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복수의 화신 /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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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같은 것들!’
아무리 달려도 시원하지 않았다. 가슴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분노가 삭여지지 않았다.
띵동, 그때 문자가 왔다.
- 혹시 미성년자도 취급하시나요? 몇 달 전에 보고 화가 치밀었던 사건인데, 오늘 찾아보니 녀석들은 잘 지내고 있나 봅니다. 비밀방에서 서로 안부를 전하며 시시덕거리더군요.
첨부 파일로 사건 개요와 결과, 현재 근황 등이 전해졌다.
사건은 알렐루가 잠적했던 작년 말에 일어났다. 7명의 중3 학생이 여학우 하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다가 아지트로 끌고 가 집단 성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을 알게 된 피해 학생의 부모가 학교에 신고했으나 학교에서는 사건을 덮으려고만 시도했다. 참다못한 학부모는 결국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피의자가 미성년자였기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고, 주변 학교로 전학 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해 학생들의 부모가 찾아와 피해 학생이 먼저 꼬리 쳤다며 모욕하는 2차 피해가 발생했고, 우연인지는 몰라도 다음날 피해 학생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공개되며 3차 피해가 생겨났다. 거듭된 충격으로 여학생은 자퇴한 후 두문불출하다가 자살에 실패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하지만 일곱 명의 가해자는 달랐다. 그들은 전학 간 학교에서 자신들의 신분을 감춘 채 잘살고 있었다. 이제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그들의 정체를 알 사람은 더욱 없었다.
그들은 비밀대화방을 만들어 여전히 서로 교류하고 있었다. 현재 지내고 있는 상황은 어떤지, 진학한 학교가 어떤지 걸쭉한 욕설을 늘어놓으며 떠들어댔다. 가끔 자신들을 강제 전학시킨 세상에 대한 분노와 강제 전학 당하기 전 함께 어울렸던 추억들을 되새기기도 했다. 대화 속에 괴로움이나 반성은 없었다. 자신들이 당한 미약한 처벌조차 불평하며 과거를 그리워했다.
그렇잖아도 어디에 분노를 풀어야 할지 모르던 알렐루의 마음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겉 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어린 새끼들이!’
어떻게 고작 중학생밖에 안 된 녀석들이 집단 성폭행을 계획할 수 있을까? 추악한 사회를 만든 어른들의 잘못이 크다고 해도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은 전적으로 가해자들의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미성년자라 해도 가해자로서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미성년자라는 허울과 교육 당국의 책임회피, 부모의 재력 등이 영향을 끼쳐 결국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남은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인적사항을 알려주세요.
알렐루가 문자를 보내자마자,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바로 답신이 왔다. 가해 학생 일곱 명의 주소와 학교, 연락처 등 상세한 정보가 담겨있었다.
알렐루는 잠시 화를 누르고 저녁에 방문하기로 했다. 지금은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효진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날은 잠깐씩 선잠이라도 들곤 했는데, 오늘따라 피곤하면서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잠들면 반드시 악몽을 꿀 것만 같아 무서웠다. 밤은 길기만 했다. 그렇게 알렐루를 기다리던 그녀는 그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달려나갔다.
그는 여전히 알아볼 수 없었다. 사실 누군가 그의 흉내를 내며 다가오면 그냥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조차 모르는 애인이라는 생각에 효진은 괜히 눈물이 났다. 더군다나 항상 들어올 때마다 하던 귀여운 암구호도 말하지 않았다. 정말 화이트 페이스가 맞는지 불안해진 효진은 뒷걸음질 쳤다.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효진이 알렐루의 얼굴을 알 수 없었기에, 둘은 하나의 암호를 정했었다. 낯뜨겁고 우스운 문장이었지만, 효진은 ‘화이트 페이스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느냐’는 논리로 알렐루를 굴복시켰다. 그동안 알렐루는 효진이 오늘처럼 불안해하는 날이면, 귀여운 표정으로 암호를 외쳤다. 그러면 효진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고, 알렐루는 부끄러워하며 웃음으로 때웠다.
하지만 오늘은 도무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나야,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어.”
퉁명스럽게 말하는 그를 보며 효진은 더욱 불안에 떨었다. 알렐루는 불안해하는 그녀를 보며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심시켜주지도 않았다. 어쩐지 이젠 지쳤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효진은 간신히 화이트 페이스를 확인할 방법을 떠올렸다. 눈물에 흐릿해진 눈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본 후, 눈을 감고 기억을 떠올렸다. 얼굴이 그려지지 않았다. 얼굴을 알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그라는 것을 알았지만, 약간의 불안과 서운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 사랑한다면서, 자신의 불안을 달래주지 않는 것인지…….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솟았다.
