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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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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연재수 :
2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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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341,677

작성
15.08.16 11:47
조회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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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18쪽

30화

DUMMY

소년은 꿈을 꿨다.


머나먼 과거의 꿈.


머나먼 내일의 꿈.


이상하리만치 높은 시야의 꿈 속에서 소년은 두 사람의 등을 보고 있다. 배갑(背甲)이 햇빛을 반사하여 아름답게 반짝인다. 몇 번이나 함께 사지를 해쳐나왔던 든든한 등. 그 믿음직한 등을 향하여 소년은 거대한 도끼를 들어올렸다.


굉음, 비명, 절규.


이제 소년은 혼자 서 있었다. 눈에서도 도끼에서도 피를 뚝뚝 흘리며 혼자 서 있었다. 시뻘겋게 물든 시야로 누군가를 직시하며 혼자 서 있었다.


***


" ....님. .....시오. "


희미하게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여물지 않은 여자아이의 목소리다. 아마도 소년과 비슷한 또래, 많아봐야 1~2살 차이밖에 나지 않으리라. 상당한 미성(美聲). 노래를 업으로 삼는다면 크게 성공할 목소리다. 소년의 기억 속에 이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자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 알비 님. 일어나주십시오. "


목소리와 함께, 소년의 의식이 또렷해졌다. 조금 멍한 머리를 붙잡고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다. " 후아아아암. " 얼빠진 하품소리를 내면서 흐리멍텅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른편에 다소곳이 서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목소리로 짐작했던 것처럼 그와 비슷한 또래에 살짝 탄 피부를 가진, 생판 처음 보는 소녀였다.


" 누구? "


" 알비님의 시중을 들게 된 세바티아입니다. "


" 알비? 시중? "


소년은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더니 겨우 생각났다는 듯 " 아~ "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레크 후작이 귀빈실과 하녀를 붙여주면서 그를 알비라고 불렀던걸 기억해낸 것이다.


" 무슨 일 있어요? "


" 후작 각하께서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2시간 밖에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주셨으면 합니다. "


" 아, 예... "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납득이 잘 가지 않는 듯, 약간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저택 안에 살고 있으면 당연히 같이 식사하는거지 뭘 새삼스럽게 또 초대를 한다는 것이며,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식당으로 가는데 무슨 준비할게 있다고 2시간 ' 밖에 ' 라는 표현을 쓰는건가?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사람들도 뭔가 생각이 있겠지, 싶어서 순응했을 뿐이다.


" 그럼 우선은... "


그가 납득하기까진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세바티아는 소년의 또래라곤 생각하기 어려울만큼 다양한 재주를 발휘하여 꾀죄죄한 여행자를 귀족가의 도련님으로 탈바꿈시켰던 것이다. 옛날 이야기 속의 마법사가 변신 마법을 걸었다고 해도 믿을만큼 놀라운 변화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수상한 가루를 내뿜는 지팡이를 한번 휘두르는게 아니라 2시간이 짧다고 느껴질만큼 귀찮고 번잡한 공정을 거쳤다는 점 뿐이다.


' 굉장하다... '


소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자신에게 이런 잠재력이 있을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빵 먹는데 이런 치장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했지만.

한편, 거울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소년의 뒷모습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세바티아는 우연히 시계에 비친 벽시계를 보고 말했다.


" 그만 가시죠 알비님.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


" 아, 예. "


그렇게 대답하며 소년은 시계를 보았다. 아직 15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목적지가 같은 저택 내에 있다는걸 고려하면 너무 이른 시간이었으나 후작이 조금 일찍 나올지도 모르니 서둘러서 나쁠건 없다. 그는 앞장서서 식당으로 향하는 세바티아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그런데 가다보니 약간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소년의 시야에 완전무장을 갖춘 병사들이 잡히는 빈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것이다. 게다가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무슨 일 있나요? 경비가 굉장히 삼엄한데... "


" 예, 후작 각하께서 돌아오시는 길에 습격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


아, 과연. 그런거였나. 소년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인인 후작이 습격을 당했다면 저택의 경계가 삼엄해지는건 당연한 일이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바티아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낮아졌다.


