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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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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연재수 :
2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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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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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17
글자수 :
1,341,677

작성
14.11.23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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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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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글자
12쪽

7화

DUMMY

언제나 그렇지만 현실은 인간의 빈약한 상상보다 훨씬 잔혹하다. 소스로 범벅이 된 열 네번째 동생의 입가를 닦아주면서 나는 그 진리를 망각해버린 자신의 멍청함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생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겠다는 의도야 좋았지만 뜻밖에도 임무의 난이도는 높았고 내 역량은 임무를 수행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간단히 말해서 힘들어 죽겠다는거다.


" 이런 제기랄, 제발 좀 얌전히 좀 먹어! "


애들 데리고 군것질하는 것 정도야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지옥이 따로없었다. 잠깐만 시선을 때면 어김없이 한 놈이 사라져있고 도망친 놈을 데리고오면 또 다른 녀석이 사라져있다. 이 극악의 무한루프를 뚫고 가까스로 꼬치구이 노점의 식탁에 도달하면 이번에는 서로 많이 먹겠다고 싸워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소스가 여기저기 튄다거나, 뜨거운 국물을 담은 컵이 쏟아진다거나, 다른 손님들의 눈초리가 집중된다거나 하는 사소한 문제들이 파생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수습할 인력이 증원되는 일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뒷수습 담당은 나 하나뿐이었고 과중한 업무로 내 체력과 정신력은 빠르게 고갈되어갔다.


" 거 좀 조용히 하지! "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참다못해 소리를 빽 질렀지만 다른 손님들의 짜증만 돋구웠을 뿐, 동생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태연히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이틀 전까지만 해도 툭하면 식사를 거르기 일쑤였던 처지였던 녀석들이 위험한 아저씨들도 아니고 형이 고함 좀 치는 정도로 식사를 멈출 리 없었다.


' 아, 진짜 지친다... '


더 절망적인 사실은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점이다. 이 탐욕의 화신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아직도 4~5종류의 음식을 더 바쳐야하고 그때마다 지금 벌어지는 소동이 그대로, 혹은 더 심화되어 반복될 것이 뻔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나만 사주겠다고 처음부터 선을 그어놓는건데...


" 어머, 피오니 고아원 분들 아니세요? "


그때, 등 뒤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없이 맑고 온화한 목소리. 분명히 처음 듣는데도 꼭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였다.


" 앗, 시녀 언니다! "


" 안녕하세요~! "


의문은 즉시 풀렸다. ' 시녀 언니 ' 라는 호칭이 상대의 정체를 밝혀준 것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우리 고아원을 후원해주는 귀족의 시녀가 틀림없었다. 그 외에 동생들과 안면이 있는 시녀가 있을 리 없으니까.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도 어쩐지 낮익었던 건 어제 만나서 대화를 나눈 뒤에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 안녕하세요. "


시녀는 어감만 보면 하녀와 비슷한 천직(賤職)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엄연히 귀족의 영애들로, 귀부인을 보좌하면서 귀족가의 안주인이 해야할 일들을 배우고 경험하기 위한 자리다. 그래서 나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귀족들이 쓸법한 조금 과장스럽고 오글거리는 인사말을 고르려다가 동생들이 시녀를 대하는 태도를 염두에 두고 평범하게 인사했다.


" 네, 안녕하세요. 지나가는길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여서 물어봤더니 정말 여러분이네요. 가족분들이 전부 나온 것 같지는 않고... 열 두번째 씨가 동생들에게 한턱 내는 중인가봐요? "


뭐지 이 괴상망측한 반응은?


신분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라는건 동생들의 반응을 보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건 숫재 자기가 귀족인줄도 모르는 수준이었다. 미리 시녀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 그냥 예의바른 평민 아가씨인 줄 알았을 것이다. 설마 시녀 일을 너무 오래 한 탓에 남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직업병이라도 생긴걸까? 아니지. 시녀 일 하다보면 아랫것들을 부릴 일이 많을테니 그건 아닐텐데...


" 예, 뭐 원장님이 용돈을 좀 주셔... 아니, 죄송합니다. 이러라고 후원해주신 돈이 아닐텐데. "


더욱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 여자의 머릿속을 짐작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차라리 전통적인 귀족상이면 기분은 더러워도 예측하기가 쉬운데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반응을 보이다보니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 어머, 괜찮아요. 상류층이나 가는 고급 음식점에서 흥청망청 놀고 있었다면 그야 화가 좀 났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싸구려 노... 이런, 실례. 꼬치집 회식 정도야 전혀 문제 없답니다. 오히려 너무 소박한게 아닌가 싶네요. 이보다는 조금 더 좋은데서 드셔도 좋을텐데. "


귀족도 사람인 이상, 좋고 싫음이 있는건 당연하다. 문제는 재수없게 지뢰를 밟아서 귀족을 화나게 만들었다간 평민의 인생은 심각하게 꼬여버린다는 점이다. 운이 나쁘면 죽을수도 있다. 특히나 우리들은 저 시녀의 주인에게서 후원을 받고 있는 입장인만큼 조금도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됐다. 까딱 잘못해서 후원이 취소되어버리면 기껏 빛을 보려던 동생들의 인생은 도로 나락에 처박혀버릴테니까.


" 아닙니다. 저희 수준엔 여기가 딱 맞지요. 얼마 전까지 워낙 없이 살다보니 고급 음식은 먹으려고 해도 위장에서 안받아주거든요. "


임기응변으로 대충 넘기고는 있지만 시녀의 표정은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를 띄고 있을 뿐, 도무지 변화가 없었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얼굴만 웃고 있는건지 속도 같이 웃는건지... 그걸 모르는 이상, 섣불리 태도를 바꾸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밀고 나가는 것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지금 하는게 잘하고 있는건지 지뢰를 건드리고 있는건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것은 마치 한치 앞도 안보이는 동굴 속에서 함정이 그득한 미로를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나가는 것과 같았다.


