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멸망의 아들 / 38화
간신히 버텨낸 블랙은 다시 문을 닫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태풍의 중심에 선 화이트는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퍼렇게 변해 있었다. 블랙을 본 화이트는 마치 구원자를 만난 듯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주인님, 부르신 블랙이 왔습니다.”
짐승은 이후로도 한참 욕을 퍼붓고 나서야 블랙을 노려보았다. 서늘한 눈빛을 마주한 블랙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일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무능한 새끼!”
짐승이 흑단 목으로 된 보좌의 손잡이를 한 움큼 뜯어 던졌다. 블랙은 죽음의 위기를 느꼈다. 빠르진 않았지만 피하거나 막을 수는 없었다. 대신 자신의 모든 힘을 정수리에 모았다. 머리 터지는 소리와 함께 블랙이 멀리 날아갔다. 블랙은 반사적으로 재빨리 일어섰으나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웠다. 어지러움이 조금 가라앉자 비로소 통증이 몰려왔다. 그제야 그는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얼굴과 상체가 엉망이 되었음을 알았다.
다시 한 번 욕설을 퍼부어 분풀이를 마무리한 짐승은 매서운 눈으로 블랙을 내려다보았다. 블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고하게.”
짐승의 눈치를 살피던 화이트가 블랙에게 눈치를 주었다. 블랙은 입을 열었다. 어지럽고 정신없기는 했지만,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벙어리처럼 어버버하는 소리만 나올 뿐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황한 그는 짐승이 다시 분노하기 전에 빨리 보고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말은 더욱 소리로 표현되지 못했다.
“쓸모없는 새끼.”
짐승의 눈이 다시 사나워졌다. 방금의 충격으로 블랙의 언어기능에 이상이 생긴 것을 눈치챈 화이트는 포로들을 끌고 엉거주춤 따라 들어온 비스트에게 신호를 보냈다. 짙은 회색 복장의 지(G)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으나, 다행히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보고를 시작했다.
“국정원 북한 작전팀장 지, 현황 보고드립니다. 북한에 투입된 비스트 대북중대 제3소대는 현재 맡겨진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고 당 및 군의 지휘권을 확보했습니다. 당과 군의 수뇌 17인을 억류하고, 방해가 될 요소는 모두 제거했습니다. 모든 작전은 비밀리에 진행되어 억류 중인 수뇌부와 일부 가족 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방 여러 국가의 첩보원이 잠입해 있기는 합니다만, 3소대 요원 프로이드가 각국 요원들을 심문하여 알아낸 사실을 토대로 눈치챌 가능성이 있는 자들 또한 모두 제거했습니다.”
프로이드는 최면술이 가능한 정신능력자였다. 일반적인 최면술은 암시를 거는 수준에 불과했으나, 그의 최면술은 저항하는 자라 할지라도 비밀을 캐내고 마음과 행동을 조종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핵은?”
“북한의 핵기술은 기존의 추측보다 놀라운 수준이었습니다. 원료만 보충된다면 조만간 충분한 양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보고가 진행될수록 지의 목소리는 차분해졌다. 지가 보고하는 사이 블랙은 화이트의 지시를 받은 마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플루토늄은?”
“이미 북쪽으로 올려보냈습니다.”
“부족하진 않겠지?”
“네, 충분합니다.”
“흠……. 그럼 호 카테콘만 남았군.”
다시 돌아온 불안한 화두에 모두 숨을 죽였다.
“그, 바다에 빠졌으니 죽지 않았겠습니까?”
지가 보고하는 것이 못마땅해 끼어들 틈만 엿보고 있던 블랙은 위험을 감수하고 나섰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멍청한 놈! 넌 내가 바다에 빠지면 죽었다고 생각할 테냐?”
“제, 제가 어찌…….”
“놈은 호 카테콘이다. 내가 죽지 않을 일에 놈이 죽을 리가 없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이기 전에는 놈의 죽음을 확신하지 마라!”
노여움을 감당 못 한 블랙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를 한참 노려보던 짐승은 시선을 돌려 지에게 턱짓했다.
“그놈들은 뭐냐?”
지에게 밀리는 듯한 기분이 든 블랙이 이를 악물었다. 지는 엎드려있는 블랙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 대답했다.
“이곳에 숨어든 스파이들입니다. 지난 사건을 계기로 모두 색출했습니다.”
“토 카테콘 소속인가?”
