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복수의 화신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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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의 전쟁]
성탄절이 바싹 다가왔다. 즐거운 음악은 없었지만, 곳곳에 성탄 트리와 전구가 빛을 발했다. 세상의 모든 기쁨을 백화점이 가져간 듯, 가장 화려한 빛을 세상에 뿌렸고,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구원의 기쁨을 쇼핑하고 있었다.
세상은 분주했고, 어딘지 붕 뜬 느낌이었다. 경제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보도가 연일 줄을 이었지만, 명품 열풍은 점점 가열되어갔다. 한쪽에서는 연말 특수니, 수당이니, 특별보너스니 즐거운 비명을 질렀고, 한쪽에서는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밀린 임금이라도 달라며 소동을 벌였다.
그리고 즐거운 연말연시의 대미를 장식하듯, 유흥비를 위한 강도와 살인이 줄을 잇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방송국 우편함에서 정체불명의 소포가 발견되었다. 보도국 앞으로 보내진 소포엔 작은 메모리칩이 들어있었고, 내용을 확인한 보도국은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이른 아침부터 국장급 이상의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점심 가까이 되어 끝난 회의는 메모리칩의 내용을 편집 없이 방송하기로 했다. 약간의 준비를 거쳐 오후 1시 속보가 나갔다.
아나운서의 간단한 설명 후, 나타난 화면은 구도와 화질이 모두 조잡했다.
동네 문방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가면을 쓴 사람이 진지하게 말했다.
[난 ‘화이트 페이스’다. 산부인과 살인마 사건 이후 나는 세상을 지켜보았다. 과연 사람들은 얼마나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얼마나 약자를 보호하고 배려하며 살 것인가. 과연, 법은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을 억제하고 피해자를 도울 수 있을 것인가.
난 실망했다. 날이 갈수록 범죄는 늘어가고 사악해졌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른 이의 눈물과 피를 당연시했다. 국가조차 그런 자들을 억제할 의지나 능력이 빈약했다.
이제부터 나는 피해자들과 국가를 대신하여 전쟁하겠다. 사회를 좀먹고 피해자의 피를 빠는 모든 범죄자에게 고한다. 너희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너희가 피해자들에게 강탈한 만큼, 너희의 피와 눈물을 내가 거둘 것이다.
잘 들어라. 내 법칙은 한 가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기다려라. 내가 너희를 찾아간다.]
말을 마친 화이트 페이스는 귀여운 가면을 천천히 벗었다. 가면에 가려졌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가면을 벗은 얼굴에는 눈, 코, 입이 없었다. 그저 하얗게 빛나고 있을 뿐.
***
화이트 페이스의 선전포고가 방송된 후, 일반인들은 환호했고, 피해자들은 기대했으며, 범죄자들은 불안해했다.
그리고 경찰은 분노했다.
“씨, 아니 지가 뭐라고 저 지랄이야 지랄이.”
“누가 아니래요. 지가 뭐, 뭐, 뭐.”
“그래, 뭐?”
“아니, 음……, 판검사라도 된답니까?”
“그렇게 고민하며 찾아낸 단어가 고작 ‘판검사’였냐!”
이 형사가 박 형사의 뒤통수를 때렸다.
“아이, 씨. 뭐 좋은 표현이 없잖아요!”
“썅, 어쨌든 우리는 그놈이 범죄를 저지르면 잡아야 하니까 준비하고 있어.”
“뭔 재주로 잡아요? 폭탄이 터져도 멀쩡한 놈을, 총으로? 얼굴도 모르는데 구속영장 신청할까요?”
박 형사가 이 형사의 속을 긁어댔다.
“야, 지하철 테러범은 어떻게 됐어?”
오 반장이 들어오자마자 물었다. 이 형사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중얼거렸다.
“에이, 썅. 놈이 테러범이나 잡아왔음 좋겠네.”
“선배님은 도대체 그놈 편입니까, 반대편입니까?”
박 형사가 다시 딴죽 걸었다.
“뭐, 그놈이 내 일을 덜어주면 그놈 편이고, 내 일을 늘려주면 반대편이지. 별거 있냐? 그리고 보자 보자 하니 너 많이 컸다?”
벼르던 이 형사는 박 형사를 단호하게 응징했다.
***
늦은 밤, 알렐루는 범죄 더듬이를 따라갔다.