눈물을 보다 못한 알렐루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얼굴을 기억할 수 없는 만큼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지조차 의심스러워졌다.
“나야, 루. 화이트 페이스. 효진이를 구한 남자. 하지만 오늘은 낯간지러운 말을 해줄 기분이 아니야. 미안해.”
효진은 말없이 울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반영되었던 것인지, 울다 지쳐 잠든 그녀는 깰 수 없는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김성환을 만났다. 그는 그녀를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온몸을 헤집고 찢고 도륙했다. 마치 현실처럼 고통조차 생생했다.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깨어날 수 없었다. 꿈이라고 외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
‘넌 죽었어! 루 오빠에게 죽었어!’
“날 죽였다고? 누가? 네가 봤어? 이게 꿈이라고 생각해? 넌 그날 위대한 어머니가 되었어. 내 손으로 그렇게 만들었지. 이제 현실로 돌아와. 화이트 페이스가 구해줬다는 망상에서 벗어나라고!”
그가 깔깔대며 웃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꿈은 점점 현실이 되었다. 화이트 페이스는 사라지고 산부인과 살인마만 남았다. 귀여운 아기가 악마 같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아기는 순수한 얼굴로 사악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억지로 다리를 벌렸다. 갓난아기가 성인보다 강한 힘으로 자신을 제압했다. 그리고 다시 뱃속으로 들어오려 했다. 몸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죽을 것 같았다. 죽고 싶었다. 죽어지지 않았다. 현실이 꿈이라면, 꿈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효진아, 효진아!”
효진의 반복된 비명에 알렐루는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그녀의 몸은 마치 간질환자처럼 발작하고 있었다. 알렐루는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효진아. 제발 이러지 마. 주님, 살려주세요!”
울면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병원을 극도로 싫어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늦지 않게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그가 그녀를 들어 올렸다.
“아악!”
그녀가 번쩍 눈을 부릅뜨고 비명을 질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거칠게 몸부림쳤다. 그녀가 다칠까 염려된 알렐루는 침대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뭐든 할 테니 살려주세요!”
구석으로 피한 채 공허한 눈으로 외쳤다.
“효진아, 제발 이러지 마. 나야 나. 화이트 페이스. 그날 널 구해줬잖아.”
“전 당신이 누군지 몰라요. 도망치지도 않을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뭐든지 하겠어요. 절 수술하지 말아 주세요.”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통곡했다. 알렐루의 손길이 닿으면 마치 끔찍한 괴물이라도 되는 듯 몸을 떨면서도 저항하지 못했다. 차라리 반항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알렐루는 그녀에게 손조차 댈 수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사랑하는 우리 자기 잘 이쪘져용!’”
그가 울면서 귀여운 척했다.
“봐, 맞지? 나 맞지?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제발 돌아와 줘.”
효진의 멍한 시선이 초점을 맞추고 알렐루의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한 눈이었다.
“루? 오빠?”
“그래, 나야!”
반가운 마음에 소리가 커졌다. 효진은 다시 움츠리고 고개를 돌렸다.
“아냐, 꿈이야. 다 꿈이야. 난 죽었어. 죽었어…….”
혼자 중얼거렸다. 망상이라도 걷어내려는 듯 외면했다. 하지만 끔찍한 현실에 비하면 너무 달콤한 망상이었다. 그 망상이 현실이길 바라는 만큼 자꾸 힐끔거렸다.
“꿈이 아니야, 효진아. 그날 널 구해주고, 널 사랑하게 됐어. 그래서 이렇게 함께 살잖아. 네가 날 알아볼 수 없다며 암호도 정해줬어. 기억나? ‘사랑하는 우리 자기 잘 이쪘져용!’ 이렇게 하면 알아볼 수 있다고 했잖아. 설마 화이트 페이스가 이런 귀여운 행동을 하겠느냐며, 네가 억지로 시켰잖아. 이렇게 하면 알아볼 수 있다고 말했잖아.”
알렐루는 죄책감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 오빠? 저정말, 정말 꿈 아니에요? 이게 현실 맞아요? 이게, 이게 정말 현실이에요?”
