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복수의 화신 / 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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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랬으면 좋겠어요!”
알렐루를 위해 변명할 때는 당당했던 효진도, 질문이 자신을 향하자 침착함을 잃어버렸다.
“흠……. 혹시 화이트 페이스에게 10억이나 되는 현상금이 걸린 걸 아십니까? 요즘 그것 때문에 난리라던데, 화이트 페이스가 누구인지 알면 그야말로 로또에 맞는 거죠. 부럽지 않나요? 제가 만약 화이트 페이스를 안다면 당장 현상금을 받고 싶어질 겁니다.”
효진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앙다문 입술이 창백해졌고, 꽉 쥔 주먹이 덜덜 떨렸다. 그녀가 조용해지자 김 검사는 다시 시선을 알렐루에게 돌렸다.
“이게 현장 사진입니다.”
그는 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내 알렐루에게 건넸다. 나무에 걸린 처참한 시신. 하얀 가면을 쓴 얼굴. 가면 속의 기묘하게 웃는 얼굴. 오른손을 가리키는 하얀 왼손. 엄지의 살만 빼고 허옇게 벗겨진 검지가 잘려나간 오른손. 오른팔과 오른손을 끼워 맞추기 위해 다듬은 흔적이 담긴 사진까지 모두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알렐루는 오른손목이 담긴 사진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꽉 쥔 주먹에 사진이 힘껏 구겨졌다.
“혹시 뭔가 떠오르는 것은 없습니까? 범인은 왜 화이트 페이스를 노릴까요? 화이트 페이스를 노리는 범인이 왜 하삼열 씨를 메신저로 삼은 걸까요? 인육 살인마에게 잡힌 하삼열 씨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요?”
김 검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계속 질문을 퍼부었다.
“그만, 그만, 그만!”
참을 수 없었던 알렐루는 비명을 지르듯 외치며 주저앉아 오열했다. 일시 침묵이 찾아왔다.
“너무 심하군요.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피해자 가족에게 너무 잔인하게 구는군요. 수사관으로서 할 짓이 아닙니다!”
이 형사가 뒤늦게 노(怒)했다.
“수사관은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직업이죠. 안 그런가요?”
김 검사는 이 형사를 조롱하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알렐루 씨 다시 뵙도록 하죠.”
뒤돌아 나가던 김 검사가 불현듯 뒤를 돌아 다시 한마디 했다.
“아, 충고를 잊을 뻔했군요. 하삼열 씨를 찾고 싶다면, 먼저 화이트 페이스를 찾아내세요. 아마 둘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육 살인마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 거고요.”
그가 사라진 뒤에도 알렐루는 여전히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사진을 회수해야 하는 이 형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효진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다. 모두 처참한 상처로 신음했다.
한참 후, 알렐루는 괴로운 마음을 접고 일어섰다. 아빠를 구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정체뿐만 아니라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접촉할 방법이 없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기다림의 끝이 비극이 아니길 빌고 빌었다.
알렐루는 구겨진 사진을 펴려 했으나, 끔찍한 모습에 손이 떨려 펼 수 없었다. 그는 그대로 사진을 움켜쥔 채,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 형사에게 건넸다.
“렐루야, 미안하다. 그 자식이 왜 널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멱살을 틀어잡아서라도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할게. 힘내.”
이 형사도 김 검사의 말대로 화이트 페이스를 노리는 인육 살인마가 하삼열 씨를 납치한 것은 그만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그 주변 사람이 화이트 페이스일 가능성이 높았고, 어쩌면 알렐루가 그 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 형사가 돌아간 뒤, 알렐루는 병실로 돌아왔다. 빈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효진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알렐루가 옆에 털썩 앉으며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감쌌다. 마치 안마기 같은 떨림이 전해졌다.
“효진아, 왜 그래?”
