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멸망의 아들 /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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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아라!”
블랙이 외쳤지만, 알렐루와 목표 사이를 가로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알렐루를 목전에 둔 열 세명의 마법사들이 순간적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빠르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춤추듯 교차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은빛 줄이 강렬하게 빛났다. 열세 개의 줄이 마치 하나처럼 꼬여 결계와 맺어졌다. 이전과 달리 다른 능력자들의 정수리에 연결된 은빛 줄도 서서히 빛났다. 그와 함께 뒤쫓던 능력자들의 걸음이 느려졌다.
알렐루는 등의 통증을 참고 움켜쥔 주먹을 힘껏 당겼다.
“블랙!”
멀린이 소리쳤다. 알렐루를 바짝 쫓던 블랙이 깜짝 놀라며 옆으로 힘껏 몸을 틀었다. 알렐루를 거의 따라잡은 몇몇 능력자들이 그를 향해 땅을 박찼다.
알렐루가 주먹을 뻗었다.
“썬더 브레스!”
알렐루의 앞에 선 마법사는 두려워하지 않고 양손에 쥔 지팡이를 내밀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을 깨고 빛이 뿜어졌다. 지팡이 끝에서 시작된 빛은 순식간에 지팡이 전체로 번졌다. 빛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마법사의 팔과 몸까지 삼켰다. 마법사의 온몸이 빛났다. 그리고 거대한 번개 줄기가 폭발하듯 뻗어 나갔다.
수천 개의 벼락을 합친 것 같은 번개 줄기에 알렐루의 주먹이 밀렸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서서히 뒤로 밀렸다. 알렐루를 삼킨 번개는 블랙을 덮칠 듯 지나갔다. 발끝을 스쳐 지나는 번개 줄기에 놀란 블랙이 몸을 굴려 번개에서 멀어졌다. 행운은 거기서 끝이었다. 알렐루를 덮치던 초능력자들은 번개에 휩쓸린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번개의 분출방향에 있던 몇몇 능력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번개의 범위에서 벗어났던 자 중 운 없는 자들은 번개 줄기에서 삐져나온 번개에 맞아 비명을 지르다 허물어졌다. 순식간에 죽음이 광장을 지배했다. 알렐루가 동분서주하며 쓰러뜨린 능력자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죽음을 맞이했다.
13명의 마법사는 결계를 통해 초능력자 100여 명의 힘을 끌어모아, 전설로만 전해지던 최강의 주문을 펼쳐냈다. 멀린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자신이 바로 저 자리에 있었어야 한다는 질투까지 생겼다.
그는 모든 마법사의 스승이었다. 자신과 선조들은 모두 ‘멀린’이라는 공동의 이름으로 불리었다. 멀린들의 임무는 멸망의 아들이 알려준 주문을 인간이 펼칠 수 있도록 재해석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후의 공격 마법이라 칭해온 ‘썬더 블레스’는 자신과 아버지가 함께 해석해낸 마법이었고, 저들에게 가르친 것은 자신이었다. 물론 이 마법이 인간에 의해 구현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었다. 완성된 멸망의 아들이 아니고는 펼칠 수 없는 마법이었기에 그저 이론만으로 알아두라고 가르친 것이었다. 그런 마법을 자신을 빼고 시전했으니……. 질투 어린 살의가 당연하게 느껴졌다.
질투에서 눈을 돌린 멀린은 자신의 정수리에 연결된 은빛 선을 보았다. 한껏 굵어진 선은 자신의 힘을 있는 대로 빨아들여 결계로 보냈다. 대마법사라 칭하는 자신조차 오래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러다 진짜 죽는 거 아니야?’
번개를 막고 있는 손바닥은 아프다 못해 감각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얼굴을 할퀴듯 지나가는 번개 줄기에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찔러오는 번개가 온몸을 바느질하는듯한 고통이 계속되었다. 당장 몸이 터지든 찢기든 타든 이상할 것 없었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버텼음에도 몸은 계속 뒤로 밀려났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당장 포기하라고, 포기하고 안식을 얻으라고 외쳤다. 힘을 얻기 전, 수차례 몰매를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죽을뻔한 경험들이었지만, 차라리 그때가 그리웠다.
멀찍이 물러선 초능력자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번개가 자아내는 죽음의 공포도 견디기 어려웠으나, 그보다 더욱 힘든 것은 힘을 빼앗아가는 결계였다. 이미 한계에 달한 이들은 빨리 알렐루가 쓰러지기만을 바랐다.
알렐루는 자신이 똑바로 서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생살을 째는 듯한 전기충격이 느껴지는 감각의 전부였다.