두려움이 옅어진 얼굴엔 울음이 가득했다.
“그래, 현실이야. 이게 현실이야. 무슨 꿈을 꿨는지 몰라도, 그건 그냥 악몽이었어. 이게 현실이야. 그러니 악몽에게 지지마. 내게 돌아와 줘.”
효진은 어린아이처럼 우왕, 울음을 터트리며 알렐루에게 안겼다.
오후 늦게까지 안정을 찾지 못한 효진은 저녁이 되어서야 알렐루의 품에서 간신히 잠들었다.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그는 자정 무렵 집을 나섰다. 혹시 다른 때처럼 깨는 것은 아닌지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아기처럼 새근거리고 있었다.
휴대폰을 보고 주소를 다시 확인한 그는 서둘러 첫 번째 가해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지만, 가해 학생은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었다. 알렐루는 게임에 몰입 중인 그를 기절시켜 납치했다.
“성폭행범 강성일 맞지?”
억지로 깨워진 강성일은 눈만 굴렸다. 비로소 상황을 파악하고 나자 그는 다급히 소리쳤다.
“아, 아니에요! 전 아니에요!”
“이미 네 범행기록, 수사과정 모두 확인했다. 거짓말할 때마다 손가락 하나씩 뽑아버린다.”
뻔뻔한 거짓말에 분노가 치밀었다. 범죄를 저지를 때 약자 앞에서 쓰는 가면과 죄를 지적받을 때 쓰는 가면이 이리 다를 수 있다니. 미성년자라는 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 같았다.
“뉴스에 나온 집단 성폭행범 맞지?”
화이트 페이스의 분노와 증오로 채워진 눈은 미성년자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학생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범은 몇이지?”
“일곱……이요.”
“좋아. 아직 서로 연락하지?”
“……요, 요즘엔 잘 안 해요.”
“거짓말 마라. 비밀대화방에서 수시로 연락하는 것도 알고 있다.”
“잘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이젠 거짓말 안 할게요!”
강성일은 손가락을 뽑힐까 두려워 손을 감췄다.
“아지트는 어디지?”
“지난번 중학교 뒷산에 공터가 있어요.”
“좋아. 그럼 나머지 여섯 명을 모두 그쪽으로 불러내라. 지금 당장.”
“하,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는걸요?”
“해내는 게 좋을 거야. 안 오는 놈 하나에 손가락 하나다.”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화이트 페이스의 손에서 가루가 되었다. 남학생은 부들부들 떨며 침을 삼켰다. 그는 못 나온다는 친구들을 어르고 달래고 화내고 협박하여 모두 불러냈다. 비록 협박에 의한 것이라지만, 자신의 손가락을 위해 친구를 팔아먹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한 시간쯤 지나자 아지트에 일곱 명의 소년이 모두 모였다. 고등학생이라지만 어찌 보면 어리고, 어찌 보면 성인보다 더 현실에 찌든 얼굴이었다.
강성일 외 다른 여섯 명이 한쪽 구석에서 지켜보는 알렐루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아무리 물어도 강성일이 대답하지 않자, 한 명이 인상을 험하게 긁으며 직접 물어보려 다가왔다.
알렐루는 그의 멱살을 잡아 제자리로 던졌다. 그는 볼링핀처럼 굴러 친구들과 부딪혔다. 다섯 명이 험한 욕을 뱉으며 분분히 일어섰다. 하지만 알렐루의 힘을 본 터라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알렐루는 그런 그들을 비웃으며 중앙에 섰다.
“너희는 한 여학생의 인생을 망쳐놓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난 세상에 정의가 살아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너희를 징벌해야겠다.”
별 미친놈이 다 있다는 얼굴로 듣던 아이들은 부들부들 떠는 강성일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홀로 범죄자를 처단하는 미친놈. 그게 누구인지 일제히 머릿속에 떠올랐다. 강성일을 제외한 여섯 명이 일제히 도망쳤다. 하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1분도 되지 않아 모두 제자리로 끌려왔다.
알렐루는 작은 자비를 베풀어 그들을 기절시켰다. 공포에 떨던 소년들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는 기절한 녀석들의 고환을 가차 없이 터트렸다. 중간에 깨어난 소년이 있었지만, 다시 기절시켜주는 친절은 베풀지 않았다. 우렁찬 비명이 울렸지만,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너희가 지은 죄의 정당한 대가를 치러라. 그것이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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