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복수의 화신 / 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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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再會)]
눈을 떴다. 아팠다. 고등학생 때, 패거리에게 맞고 있는 다른 고등학생을 도우려다가 대신 흠씬 두들겨 맞았을 때처럼 온몸이 부서지듯 쑤셨다. 몸 상태가 궁금했으나 고개를 움직일 힘도 없었다. 지금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제법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붉은 구름이 몰려들었다. 어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부엉이의 울음이 박자를 재듯 규칙적으로 들렸다.
마지막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하얀 섬광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렇잖아도 따가운 얼굴이 녹아버릴 듯 뜨거웠다. 목이 꺾이지 않기 위해 버텨야 했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온몸을 휩쓸었다. 태풍에 휘말린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튕겨 다녔다. 그러다가 일시 정적이 찾아왔다. 정적이 얼마나 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0.1초, 혹은 1분. 아니, 온갖 환영(幻影)이 머리를 뒤흔들었으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을 잃어버린 상태로 하늘을 날았다. 높이 높이 올라갔다. 이대로 천국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곳에서 아빠를 다시 만나면 부둥켜안고 사죄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추락이 시작됐다. 올라가는 데 걸린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떨어졌다. 마치 끝이 없다는 무저갱(無底坑)처럼 끝없이 추락했다. 자신의 죄로 지옥에 떨어지고 있는가보다고 생각했다. 미워하고 저주하며 분노로 사람을 죽였으니 당연했다. 가진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멋대로 사용하다가 사랑하는 이들마저 지켜주지 못했으니 마땅했다. 그렇게라도 가책을 줄일 수 있다면……. 구름이 보이고, 새가 보이고, 나무가 보였다. 그리고 기억이 끊어졌다.
알렐루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동안 느끼지 못한 피로가 한 번에 찾아온 것 같았다. 의식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전히 노을이 보였다. 기시감에 이전이 현실이었는지 환상이었는지조차 모호했다. 손끝이 움직여졌다. 아직 죽지 않았음에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고개를 돌렸다. 뻐근한 목이 고통을 호소했다. 고통은 가슴을 후벼 파는 자책을 덜어주었다. 일부러 더 심하게 움직였다. 생살을 뜯어내는 듯한 괴로움이 온몸을 시원하게 씻어냈다.
사지는 멀쩡했지만, 벌거벗은 육체에는 상처가 제법 있었다. 가슴엔 화상처럼 보이는 아기 손바닥만 한 상처도 있었다. 얼굴에도 흉터가 될 상처가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얼굴 따위야 멀쩡하든 일그러지든 상관없었다.
상체를 일으켰다. 입에서 절로 신음이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운석이 떨어진 듯한 작은 크레이터의 중심에 누워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발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아직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잠시 균형감을 찾기 위해 조심스레 허우적거렸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숫자가 상당했다. 만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반대편을 향해 땅을 박찼다. 온몸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쥐어짰지만, 정작 움직인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계속 발을 굴렀다. 점점 속도가 붙었다.
***
“흔적을 찾았습니다.”
백색 양복은 대답하지 않았다.
“놈이 살아있습니다. 이동한 흔적으로 보아 점점 회복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검은 양복의 얼굴로 와인 잔이 날아왔다. 그는 잔이 날아오는 것을 뻔히 보면서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이마에 부딪힌 잔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의 머리가 붉은 포도주로 젖었다.
“사흘 만에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건가?”
백색 양복의 억양은 평범했으나, 검은 양복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결국, 그렇게 투자하고도 실패한 거군.”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떨리는 실수를 저지른 검은 양복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플랜 B를 시작해.”
검은 양복이 정중히 인사하고 사라졌다.