“그들은 지난 사건과 함께 모두 빠져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다른 정부에 소속된 스파이들이고, 청와대 경호실 소속도 한 명 있습니다.”
“흥. 꼴에 대통령이라고 아직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나 보군.”
“죄송합니다.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아냐, 넌 북쪽 일을 처리해야지.”
지에게 다정히 말한 것과는 달리 짐승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블랙.”
“네!”
대답과 함께 이마를 바닥에 찧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네 녀석도 쓸모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봐.”
“네, 쓸만한 녀석들로 보내겠습니다.”
“지랄하지 말고, 네가 가라. 청와대.”
“네! 실망하시게 하지 않겠습니다.”
바닥이 더 크게 울렸다. 마치 시위하는 것처럼 보이자 짐승의 코가 실룩거렸다. 그의 기색을 읽은 화이트가 주위를 환기시켰다.
“스파이는 어찌할까요?”
못마땅한 듯 혀를 찬 짐승이 시선을 스파이들에게 돌렸다.
“정보는 어디까지 샜나?”
“각국으로 새어나간 정보는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의 목소리는 처음과 달리 자신 있었다.
“다만?”
“미저리로 변장하고 침투했던 스파이가 서버의 보안 사항들에 접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추정이야, 확신이야?”
“죄송합니다. 확실합니다. 미저리의 컴퓨터에서 그녀의 보안등급을 뛰어넘는 정보가 검색되었고, 내용을 복사한 흔적까지 발견되었습니다.”
보고가 계속될수록 짐승의 표정은 점점 노골적으로 일그러졌다. 타오르는 듯한 시선이 블랙의 뒤통수를 향했다.
“무능한 놈. 왜 아직 그러고 있나! 빨리 꺼지지 못해!”
짐승의 불호령에 블랙은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뒤통수를 향해 저주를 한바탕 쏟아부은 후에도 한동안 씩씩거린 후에야 비로소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유출된 정보는?”
“죄송합니다만……, 비스트에 관한 정보와 세계정복사업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입니다.”
“썅.”
이미 한쪽이 망가진 흑단목 팔걸이는 짐승의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가루로 변했다. 짐승의 눈이 화이트를 향했다.
“토 카테콘은 어찌하고 있나?”
“지방의 몇몇 지부의 위치는 알아냈으나, 본부 역할을 하고 있을 서울 지부의 위치는 아직 찾지 못해 전체적인 움직임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드러난 조직들의 움직임에서는 특별한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군.”
“네, 그런 것으로 추정합니다. 암호화된 문서라 하나, 제대로 전달되었다면 토 카테콘이 일부라도 해독했을 겁니다.”
“가짜 미저리가 정보를 빼내 호 카테콘에게 전했으나, 호 카테콘은 아직 본부로 귀환하지 못했다……. 그런 걸까?”
검지와 중지로 오른쪽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던 짐승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저놈들은 쓸모가 없는 거군?”
“네, 하지만 외교상 처치가 곤란합니다.”
“외교는 무슨. 그냥 각국 대사관으로 머리만 보내도록 해.”
“그, 그러면 문제가…….”
지가 곤란한 듯 눈을 굴렸다.
“왜? 내가 질까 봐?”
짐승이 킥킥 웃었다.
“걱정말라고. 놈들은 움직이지 못해. 오히려 자신들의 머리도 잘리는 게 아닐지 두려워할걸? 그게 강자를 바라보는 약자의 비굴함이지. 기억해라. 내가 유일한 지배자이며 놈들은 노예라는 것을.”
***
“멍청한 것들, 어떻게 일을 처리했는데 이 모양이 된 거야?”
각진 얼굴에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남자가 이죽거렸다. 넓은 복도 한쪽에는 남색 복장의 남자가 흥건한 피 웅덩이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고, 그의 주위로는 군복을 입은 수십 명의 육신이 처참하게 흩어져 있었다. 복도 전체가 피로 흥건했지만, 얼굴이 각진 남자의 구두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그는 허공을 뚜벅뚜벅 걸어 남색 옷의 남자에게 다가가 그 앞 허공에 쪼그려 앉았다.
“아프냐?”
남색 옷의 남자가 신음하며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그래?”
각진 얼굴의 남자가 검지를 뻗어 그의 귀를 슬쩍 그었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귀가 얼굴에서 분리되었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게 주인님께서 주신 능력은 어디다 팔아먹고 이 꼴이냐?”