여전히 세상은 크고 작은 범죄로 넘쳤다. 하루 평균 5,400건의 범죄. 단순 절도 800건, 폭력 340건, 상해 190건, 성폭력 61건, 강도 11건, 살인 3~4건, 기타 4,000여 건(2011년 통계의 대략적인 수치). 그중 절반이 서울, 인천, 경기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수도권에 절반의 범죄가 몰린 것은, 수도권에 절반의 인구가 몰려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전국 1/4의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인구의 1/4이 몰려있기 때문이었다. 즉,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범죄 건수는 인구에 비례했다.
그 외에는 부수적인 요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학력, 경제력 등에 따라 범죄 유형은 변해도 범죄율에는 큰 차이가 없다. 범죄의 유혹을 이겨내는 것은 환경이 아닌 각자의 선택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1/4을 먼저.’
그는 서울에서 범죄자들을 몰아내고 차츰 범위를 넓혀가기로 했다. 날마다 천 건이 훌쩍 넘는 범죄가 일어나는 서울에서 모든 범죄자를 잡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강력범죄에 집중하기로 했다.
알렐루는 범죄 센서에 걸리는 미약한 신호들은 무시하고, 가장 강한 자극을 따라갔다. 도심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알렐루의 마음은 그다지 편치 않았다. 동해복수(同害復讎, 당한 만큼 갚아줌)를 선언했으나 자신이 그만큼 모질게 행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피해자들의 고통과 눈물을 보면 마음에 울분이 치솟지만, 막상 가해자들에게 보복하려면 마음이 약해졌다. 더군다나 강력범죄자들이 저지른 행동을 그대로 갚아준다면, 그들 중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날마다 수십 혹은 수백 명을 장애인으로 만든다면 그것 또한 새로운 사회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 사회는 가해자에게 지나치게 관대했고, 법은 피해자를 두 번 울렸다. 10의 피해를 입힌 가해자에게 1의 대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피해자를 위해, 그리고 정의를 위해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각오를 다지는 사이 범죄 현장에 도착했다. 잠시 방향을 감지하고 있을 때, 아래에서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하루평균 61번 발생하는 범죄 현장이 내려다보였다. 알렐루는 7층에서 뛰어내렸다.
아스팔트가 진동하며 여자를 위협하던 남자가 넘어졌다. 넘어졌던 남자가 비틀비틀 일어서며 꼬인 혀로 욕을 퍼부었다.
술에 취하여 사리분별을 못 하는 상태에서 벌인 강간사건. 심신미약이 인정되면, 초범에겐 집행유예 내지 짧은 징역에 처하는 ‘사소한’ 범죄였다. 하지만 여자에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는 거대한 범죄였다.
알렐루는 고개를 숙인 채 다가섰다. 남자가 거친 욕과 함께 주먹을 휘둘렀다. 몇 차례의 주먹질에도 알렐루가 꿈쩍도 하지 않자 그제야 술 취한 남자가 멈칫거렸다. 알렐루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차마 얼굴을 보며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문 알렐루의 주먹이 남자의 배에 꽂혔다. 강간 미수범은 입으로 음식을 게워내며 기절했다.
반쯤 벗겨졌던 여자는 찢어진 옷으로 간신히 몸을 가렸다. 얼굴은 번진 마스카라와 립스틱, 그리고 멍 자국이 어울려 엉망이었다. 여전히 훌쩍임을 삭이지 못한 여자가 독한 눈으로 쓰러진 남자를 노려보았다.
기절한 채 낮은 숨을 몰아쉬는 중년 남자는 의외로 평범해 보였다.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직장인이며 누군가의 남편, 그리고 누군가의 아버지. 오늘의 일은 술기운에 저지른 실수일지도 모른다. 가정에서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을 법한 얼굴이었다. 평범한 얼굴 속에 감춰진 범죄 욕구. 어쩌면 모든 사람이 범죄 욕구를 깊이 감춘 채 평범한 생활을 하는 지도 모른다.
알렐루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단호해지자. 냉정해지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주문을 외우듯 다짐했으나 발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살인마를 찾다가 발견한 가정파괴범을 고자로 만들던 느낌이 발등에서 되살아났다. 애써 끌어올렸던 분노가 가라앉았다.
남에게 상해를 가하기는 역시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첫날부터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머뭇거리는 사이, 피해 여성이 다가왔다. 여전히 떨리는 몸으로 성큼 다가온 그녀는 기절한 가해자를 발로 차기 시작했다. 나쁜 놈, 더러운 놈,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때리던 여자는 남자의 사타구니를 세게 차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사타구니를 맞은 남자는 기절한 상태에서도 몸을 떨며 신음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던 알렐루는 “이제 된 건가요?” 물었다. 여자는 잠시 이를 갈며 생각하더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셨죠?” 물었다. 난감한 마음이 든 알렐루는 자신도 모르게 뒤통수를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가 작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터트려 주세요. 다시는 이런 짓 못하게.”