" 놀라지 않으시군요? "


" 예에, 뭐. 저녁식사에 초대하실 정도니까 큰일은 아니겠구나 싶어서요. "


자신처럼 하찮은 사람에게까지 생각이 미친다는건 정신적으로 여유가 충분하다는 반증이다. 보나마나 시덥잖은 일이리라. 그런 소년을 약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던 세바티아는 " 그렇군요 "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세바티아가 발걸음을 멈춘 것은 뜻밖에도 식당이 아니라 후작의 개인 방이었다. 소년이 의아한 얼굴로 그 점을 지적하자 하녀는 도리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발롱드의 귀족은 자기 방에서 식사를 하는게 보통이라고 한다.


똑똑.


" 뭐야? "


문의 저편에서 약간 나른한 느낌의 목소리가 돌아온다. 세바티아는 정중하게 " 알비님이 도착하셨습니다 "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안쪽에서 " 알비? "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후작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자기가 불렀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대로 영영 떠올리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소년의 걱정과는 달리 후작은 기억이 났는지 소년을 불러들였다.


덜컥.


후작의 방은 예상 이상으로 수수했다. 책상 하나에 침대 하나, 그리고 옷걸이가 가구의 전부다. 바닥에는 카펫조차 깔려있지 않아서 냉기가 그대로 올라왔다. 후작의 방에 걸맞는거라곤 딱 하나, 넓이 뿐이었지만 워낙 가구가 없다보니 도리어 휑한 느낌만 더해줄 뿐이었다.


" 주방 가서 식사 좀 가지고 오라 그래. "


세바티아는 공손히 예를 표한 뒤,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후작과 소년 뿐이다. 자연히 소년의 시선이 후작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가벼운 천 옷 차림으로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는데 흉부가 유난히 두터운 점이나 무릎과 팔꿈치가 보강되어 있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갑옷 안에 받쳐입는 옷인 것 같았다.


' 뭐라고 해야할까, 항상 임전태세라는 느낌이네. '


소년은 뭔가 좀 섭섭하다고 느꼈지만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머릿속의 혼란에 휘둘리면서 멍하니 서 있는데 후작이 보고 있던 신문을 접고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


뭐라고 해야할까. 후작다운 품위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는 말투였다. 아니 뭐, 몇 년이나 최전방에서 싸운 사람이니 딱히 이상할거야 없지만 그래도 귀족으로서 체통을 좀 지켜줬으면 싶다. 나 같은 새가슴에게 저런 날카로운 말투는 감당하기 힘들단 말이다. 하고, 소년은 내심 투덜거리면서 손사래를 쳤다.


" 아뇨아뇨, 그냥 저... 습격을 당하셨다기에 괜찮으신가 해서... "


적당히 변명을 지껼였더니 후작은 정말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혀를 끌끌 차고서 말했다.


" 너, 보기보다 머리가 더 안좋구나. 괜찮지 않으면 저녁 식사 초대 같은건 안하지. 앞으로는 좀 더 생각하고 말하도록 해. 내 동생이라 자처하는 놈이 바보티를 내고 다니면 내 평판도 같이 떨어진다고. "


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요!


" 주, 주의하겠습니다. "


물론,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마음 속에서 내지른 외침과 달랐다. 후작은 " 그래. " 하고, 성의없이 대답하면서 뭔가 김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자신에게 뭔가 기대했던걸까. 어쩌면 대응법을 조금 바꿔보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 식사 가져왔습니다. "


그때, 검은 조끼를 입은 하인이 음식을 담은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의 넓찍한 공간에 카트를 세운 그는 가장 아래쪽 선반에서 철제 박스 같은걸 꺼내 잠깐 꿈지럭거리더니 등받이가 달린 멀쩡한 의자로 변형시켰다. 같은 방법으로 또 하나의 의자를 만들어낸 그는 카트를 중심으로 두 의자를 마주보게 배치하고는 조용히 예를 표한 뒤 퇴장했다.


" 앉지. "


" 아, 예. "


소년은 후작의 권유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 보기에는 제법 그럴싸하지만 결국은 쇳덩어리. 엉덩이는 차갑고 등받이는 딱딱하다. 편리하기는 한데 뭔가 좀 어설프다고 해야하나. 카트를 식탁 대용으로 쓰는 점도 그렇다. 분명 이렇게 먹으면 차리는 수고도 덜고 뒷처리도 편하겠지만 막상 먹기에는 불편했다.