하지만 우효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허공만 볼 뿐이었다. 그녀는 김 검사가 두려웠다. 그의 언행을 통해 그가 화이트 페이스에게 현상금을 건 장본인이라는 걸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자신을 알아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검사라는 직업이 그렇게 대단했던 것일까? 조심한다고 했음에도 이미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에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피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알렐루에게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김 검사가 왜 두려운지, 왜 그를 피해야 하는지 말할 수 없었다. 며칠 전이었다면 쉽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기 전이었다면, 생활비가 필요했다는 말에 미안해하든지, 아니면 약간의 꾸중으로 끝났을 일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알렐루의 정체를 드러냄으로 인해, 그의 부모가 모두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모두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다. 알렐루가 생활을 책임질 거라는 걸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효진은 김 검사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냄으로써 알렐루의 정체까지 밝혀냈고, 어떤 식으로든 인육 살인마에게 전해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다음은 자신의 차례였다. 그렇기에 더욱 알렐루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도움을 구하는 것 자체가 이기적이라 생각됐다. 돈 때문에 그의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이제와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사정한다니……. 아무리 사랑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아니, 사랑하기에 더욱 그럴 수 없었다.
효진의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눈을 떠보니 침대에 누워있었고, 팔에는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치렁치렁 늘어진 플라스틱 관을 타고 누런 액체가 흘러들고 있었다. 싫었다.
‘그냥 죽게 놔둬.’
놔둔다고 죽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괜찮아?”
알렐루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부모에 이어 약혼녀까지 쓰러지자 낙심한 알렐루의 얼굴은 검게 죽어있었다.
‘말하자. 말하고 죽자. 오빠가 버리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감출 수 있다면 영원히 감추고 싶었다. 하지만 김 검사가 반드시 폭로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화이트 페이스를 미워했다. 알렐루가 화이트 페이스임을 알기에 그를 괴롭혔다. 조롱하고, 약 올리고, 흥분시키고, 충격을 주고,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고, 걱정하게 하고,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영혼까지 쪼그라들게 하고 싶어 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좋은 정보를 활용하지 않을 리 없었다. 당장 알리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극적인 상황에서 터트리기 위함일 뿐이었다.
그가 이용하기 전에 먼저 말하는 게 나았다. 최소한 그에게 이용당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알렐루를 부르려 했지만, 말라버린 혀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성대마저 굳었는지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효진은 알렐루가 준 물로 목을 축인 후에야 간신히 갈라진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오빠……, 고백할 게 있어.”
알렐루는 심장이 철렁했다. 속이 싸늘해졌다. 직감적으로 매우 괴로운 고백임을 알 수 있었다. 절로 표정이 굳었다. 억지로 웃어주려 했으나 오히려 더 괴상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효진이 알렐루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말하기 시작했다.
생활비가 떨어져 갈 때, 마침 화이트 페이스의 현상금이 올랐고, 10억으로 올랐을 때, 그 돈이면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부터, 어떻게 실행에 옮겼고, 어떻게 어그러졌는지, 그리고 현상금을 건 사람이 바로 김 검사라는 것까지 모두 말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할 수도 없었고, 할 필요도 없었다. 알렐루는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왜 부모님이 표적이 되었는지 비로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사랑했던 여자 때문이었다. 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살이 발라진 아빠의 손이 떠올랐다. 아빠의 괴로운 비명이 머리를 울렸다. 규칙적인 기계음이 죽어가는 엄마의 비명으로 들렸다. 미웠다. 원망스러웠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지만……, 알렐루는 용서할 수 없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용서되지 않았다.
“나가……. 당장 나가줘. 제발…….”
알렐루가 신음했다. 효진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엄청난 실수를 한 줄은 알지만, 그래도 그라면 용서해줄 줄 알았다. 그래도 용서를 기대했다. 믿을 수 없었다.
“제발 지금 나가.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 내게서 도망쳐. 내가 쫓아가지 못하게 빨리 도망쳐. 경찰서든, 군부대든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해. 제발 내가 널 해치지 않게 해줘.”
알렐루의 눈이 붉어졌다. 붉은 눈 때문인지, 착각인지, 피처럼 붉은 눈물이 떨어졌다.
“오빠…….”
효진은 슬픔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곧장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텅 비었다.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 적도 있으나, 정말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럴 리 없었던 일개의 가능성은 완전한 현실이 되어 효진을 괴롭혔다.