그의 손가락이 쓰러진 남자의 전신에 그림을 그렸다. 자지러진 비명을 지르던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넌 뭐한 거야?”
그가 허공에 노여움을 표했다.
“이봐, 매드(Mad). 알다시피 난 감시자라고. 내 임무는 싸우는 게 아니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말했다.
“잘났다, 트레이싱(Tracing). 놈은 어디로 갔지?”
매드의 물음에 그는 팔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가 뒤늦게 그가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투명인간이 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과거의 습관이 남아있었다.
“건물 밖에 마련된 차량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더군. 아마도 806 기계화 군단으로 가려는 것 같아.”
“고작 구식 전차 몇 대로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1군단장이 북한군 제갈공명이라길래 기대했더니 상황파악이 영 더디군.”
매드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난 마음에 들던데? 버블을 속이고 기습한 것도 그렇고, 기습이라고는 해도 평범한 군인들로 그를 쓰러뜨린 것도 그렇고……. 어쨌든 재밌는 녀석이지.”
매드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목소리는 쾌활했지만, 아마도 비웃는 표정일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구경만 했군? 어디로 갔는지 앞장서.”
트레이싱은 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순한 투명인간은 아니었다. 추적이야말로 그의 진짜 능력이었다.
허공에 붉은빛이 생겨났다. 마치 자동차의 브레이크등 같은 빛이 트레이싱의 어깨로 추정되는 위치에 떠 있었다.
빛이 허공을 빠르게 미끄러졌다. 매드가 그 뒤를 따라 허공을 갈랐다.
“아직 멀었네?”
양복을 입은 통통한 남자가 조급한 표정으로 연신 뒤를 살폈다.
“가만 있으라우!”
황토색 군복차림의 바짝 마른 남자가 호통을 치자 통통한 남자는 급히 사죄하며 앞만 보았다. 하지만 이내 엉덩이가 가려운 듯 자리에서 들썩거렸다.
어두운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지프는 펄떡거리는 활어처럼 요동쳤다. 희미한 전조에 앞조차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지형을 외운 것처럼 운전병은 거침없었다. 비포장도로가 계속되자 뒤따르던 수송트럭들이 점점 뒤처졌다. 차량의 흔들림에 따라 연신 신음을 뱉어내던 통통한 남자가 잠시 안정된 틈을 타 무전기를 들었다.
“1소대는 날래 따라오고, 2소대는 작전을 시행하라우.”
무전기 저편에서 무언가 말이 이어졌지만, 다시 흔들리는 통에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통통한 남자는 무전기를 부수듯 내려놓으며 욕을 내뱉었다. 마침 지프가 돌을 밟고 튀어 오르자 남자는 억 소리를 내며 턱을 잡고 고통스러워했다. 군복남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잠시 흘겨보았으나, 이내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얼굴에는 긴장이 역력했다.
“어라? 여기서 둘로 갈라졌는데?”
두 개의 붉은빛 사이에서 소리가 들렸다.
“어느 쪽인 것 같아?”
매드가 인상을 구겼다.
“나도 모르지. 허, 그놈 참. 차량 대수와 종류, 무게까지 맞췄는데? 어쩐지 모든 차량이 짝수더라니. 역시 마음에 들어.”
“감탄만 하지 말고 방법을 말해.”
트레이싱의 여유에 매드는 짜증이 났다. 만약 놈을 놓치기라도 하면 어찌 될지 몰라서도 그러는 것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방법이야 뭐 두 가지지. 하나는 여기서 갈라지는 것, 다른 하나는 아무 쪽이나 찍어서 쫓아가고, 그쪽이 아니면 다시 다른 쪽을 추적하는 것. 어떻게 할래?”
초등학생도 할 법한 대답에 매드는 살의를 느꼈다. 자신의 위치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는 지금이 죽여버릴 기회였다.
“함께 움직이는 게 낫겠군.”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추적할 줄 모르는 이상 트레이싱과 함께 다녀야 했다. 매드의 다변하는 표정을 보며 트레이싱이 킥킥거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한쪽은 806 기계화 군단 쪽으로, 한쪽은 동해함대 6전대 쪽으로 향한 것 같으니. 먼저 가까운 쪽을 덮쳐보고 없으면 6전대 쪽으로 가보자고. 목적지를 알고 있으니 금방 따라잡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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