알렐루의 심장이 빨라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천천히 다가서다가 방금 여자가 하이힐로 힘껏 찼다는 사실을 떠올린 알렐루가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미 터지지 않았을까요?”
터진 곳을 또 찰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만져서 확인하기는 싫었다. 알렐루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여자가 다가서더니 쪼그려 앉았다. 작고 가는 손을 뻗어 자신이 응징한 결과를 확인했다. 알렐루는 얼굴을 찌푸렸으나,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안 터졌어요.”
내심 터졌길 바랐던 알렐루는 한숨을 내쉬며 다가섰다. 여자는 복수의 장면을 꼭 보고 말겠다는 듯 심각한 얼굴로 사타구니를 내려다보았다.
으슥한 골목에서 중년 남자의 비명이 울렸다.
남자를 응급실 앞에 내려놓은 후, 그는 빌딩에 올라갔다. 첫 응징은 후련하지 않았다. 과연 옳은 것인지 벌써 의문이 생겼지만,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였다. 이제와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서울의 야경은 화려했다. 온갖 탐욕과 죄악이 화려한 불빛으로 치장하고 세상을 유혹했다. 환호와 건배로 신음과 비명을 감춘 도시. 그 잔인함에 물들지 않기를 기도했다.
알렐루는 신호를 따라 다시 달렸다.
누군가 어두운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남자는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허겁지겁 골목을 돌아서던 남자는 무엇인가에 느닷없이 얻어맞고 뒤로 튕기듯 넘어졌다. 어두운 골목에서 쇠파이프와 벽돌을 든 남자 둘이 걸어 나왔다.
“새끼, 눈치는 더럽게 빠르네.”
“그래 봤자 부처님 손바닥이지!”
둘은 피 흘리는 남자를 보며 낄낄거리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허리를 숙여 남자의 주머니를 뒤졌다.
하늘에서 알렐루가 떨어졌다. 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에 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는 알렐루를 발견하고는 내려놓았던 벽돌과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알렐루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미친놈, 저거 뭐야?”
상황을 파악 못 한 남자가 벽돌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알렐루는 둘을 노려보았다. 천천히 다가오는 당당한 모습에 두 남자는 뒷걸음질 치다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왼쪽 남자가 알렐루의 얼굴을 향해 힘차게 벽돌을 던졌다. 그 틈을 이용해 오른쪽 남자가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들었다. 많이 해본 솜씨였지만, 상대가 나빴다.
알렐루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붉은 벽돌이 알렐루의 광대뼈를 맞췄다.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거의 동시에 쇠파이프가 관자놀이를 때렸다. 떵, 하고 울리는 소리와 함께 파이프가 살짝 휘었다. 진동을 이기지 못한 남자는 쇠파이프를 놓쳤다.
알렐루가 오른손을 뻗어 파이프를 휘두르던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그는 거칠게 발버둥 쳤으나 알렐루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벽돌을 던진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알렐루가 제자리에서 도약했다. 멱살 잡힌 남자가 마치 부댓자루처럼 휘날렸다. 두 남자가 도망치는 강도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도망치던 남자는 알렐루의 가슴에 부딪혀 나동그라졌고, 잡혀있던 남자는 도약의 충격에 기절했다.
“흉악할 뿐 아니라 의리도 없군.”
주저앉은 남자는 질린 얼굴로 엉덩이를 뒤로 끌었다. 이미 다리가 풀려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알렐루는 기절한 남자를 주저앉은 남자 위에 던졌다. 친구에 깔린 남자가 버둥거렸다. 구차한 모습을 지켜보던 알렐루는 그를 기절시킨 후,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들의 상의를 찢어 밧줄처럼 꼬아 포박했다.
퍽치기에 당한 남자는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다행히 목숨에 지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피해자 옆에 떨어져 있는 지갑을 주웠다. 지갑엔 5만 원짜리 하나가 들어있었다. 고작 5만 원을 빼앗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음의 문턱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지갑 안에서 그의 가족이 활짝 웃고 있었다. 웃음이 울음으로 변할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먼저 피해자를 병원으로 옮기고 돌아온 알렐루는 기절해 있던 두 강도를 깨웠다. 어두운 골목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피해자의 핏자국이 분노를 일깨웠다.
“몇 번째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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