어디로 도망가야 화이트 페이스가 찾지 못할까?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화이트 페이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은 여전히 그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이젠 모두 끝나버렸다. 숨지도 피하지도 않으리라. 그냥 그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집 앞이었다. 언제 어떻게 온 것인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마치 귀소본능이 있는 말이라도 탄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집에 도착했다. 그녀는 집에 들어갔다. 현관문에는 다섯 개의 잠금장치가 달려있었으나, 알렐루와 있을 때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동으로 잠기는 도어락을 제외한 나머지는 잠그지 않았다.
‘누구든 올 테면 와. 날 데려가. 죽여.’
자포자기가 그녀를 삼켰다. 자동으로 잠긴 도어락도 열어놓고 싶었으나 그것마저 귀찮았다. 그녀는 그냥 거실 바닥에 누워 침묵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른 오후의 햇살이 창문을 뚫고 효진의 몸을 뜨겁게 훑었으나, 효진을 삼킨 차가운 어둠을 몰아낼 수 없었다.
‘아니야, 그러면 안 돼! 넌 약속했어. 그녀를 지키겠다고, 그 무엇으로부터든 그녀를 지키기로 했어. 그러면 안 돼!’
속마음과는 달리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팔아먹은 순간부터.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백번을 팔아먹어도 자신에겐 전혀 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 아빠가 납치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한 채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고, 엄마는 충격으로 쓰러져 죽어가고 있다. 그녀를 용서한다면, 그녀를 받아들인다면, 욕망과 감정을 따라 그녀와의 달콤한 미래를 추구한다면……. 부모에게 미안하여 그럴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어. 모두 내 잘못이야.’
알렐루는 자신에게 벌을 내렸다. 그녀와 헤어지는 벌, 그녀를 용서하지 않는 벌, 영원히 행복할 수 없는 벌.
알렐루는 모든 일의 진정한 원흉을 떠올렸다. 자신을 보며 비웃던 얼굴, 자신이 괴로워할 때마다 참을 수 없다는 듯 희열을 내비치던 표정, 날마다 찾아와 일부러 괴로운 소식과 증거를 보여주던 그. 그는 자신이 화이트 페이스임을 알고 일부러 괴롭히고 있었다.
김 검사가 왜 자신을 싫어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원한을 가질만한 범죄자는 얼마든지 있었고, 그런 범죄자 중 하나가 그의 가족일 수도 있었다. 그가 왜 자신을 증오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인육 살인마에게 정보를 넘기거나 사주했다면, 그를 통해 인육 살인마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이 현직 검사를 납치하거나, 협박할 수는 없었다. 그를 통해 인육 살인마를 만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빠가 죽기 전에, 속히.
***
손가락 두 개 너비에 손가락 삼 분의 일 정도의 두께를 가진 쇠막대를 아무렇게나 휘어 둥글게 이어붙인 후, 끝에 고리를 달아 기둥에 묶인 쇠사슬에 연결했다. 개목걸이 같은 고리를 목에 건 남자는 오른팔에 대충 붕대를 감고 있었다. 손목 어림에서 끝맺음한 붕대는 지혈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지 피로 흠뻑 젖어있었고, 남자의 안색은 그만큼 파리했다.
6월임에도 허옇게 말라붙은 입술로 덜덜 떨고 있는 남자가 불쌍했는지, 인상 좋은 중년 남자는 옆에 있던 석유 난로를 옮겨 묶인 남자에게 가깝게 했다. 다친 남자의 떨림은 약간 줄었지만, 창백한 안색은 변함없었다. 중년 남자는 물을 한 사발 떠서 건넸다. 초로의 남자는 오른팔을 부여잡고 있던 왼손을 뻗어 물그릇을 건네받았다. 벌컥벌컥, 시원한 물이 속의 열기를 잠시 가라앉혔다. 그러나 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몸속은 뜨거운데 몸 밖은 추워 정신을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남자를 보며 후덕한 중년 남자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내뱉었다.
“아직 죽으면 안 돼. 신선도가 떨어지면 곤란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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