한계를 훌쩍 넘는 운동을 했을 때처럼 매스꺼움이 속을 뒤집어놓았다. 하늘이 빙글 돌았다. 버텨야 한다는 사실조차 의식과 함께 저 너머로 넘어갔다. 그렇잖아도 부상을 당해 허약해진 초능력자가 눈을 뒤집고 넘어갔다. 한 명이 쓰러지자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던 능력자들은 버티길 포기했다. 마치 도미노처럼 우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멀린은 가늘게 뜬 눈으로 화이트 페이스를 살폈다. 전설의 마법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쓰러지는 자가 속출하자 마법도 약해졌다. 처음처럼 화이트 페이스를 압도하지 못했다. 마법을 시전하고 있는 마법사들의 안색이 투명할 정도로 창백했다.
멀린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참고 주문을 외웠다. 어떻게든 썬더 브레스가 유지되는 동안 화이트 페이스를 쓰러뜨려야 했다. 이미 탈진에 가까울만큼 기력을 빼앗겼음에도 그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 주문을 외웠다.
섬뜩하도록 붉은 열기가 쏘아졌다. 멀린은 헐떡이며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끝까지 시선은 화이트 페이스에게 고정했다.
새빨간 줄기가 알렐루를 향했다. 번개를 막느라 주위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그는 무방비 상태였다. 시퍼런 번개에 대비된 붉은 줄기는 더욱 강렬해 보였다. 화이트 페이스의 상태가 정상이더라도 지옥 화염을 맞고 멀쩡할 수는 없다 자부했다.
‘최소한 균형이라도 무너뜨릴 거야.’
그걸로 충분했다. 저 상태로 썬더 브레스에 휩쓸리면 최소한 중상이었다. 끝내 붉게 달아오른 지옥 화염이 알렐루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미동도 없이 번개를 막고 있었다. 썬더 브레스가 지옥 화염까지 소멸시켰음을 깨달았다. 멀린의 고개가 무릎보다 더 아래로 떨어졌다.
‘졌다.’
광장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자신이 토해놓은 오물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은 자, 코피를 쏟으며 눈이 뒤집힌 자, 기이하게 몸을 꼬고 온몸을 경련하다 축 늘어진 자, 얼굴과 하체로 피를 쏟아 흥건한 자들이 바닥을 물들였다. 바람에 실린 냄새조차 지독했다.
3분의 2정도의 초능력자가 의식을 잃자 결계도 깨졌다. 결계가 깨지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초능력자들도 바닥에 허물어졌다. 누구도 서 있지 못했다.
그나마 초능력자들은 행운이었다. 결계가 깨지자 폭주하는 마법을 멈출 수 없었던 13명의 마법사는 마치 블랙홀에 끌려가듯 번개 줄기 속으로 빨려 사라졌다.
힘을 쭉쭉 뽑아가던 결계가 사라지자 헐떡이며 주저앉아있던 블랙이 몸을 일으켰다. 공간을 찢던 번개 줄기는 사라졌으나 호 카테콘은 여전히 번개에 대항하듯 서 있었다.
‘기회일까?’
자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멀쩡했다면 멀찍이 시도라도 해보겠으나 지금은 그마저 두려웠다.
블랙은 몸을 돌려 건물을 향했다. 늪에 빠진 듯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웠다. 뒤에서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호 카테콘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서 있던 자는 그밖에 없었으니 확실할 거라 여겼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쓰러진 걸 알면서도 마무리하지 않는다면 질책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오로지 건물을 향했다.
자신과 건물 사이에 멀린이 있었다. 그는 엉덩이를 들고 무릎 꿇은 자세로 얼굴을 땅에 박고 있었다.
‘얄미운 놈’
혼자 도망갔던 것에 대한 앙금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작은 앙금 때문에 버리기에는 능력이 아까웠다. 블랙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뻗어 다리를 잡아끌었다. 비참한 몰골로 끌려갔지만, 멀린은 반항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두 남자가 건물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번개가 멈추자 관성 때문인지 알렐루는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멀리 무너진 담장 너머에 희끗한 그림자가 보였다. 자신을 보고 있는 그림자를 향해 웃어주고 싶었지만, 웃어지지 않았다. 그저 괜찮은 듯 버티고 서는 게 전부였다.
‘빨리 가줘.’
잠시 지켜보던 그림자는 빠르게 이동하여 건물 뒤편으로 사라졌다. 알렐루는 비로소 쓰러질 수 있었다.
