왔나 싶다가도, ‘어딘가’와 ‘누군가’라는 표현이 불확실한 정보임을 뜻한다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코웃음을 치며 회의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것도 아니라는 건가요?”


놈이 등 뒤에 소리치듯 물어 간단하게 대답했다.


“대답할 가치도 없네요.”


회의실을 빠져 나와 개인 공간으로 들어갔다. 사적으로만 쓰는 거실을 지나 작업실에 앉아 머리를 굴렸다. 집 안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은 건, 굳이 내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른 사람이 볼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아지트에라도 하나 달아둘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천둥의 말에서는 확신을 느낄 수 없었지만, 눈빛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만만했다. 정확한 사실은 몰라도 그런 낌새를 차렸다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두리뭉실하게 얘기해준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싶었다.

일단은 마음을 차분히 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동안이나마 숨을 고르고 명상을 했다. 그리고 조용히 아지트에 가 봤다. 안에는 다른 사람이 왔다 간 흔적이 없는 듯했다. 누군가 감쪽같이 다녀갔으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적어도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내가 왔다는 인기척이 들렸는지 아래서 약하게 박도현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니 다시 마음이 편해졌다. 이 곳에 들여놓은 작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갇혀버린 벌레의 몸부림 소리만큼 요즘 내 온몸에 전율을 주는 것은 없었다.


그 뒤에는 구천둥이 이상한 일로 불러내지도 않았고, 전반적으로 아무 일 없이 하루하루가 매끄럽게 지나갔다. 아무도 말썽을 피우지 않았고, 또 수상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매일, 하루에 두 번씩 아지트에 찾아가 에너지를 얻고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지는 벌레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앞으로 급식량을 더 줄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벌레가 갇혀 있는 공간에는 조명이 달려 있지만, 불을 켜는 스위치는 위에만 있었다. 비밀스러운 창고로 제작할 때도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전에 불을 켜려면 위에 스위치가 있어야 해서 그렇게 설치했는데, 모든 게 지금 순간에 딱 알맞게 제작된 것 같아 불을 켤 때마다 뿌듯했다.

그렇게 안 쪽을 밝히면 박도현의 몰골을 환하게 볼 수 있었다. 때로는 내가 볼 수 없는 곳에 기어들어가 있기도 했지만, 아래로 던져준 밥을 먹으려면 어쩔 수 없이 구멍 아래 쪽으로 나와야 했다. 가끔씩 이런 저런 말을 중얼거렸는데, 그냥 벌레가 윙윙거리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발버둥쳐봤자, 애원해봤자 소용없어. 내 눈에 넌 그냥 한 마리의 벌레일 뿐이니까. 그냥 죽기 직전까지만 살아서 나를 즐겁게 해 주기만 하면 돼.


이 곳에 있지 않을 때에도 이런 상상을 하면 말도 못하게 행복해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악몽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구천둥의 헛소리를 듣고 난 뒤에는 며칠 동안 행동을 조심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무도 내 행동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아지트의 벌레도 조금씩 싫증이 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정말 우습게도 구천둥의 ‘어딘가에 누군가를 숨겨두고 있는 걸 안다’는 그 말이 그리웠다. 누군가가 딱 그 정도로만 의심해주면 훨씬 더 스릴 있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때부터 남들이 주방에 있을 때에도 비밀번호를 누르고, 또 티가 나게 밖으로 나갔다 왔다.

그렇게 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침내, 누군가 아지트를 다녀간 흔적을 발견했다.


사실 거실에 깔아둔 카펫과 소파, 그리고 커피 테이블의 위치부터 뭔가 어색했다. 이건 그냥 감으로 느낄 수 있는 거였다. 그런데, 결정적인 증거는 의외로 다른 곳에서 발견됐다.


벌레를 가둬둔 곳에서 김무결의 핸드폰 벨소리가 들린 것이다.


두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하나, 김무결이 도대체 언제 이 안에 들어왔던 걸까?

둘, 전파 방해 장치를 설치했는데 왜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 걸까?


미친 사람처럼 소파를 밀어 넘어뜨리고 카펫을 헤집어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 박도현이 두 손에 휴대폰을 들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휴대폰 액정 불빛에 비친 그의 모습은 훨씬 더 흉측해 보였다.


“그건 어디서 났지?”


박도현은 휴대폰을 그 자리에 떨어뜨리고 안 쪽으로 숨어들었다. 당장 나오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겁에 질렸는지 기척조차 보이지 않았다. 문 안으로 각종 물건들을 던지고 소리를 더 질렀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온몸에 화가 가득 찬 느낌이었다. 김무결이 아무 관심도 없는 듯한 태도로 나를 속이고 비밀번호까지 알아낸 다음 여길 몰래 들어왔다는 사실에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싶었다. 같이 저 안에 가둬버리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괘씸해도 너무 괘씸했다. 그냥 박도현처럼 가두는 것만으로는 직성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그건 너무 관대한 처분이었다.


일단 아지트를 정리하고 나와서 본 집 현관문을 꽝 닫고 들어갔다. 간이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김무결과 그 인간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김무결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었는데,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 입으로 이런 말을 내보냈다.


“매니저님! 나랑 얘기 좀 할까요?”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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