***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우효진이었다. 그녀의 가녀린 웃음이 보고 싶었다. 비록 분노 때문에 이성을 잃었다지만, 어떻게 그녀를 그렇게 대할 수 있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집안에 홀로 있는 것조차 불안해하는 그녀가 어떻게 도심을 지나 집으로 돌아갔을까? 모든 사람과 모든 소리, 보이지 않는 것들조차 두려워하며 돌아가는 길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자신은 그녀에게 김성환보다 더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 미안했다.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만나서 용서해 줄 때까지 무릎 꿇고 빌기로 했다. 그래야만 했다. 아빠와 엄마의 불행은 그녀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이용한 김두환 때문이었고, 인육 살인마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누군가는 자신의 정체를 밝혀낼 터였다. 그녀는 약간의 어리석음으로 그때를 조금 앞당겼을 뿐이었다.
그녀를 생각하자 힘이 났다. 알렐루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밤이었지만, 벌거벗었음을 생각하여 인적이 드문 길로만 달렸다.
“사랑하는 우리 자기 잘 이쪘져용!”
알렐루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둘만의 은어를 말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알렐루가 도착했을 때, 집에는 불이 켜있었다. 이에 반갑고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베란다로 뛰어올랐다. 베란다 창문은 여전히 열려있었다. 자신과 함께 지내는 동안에는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용하는 출입구이기도 했다.
알렐루는 베란다 창문이 잠겨있지 않은 것은 곧 자신을 아직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 해석했다. 기쁜 마음에 그는 낯뜨거운 은어를 외쳤다. 불안함과 속상함에 지쳤을 그녀에게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리며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인기척이 없었다.
불은 켜있지만, 실내는 싸늘하다니. 알렐루의 마음도 서늘해졌다.
그는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조차 망각하고 작은 집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병원에서 헤어진 후, 돌아오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녀가 갈만한 곳은 이곳 말고 떠올릴 수 없었다.
부모님께는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짊어지기 고단한 짐으로 여겨졌기에 피하고 싶어 했다. 또한, 자신의 상태를 알려 걱정을 더 해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자신과 헤어지고 부모님이 그리워졌을지도 모르지만, 그곳은 효진처럼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가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렇다고 필요할 때 며칠씩 머물도록 해줄 만한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평생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공부와 아르바이트에만 집중했기에 마음을 터놓을 친구를 사귈 시간조차 없었다고 했다. 수업시간에 만나는 사람들은 그저 인사하고 함께 점심 식사하는 정도의 사이였고, 아르바이트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그냥 수다 떠는 사람들이었다. 효진이 그들과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목숨을 맡길 만큼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면 함께 거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그들은 목숨을 맡길 만큼 친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녀는 그들과 오랫동안 연락조차 끊고 지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려 했으나, 애써 치워버렸다.
어찌해야 좋을지 집안을 서성이며 고민하던 알렐루의 눈에 못 보던 물건이 보였다. 거실 텔레비전 옆에 낡은 VTR이 있었다. 자신이 나서던 날까지 그런 것은 분명 없었다. 소름이 끼쳤다. 효진이 산 것이라 생각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VTR에 다가가 전원을 눌렀다. 켜지지 않았다. 뒤쪽을 점검해보고서야 콘센트가 빠져있음을 알았다. 전기를 연결하고 나자 기기가 자동으로 작동되었다. 기분 나쁜 소음을 내던 기기는 커다란 입으로 검은 테이프를 뱉어냈다. 라벨이 없는 빈 테이프로 보였다.
알렐루는 텔레비전 전원을 켜 비디오로 맞춘 후 VTR이 뱉어낸 비디오테이프를 다시 욱여넣었다. 불안이 온몸을 긴장시켰다. 왜 이리 불행한 일만 생기는 것인지 분통이 터졌다. 힘을 얻고 나서 더 불행해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흑백의 점들이 교차하던 화면이 지직거리더니 제대로 된 영상을 내보냈다. 거기에 그녀가 있었다. 창고 같은 곳의 한가운데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 위에 앉아있는 그녀는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에는 벌써 눈물이 가득했다. 알렐루의 턱이 떨렸다.