바닥났던 체력이 빠르게 채워지고 있었다. 알렐루는 빙글 몸을 돌려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웠다. 아무리 인간들이 난장판을 벌여도 저 하늘의 평화를 위협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나른함이 기분 좋았다.
기분 좋은 피로도 잠시일 뿐, 무한의 체력은 빠르게 몸을 회복시켰다. 일어선 알렐루는 광장을 둘러보았다. 간간이 신음이 들렸지만, 아직 움직이는 자는 없었다.
알렐루는 혹시라도 다시 결계가 쳐질까 하는 염려에 남은 벽을 허물었다. 충분히 무너뜨렸다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작이 거창하긴 했지만, 진짜 싸움은 아직이었다. 김두환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건물 안에 더 위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김두환을 끌어낸다.’
자신이 위험할수록 드보라가 안전해졌다.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점검한 그는 깊이 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었음에도 마치 유령의 집처럼 낡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낮이었음에도 희미한 어둠이 건물을 채우고 있었다.
창문 하나 없어 음침한 로비 안쪽에 건물 정문보다 큰 문이 보였다. 거대한 문을 밀자 밝은 빛이 새어나왔다. 명암 차이 때문에 안쪽을 볼 수 없었다. 알렐루는 불길한 빛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우렁찬 함성이 울렸다.
눈이 빛에 적응하자 비로소 실내가 보였다. 마치 콜로세움을 축소해놓은 듯한 체육관에는 2백 명은 됨직한 관중이 들어차 있었다. 그들이 알렐루를 향해 환호하고 있었다.
체육관 중앙에는 하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사람 좋게 웃었다. 알렐루는 어쩐지 그 웃음이 싫었다. 그는 관중석을 둘러보며 김두환을 찾았다. 자신을 찾고 있음을 안다는 듯, 김두환이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가 손을 입에 모아 소리쳤다.
“어이, 흰둥이! 잘 해보라고.”
누가 보아도 가벼운 마음으로 스포츠를 관람하는 분위기였다. 알렐루가 인상을 찡그렸다. 사방에서 야유와 웃음이 터졌다.
“화이트 페이스, 파이팅!”
“난 네 편이야!”
어수선한 외침에 다른 자들이 깔깔거렸다.
“이제 시작해볼까?”
김두환이 말했다.
“주, 주인님!”
흰둥이라 불린 화이트가 당황한 듯 외쳤다.
“아, 하나 빼먹었구나.”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김두환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웃으며 말했다.
“너, 아까는 맡겨만 달라며? 그런데 이제 내 도움이 없이는 못 싸우겠다는 거야?”
화이트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할 말은 다했다.
“그래도 제힘만으로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능구렁이 같은 놈.”
김두환은 그를 향해 한마디 하고는 천장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잠시 어두워지더니 천장이 빛을 뿜었다. 빛이 점점 가늘어지며 모양을 갖추자 붉은 혈선이 천장을 가득 채웠다. 광장에서 보았던 결계와 비슷해 보였다.
화이트는 결계를 확인하고 나서야 알렐루를 향해 돌아섰다. 주위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자 환호는 더욱 커졌다. 환호를 즐긴 그는 알렐루를 향해서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가볍게 흔들리는 그의 손에서 무언가 검은 것이 튀어나왔다.
알레루는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검은 물체를 낚아챘다. 손바닥을 내려다본 그는 기겁하며 손을 털었다. 참새보다 큰 바퀴벌레가 터진 배로 체액을 흘리며 바닥에 꿈틀거렸다.
“뭘 그리 놀라나?”
화이트가 기분 좋게 웃었다.
“더러운 놈.”
어쩔 수 없이 욕이 나왔다.
분노한 알렐루가 다짜고짜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 다음 발을 디딘 곳의 바닥이 꺼지며 안으로 추락했다. 바닥은 깊지 않았다. 하지만 뛰어오를 수 없었다. 늪처럼 물컹거리는 바닥이 알렐루의 몸을 계속 빨아들였다. 더 심한 건 냄새였다. 온갖 오물이 뒤섞인 냄새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는 허벅지까지 빠진 오물 늪을 허위허위 걸어 벽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디딜 곳이 없는 곳에서 걸을 수는 없었다. 몸이 조금씩 계속 가라앉았다. 알렐루는 어쩔 수 없이 수영하듯 손으로 오물을 휘저었다. 그제야 몸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온갖 건더기가 느껴졌다. 팔을 타고 기어오르는 구더기의 꿈틀거림이 생생했다. 손가락 굵기의 벌레들이 휘젓는 손안에서 터져나갔다. 안의 상황이 보이는 지, 위에서 함성과 웃음이 들렸다. 속이 매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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