' 뭐야, 이 식단은. '


카트 위의 요리들도 평범하지 않았다. 바구니에 담긴 투박한 빵과 컵에 담긴 스프, 간편하게 쥐고 먹을 수 있도록 썰려있는 아채들과 자그마한 접시에 담긴 갈색 소스, 한 입 크기로 썰어서 삶은 고기 한 접시가 식사의 전부였다. 도저히 후작 각하의 저녁상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구성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 저녁상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굉장히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딱히 추억이 있는 음식들도 아닐텐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걸까. 소년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당황하는 동안 거침없이 접시들을 공략하던 후작은 문득 소년 쪽의 음식이 전혀 줄어들지 않은걸 깨닫고 말했다.


" 얼른 먹어. 식으면 맛없다? "


" 아, 예! "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소년은 다급히 빵을 집어들었다. 귀족들이 흔히 먹는 부드럽고 보들보들한 흰 빵이 아니라 하층민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거칠고 검은 빵이다. 맛도 고아원에서 먹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물거리던 빵을 삼키고 스프를 한 모금 입에 머금는다. 약간의 곡물과 야채로 끓여낸 듯 싶은데 생각보다 맛이 훌륭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음식을 맛보고 있는데 후작이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 그렇게 맛이 없었냐? "


" 예? "


" 너, 지금 울고 있잖아. "


" 예에!? "


후작의 지적에 소년은 깜짝 놀라 자기 눈가를 만져보았다. 정말로 만진 손에 물기가 잔뜩 묻어났다. 어째서? 소년은 자기 자신의 반응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혹시 병이라도 걸린게 아닐까 싶어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다.


" 어째서...? "


소년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후작은 흐음, 하고 소리를 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손수건을 소년에게 던지며 말했다.


" 내 경험상 이유없이 나오는 눈물은 대게 속에 담아뒀던 것이 흘러넘치는거야. 다 쏟아내버려. 담아두면 병된다. "


뭔가 좀 다른 것 같았지만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고마운 배려인 것은 사실이니까. 그는 후작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 구석에서 눈물이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는데 제멋대로 흘러내리던 괴상한 눈물은 정말 탈수로 쓰러지는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쏟아져내린 끝에 겨우 멈췄다. 소년은 엉망이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적당히 닦아낸 뒤, 다시 후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 좀 시원해졌어? "


"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감정과 상관없이 눈물이 제멋대로 흘러내렸을 뿐이지만 후작의 말대로 조금 시원해진 것 같기도 했다. 뭐가 그렇게 쌓여 있었던걸까? 곰곰히 생각해보던 소년은 문득 눈앞에 놓인 빵을 보고 납득할만한 답을 떠올렸다.


' 그런가, 그런거였구나... '


소년도 사람이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무참하게 죽어나갔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단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할만큼 깊은 곳에 쌓아두었을 뿐이다. 그것이 고아원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검은 빵을 방아쇠로 삼아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리라. 그의 입가에 소리없이 미소가 걸렸다. 그 모습을 본 후작도 허물없이 웃으며 빵을 집어들었다.


" 잘 먹었습니다. "


별로 차린건 없는 상이었지만 두 사람은 잔반하나 없이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겨울이라 그런지 야채가 좀 시들하고 고기도 잡냄새가 좀 났지만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년의 만족한 얼굴을 본 후작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음, 정말로 잘 먹은 얼굴인걸! 역시 험하게 자란 애는 다르네. 귀한 집 애들한테 먹여보면 거의 울려고 하던데 말이야. 아아, 그렇다고 딱히 널 비하할 생각은 없으니까 오해하진 마. 난 그냥 잘 먹는게 보기 좋아서 한 말이니까. "


굳이 그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만큼 후작은 정말로 기분이 좋아보였다. 어지간히도 이해받지 못한 식성이었나보다. 하기야 피난선에서 먹었던 것처럼 화려한 식사를 일상적으로 즐겨온 귀족들이 보기엔 거의 고문처럼 느꼈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어색한 웃음으로 대응한 뒤, 분위기를 봐서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 그런데 후작님은 왜 이런 식사를 하시나요? "


그가 듣기로 알레크 후작은 본래부터 귀족이라고 했다. 비록 촌동내 영주 집안이라고는 하나, 이보다는 훨씬 좋은 식사를 즐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자고로 못 먹다가 잘 먹는건 괜찮아도 잘 먹다가 못 먹기는 힘든 법. 경제적 여건이 받쳐주는데도 이처럼 하잘것없는 식사를 하는데는 나름대로 큰 이유가 있을 것이라 소년은 생각했다.