옆에 누군가 있는 듯, 그녀는 그곳을 향해 울상지으며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무언가 지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효진은 고개를 작게 가로 저였다. 지시는 계속 이어졌고, 그녀는 울먹이면서도 계속 거부했다. 분노한 남자가 화면 안으로 난입했다. 복면을 쓴 남자는 그녀에게 윽박질렀다. 하지만 효진은 두려워 떨면서도 끝내 거부했다. 남자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의자가 소란스럽게 멀리 굴러갔다.
한참 욕을 퍼붓던 복면이 카메라 앞으로 다가왔다. 화면 가득 그의 검은 얼굴이 들어왔다.
- 이년을 구해봐라, 화이트 페이스, 아니 하알렐루.
영상이 끝났다. 알렐루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구해보라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이는 그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수작일 뿐이라 생각됐다. 이미 그녀는…… 없다.
욕지기 나는 것을 참으며 다시 화면을 돌려보았다. 장소나 범인에 관한 힌트는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자학하는 심정으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영상을 수십 번이나 반복재생했음에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그저 괴로움만 가중되었다. 새벽이 되도록 범인이 누굴지 고민했다. 떠오르는 것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자신이 누군지 알고,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아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김두환 검사. 그뿐이었다. 아니 그여야만 했다. 그가 아니라면 어디서도 그녀는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알렐루는 인내했다. 김두환의 집은 모른다. 아는 것은 그의 사무실뿐이었다. 고로 그가 출근할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제발, 그가 맞기를. 그래서 그녀를 무사히 구출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시간은 지겹도록 느렸다. 긴장과 두려움이 쌓여갔다. 올바른 판단과 사고(思考)를 위해 긴장을 풀어야 했다. 샤워실로 향했다. 비로소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떠올렸다. 뜨거운 물에 닿자 온몸이 쑤셔왔다. 손바닥을 문질러 가득한 수증기를 지우고 거울을 보았다. 가슴의 일그러진 화상은 벌써 아물었으나 진한 흉터가 남았다. 알렐루는 그 흉터에 아빠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담았다. 왼쪽 눈썹에는 칼에 베인 듯한 굵고 짧은 흉터가 있었다. 실명하지 않은 게 다행인 상처였다.
그는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그녀를 담을 흉터는 필요 없다고, 무조건 구해야만 한다고 기도했다.
시간이 되었다. 그는 옷을 걸치며 베란다 창문에서 뛰어올랐다. 아직 예전처럼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충격 때문에 힘이 회복되지 않고 있는 것인지, 영구적으로 힘이 줄어든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오직 그녀를 구해내는 것만이 중요했다. 설혹 힘이 부족하여 목숨을 잃는다 해도.
“이봐, 당신!”
경비가 외쳤다.
“거기서!”
다른 이들이 합세했다.
“막아!”
급히 나타난 경비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알렐루는 그런 이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구든 막으면 쓰러트릴 뿐이다. 진압봉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던 경비원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총을 뽑았다. 하지만 총기는 엄격한 규제를 받기에 마음대로 쏠 수 없었다. 그 사이 다시 여럿이 쓰러졌다.
“다가오지 마!”
겁먹은 경비가 외쳤다. 알렐루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막고 있는 통로가 그가 가야 할 길이었다. 탕! 겁먹은 경비가 얼결에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알렐루는 끄떡하지 않았다. 시간을 끌수록 번거로워진다고 생각한 알렐루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몇 번의 총성이 더 울렸으나 소용없는 발버둥이었다. 알렐루는 모두 기절시킨 후 서둘러 10층을 향했다.
꽈당!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밖이 소란스럽자 불안한 표정으로 경계하던 수사관들이 난입한 침입자를 향해 덤벼들었다. 평소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제법 민첩했다. 하지만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빨리 뒤로 나가떨어졌다. 실무관은 덜덜 떨다가 알렐루가 문에서 떨어져 빈틈을 보이자 재빨리 밖으로 달아났다.
“성질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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