" 근데 시녀 누나는 어디가는 길이었어요? "


더욱 피를 말리게 하는건 겁대가리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동생들의 태도였다. 이 녀석들은 시녀가 무슨 동내 누나쯤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별 탈이 없는걸보면 어린아이에게 관대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지금 이미 한계점이 가까울지도...


" 음... 미안하지만 그건 알려줄 수 없어요. 꼭 비밀로 해야하는건 아니지만 세상에는 모르는게 좋은 것도 있거든요. 대신 맛있는 음식점 정도는 가르쳐줄 수 있어요. 도련님이 워낙 먹는걸 좋아하셔서 이 주변의 식당은 거의 다 가봤거든요. 가끔은 그냥 먹으려고 여행하시는 것 같을 정도... 아, 실수. 이건 잊어주세요. "


....모르지만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나 혼자 바보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함정같은건 처음부터 없었던게 아닐까. 그게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는 알고 있지만 저토록 온화한 미소 뒷편에 짜증과 분노가 축적되고 있을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 아차, 그러고보니 마침 잘됐네요. 열 두번째 씨, 잠깐만 나와보실래요? "


" 예? 아, 예. "


그러는 사이, 동생들과 거리낌없이 대화를 나누며 싸구려 꼬치를 집어먹던 시녀가 갑자기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역시 어린애한테만 관대한 타입이었나. 차마 애들한테 화는 못내겠고 그나마 제일 머리가 굵어보이는 나에게 모든 울분을 풀겠다는거겠지. 후... 죽었다고 생각해야지 뭐.


" 어제 말했던 건에 대해서 생각 좀 해보셨나요? "


하지만 그녀가 꺼낸 용건은 내 상상이랑 좀 많이 달랐다. 나는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어제 저쪽에서 뭔가 제안을 해왔던 모양이다.


" 어제 건이라면? "


" 도련님 밑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 말이에요. "


확인차 묻기는 했지만 십중팔구 그럴거라 생각했다. 달리 나한테 제안할게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예상하기는 쉬워도 대답하기는 어려운 제안이었다. 귀족의 밑으로 들어간다는건 분명히 큰 기회였지만 그만큼 높은 위험을 수반하는 길이었다. 다른걸 다 제쳐두고 언제든지 날 죽일 수 있는 상사를 평생 모셔야 한다는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거죠? "


" 음... 저도 뭐라고 확언을 드릴 순 없지만 아마 후원금이 딱 끊기지 않을까요? 도련님이 피오니 고아원을 후원하려는건 어디까지나 열 두번째 씨가 마음에 들어서니까요. "


" 공증인 데려다가 후원 계약서까지 작성해놓고 이제와서 그럴리가..... "


계약서가 남아있는 이상, 설령 귀족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계약을 이행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정으로 끌려가서 망신은 망신대로 다 당하고 계약은 계약대로 강제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나 같은 하층민 꼬마도 아는 상식을 귀족이 모를 리가.....


" 그런건 아무 의미도 없어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계약서의 효력을 부정했다.


" 계약서에 적힌 도련님의 인적사항은 전부 가짜니까요. "


" ! "


" 실존하는 귀족의 인적정보니까 고소 자체는 가능하겠지만 승산은 글쌔요? 오히려 그쪽에서 여러분들을 사기꾼으로 몰아갈지도 모르겠네요. "


" 그럴수가.... "


" 아, 그래도 도련님이 귀족인건 사실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잠시 가짜 신분을 쓰는 것 뿐이랍니다. 당신만 함께 간다면 후원은 계속 이어질거에요. 도련님은 어디까지나 헛돈을 쓰기 싫어하는 분이지 물건 값을 떼먹는 분은 아니거든요. "


" ..... "


이 여자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지금 여기서 알아낼 방법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저들에게 10억 데카트 정도는 쾌척할 수 있는 재력이 있다는 점과 나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 뿐이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가서 내가 잘하기만 하면 후원은 계속 이어질테고 동생들의 인생은 보다 밝은 방향으로.... 제기랄! 그게 뭐야! 그깟 아무것도 아닌 꼬맹이들 때문에 이런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놈들을 따라가라고!? 가서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막말로 저 꼬마들이 잘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내가 왜 저놈들의 밑거름이 되어야하지? 내 인생은 그런데 허비하라고 있는게 아니....


" 아. "


도중부터 터져나온 마음 속 반발감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아닌 나 자신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동생들을 위해서라면 내 한몸쯤 충분히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그럴 상황에 직면하니 결국 내 몸의 안위를 더 챙긴 것이다.


" 아직 시간은 남아있으니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도련님을 모시기로 결심하셨다면 내일 오후 3시 전까지 여관 『초록 달』로 오셔서 델핀을 찾으시면 되요. 아, 참. 너무 늦으면 기다리지 않고 출발해버릴 수도 있으니까 조금 일찍 오시는게 좋을거에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


내가 충격에 빠져있는 사이 시녀는 자기 할말을 마치고 작별을 고했다. 떠나가는 그녀의 등 뒤에서 흔들거리는 땋은 금발 머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아직은 답을 고를 수 없는 문제를 생각하며 나는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작가의말

6, 7화는 한편인데 이어서내기엔 이질감이 있는 것 같아서 사실 연참인척 하고 싶어서 분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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