" 아, 그거? 집안 전통이야. "


" 전통이요? "


" 응. 북부는 별로 풍족한 땅이 아니거든. 식량은 모자라고 괴물들은 심심하면 기어나오고, 그렇다고 뭐 내다 팔만한게 있는 것도 아니라서 늘상 가난뱅이 신세야. 게다가 알레크는 교통도 나빠서 상하기 쉬운 식재료 같은건 멱살을 잡고 싶을만큼 비싸. 그런 상황에서 영주라는 작자가 맛난 음식을 찾으면 어떻게 되겠어? 영민들 허리 다 부러지는거지. "


" 대단하네요. 영민들을 위해 험한 음식을 자처하다니... "


생각보다 속 깊은 전통에 소년은 감탄했다. 그러나 후작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뭐, 처음 시작하신 조상님들은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이제와선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니야. 나만해도 국왕 전하가 내 영지에 오시기 전까진 이런 음식 밖에 몰랐는걸. 그냥 음식이란건 으례 이런걸로만 알았지 영민들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 "


' 얼마나 깡촌이었던거야 알레크... '


보통 영주쯤되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을텐데 십 몇 년을 살면서도 좋은 음식을 몰랐다니 그놈의 동내도 어지간하다 싶었다.


" 하여튼 평생 그런 음식만 먹고 살아서 그런가 이제와선 고급진 요리를 먹어도 속이 안좋아하더라고. 그래서 평소에는 이렇게 먹고 사는거야. "


" 아~ 역시 그렇죠. "


소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도 테오도르에게 거두어진 덕분에 이전까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훌륭한 음식들을 접하게 되었지만 먹고나면 속이 불편할 때가 종종 있어서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후작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녀도 " 거 봐, 나만 그런게 아니라니까. " 하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그 뒤로도 그런 시덥잖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음만 먹으면 왕조차도 갈아치울 수 있을거란 평가를 받는 권력자와 나눈 대화라곤 믿을 수가 없을만큼 시시한 이야기들이었다. 예컨데 드레스는 불편해서 싫다느니, 남쪽 놈들은 이것저것 따지는게 많아서 피곤하다느니, 툭하면 결혼하라며 재촉하는게 귀찮아 죽겠다느니, 정말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 뿐이다.


" 아, 슬슬 보고 들으러 갈 시간이네. "


" 그럼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


" 아, 그래. 가서 푹 쉬어. "


선선히 놓아준 후작은 일어서려는 소년에게 방금 떠올랐다는 듯, 충고를 덧붙였다.


" 참. 다음에 부르면 그렇게 치장하지 말고 편하게 입고 와. 아주 땀투성이가 다 됐네. "


" 그렇게 하겠습니다. "


소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의 방은 보기와 달리 난방이 잘 되어 있어서 정복을 갖춰입고 있기엔 너무 더웠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가려다가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후작과 눈이 마주친다.


말할까, 말까?


잠시 갈등하던 소년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 결국, 오늘은 무슨 일로 절 부르신겁니까? "


알레크 후작은 공식적으로 아무런 직책도 맡고 있지 않지만 현재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요인들이 죄다 그녀의 가신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라서 실제 영향력은 굉장했다. 더군다나 오늘은 습격까지 당했으니 결코 한가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따로 시간을 빼서 그를 불렀다는건 분명히 무언가 의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소년은 그게 신경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 응? "


그러나 질문을 받은 후작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 누나가 동생이랑 저녁 한끼 먹겠다는데 이유가 필요하냐? "


" .....믿어주시는겁니까? "


" 뭐, 아니면 그건 그거대로 좋아. "


" ??? "


속을 알 수 없는 대답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에게 후작은 축객령을 내렸다.


***


작가의말

이 소설은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51 rlrkep
    작성일
    15.08.17 00:24
    No. 1

    일단은 어디든지 가는 듯 하네요^^
    멈추지 않고 가시기만 한다면 끝까지 같이 갑니다 ㅎㅎ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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