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복수의 화신 / 22화
[복수]
이른 새벽, 약수터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체력단련장. 짧은 머리, 펑퍼짐한 몸매의 이정희는 일찍부터 땀을 쏟고 있었다.
“미친 세상! 치사한 놈들!”
아직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욕을 퍼부으며 체력단련장을 돌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했다. 대학 성적도 좋았고, 어학연수도 다녀왔다. 외국어도 남들보다 나은 편이었고,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가 부족했다.
외모.
튼실한 아줌마 체형에 통통한 얼굴은 ‘꽃돼지’라는 별명을 얻었고, 별명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흉하기보다는 귀엽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귀여운(?) 외모 때문에 벌써 수차례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자신보다 스펙이나 능력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밀려서.
21세기임에도 아직도 외모지상주의를 고치지 못하는 남자들을 저주했다.
“인간의 가치를 고작 20년도 써먹지 못할 외모로 따지다니!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능력에 있는 거다! 평생 써먹을 수 있는 능력!”
외모고 능력이고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될 수 없지만, 당장 이정희에게는 분노를 분출할 표현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벌써 한 달째 새벽마다 이곳에 올라와 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래 체질이 그런 것인지 빠지라는 살은 안 빠지고 근육만 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정희가 운동에 광분하고 있을 때, 촌스러운 파란 추리닝을 입은 인상 좋은 아저씨가 목에 수건을 걸고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은 두 번째 사람이 약간 빨리 등장한 편이었다. 다른 날이면 5분이나, 10분 후부터 사람들이 나타나곤 했다.
그녀는 운동을 마무리했다. 사람들이 많아지면 구시렁댈 수도 없고, 운동기구도 부족해지고, 달리는데도 번잡해진다. 여러모로 불편하기에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운동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내려가곤 했다.
모든 운동을 마친 정희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개운함을 누렸다. 곧 좋은 일이 생길 것처럼 상쾌했다. 그때 뭔가 희끗한 것이 눈앞을 가렸다. 그것은 더 내려가 목을 감쌌다. 그리고 조여왔다. 부드러운 타올이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정희는 반항했다.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운동한 힘과 근육을 바탕으로 목을 조르는 수건을 떼어내려고 버텼다. 하지만 건장한 체격은 언제나 방해만 될 뿐, 정작 필요할 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버리고 떠나가는 애인의 등 뒤에 소리치듯, 속으로 안된다고 수없이 외쳤지만, 남자의 완력에 굴복한 의식은 자신을 배신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얼마가 흘렀을까?
깨어보니 손과 발이 묶여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나무로 지은 창고 같아 보였다. 천장에는 반짝이는 금속들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커다란 갈고리였다. 정육점에서나 보던.
문은 저 멀리 있었다. 제대로 일어서기도 힘든 상황에서 기어가려면 땀 꽤나 쏟아야 할 듯싶었다.
‘다이어트는 제대로 하겠네.’
상황에 맞지 않는 농담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직 현실감이 없었다.
햇살이 나무 틈을 뚫고 들어왔다. 창고 안의 먼지 때문에 빛의 궤적을 볼 수 있었다. 나른해 보였다.
옆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까 보았던 후덕한 인상의 아저씨가 옆으로 앉아서 뭔가 하고 있었다. 자신이 깬 것을 아직 모르는지, 이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다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앞에는 통이 놓여있었고, 통 앞에 뭔가를 내려놓고 문지르고 있었다. 간혹 통에서 물을 끼얹으며.
‘미친, 칼이야, 칼…….’
소름이 끼쳤다.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침착해야 한다고 수없이 되뇌었으나, 찻집에서 자신을 차버리고 떠나간 두 번째 남자처럼 목소리가 자꾸 뛰쳐나가려고 했다.
소변이 마려웠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이미 샌 것 같지만,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저 아저씨가 그냥 칼갈이 아저씨라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이 납치까지 했을 리는 없었다.
‘부처님, 하느님, 천지신명님, 귀신님, 햇님, 달님,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살려주세요.’
여자는 정신이 없었다. 손과 발에 슬며시 힘을 줬으나 아프기만 할 뿐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나가기라도 한다면 좋을 텐데, 그는 열심히 칼만 갈고 있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종류도 다양했다.
자신을 죽이는데 왜 저렇게 많은 칼이 필요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알면 후회할 거라는 건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갈고리들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제발, 제발. 마지막 기회라도 주세요. 조상님, 보살님, 알라신님…….’
그녀는 정신없는 중에도 자신이 미처 부르지 못한 신이 없는지 고민했다.
자신의 기도가 통한 것일까? 그렇다면 누가 기도를 들어준 걸까? 기도를 들어준 신이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알 수만 있다면 평생 믿어주기로 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아저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감았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저씨는 정희를 힐끗 보더니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여자는 감히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더니 빗장이 풀리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다시 닫혔다. 여자는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눈을 번쩍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동안 운동한 보람이 있어 쉽게 일으켜졌다. 손목과 발목을 살폈다. 두꺼운 케이블 타이로 묶여있었다. 힘으로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자는 두리번거렸다. 저 앞에 아저씨가 잘 갈아놓은 칼들이 보였다. 꿈지럭거리며 엉덩이를 끌고 앞으로 기어갔다. 회칼을 하나 잡았다.
웃음이 들렸다. 시골 아저씨의 평화로운 웃음이었다.
“재밌네. 어떻게 하나 했더니. 대단한걸?”
아저씨는 문 앞에 서 있었다. 처음부터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것이다.
“잡혀 오면 남자들도 울고불고 난리 칠 줄만 알지 그렇게 침착하진 못하던데. 그런데 말이야. 정말 나간 것인지는 확인했어야지.”
오덕춘은 천천히 걸어와 벌벌 떨리는 여자의 손에서 칼을 뺏었다.
“……절 어떡하실 거에요!”
그가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여자는 두려웠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고 버텼다. 그의 눈이 요기롭게 빛났다.
“정말 대단하네. 장군감이야, 장군감.”
친구들에게서 항상 듣던 칭찬이었다. 믿음직하다, 든든하다, 대단하다, 너만 믿는다. 등등. 친구들에게 듣는 칭찬은 간혹 씁쓸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괜찮았다. 하지만 그의 칭찬은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저 먹이를 앞에 둔 맹수의 자기만족을 위한 헛소리일 뿐이었다.
오덕춘이 말했다.
“정말 알고 싶어? 후회할 텐데……. 눈을 보니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거 맞아. 네가 생각하고 있는 거.”
이정희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악당 따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춰지지 않았다.
“중국에서 너 같은 걸 뭐라 부르는지 알아?”
여자는 날카롭게 쏘아보기만 했다.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기 할 말만 했다.
“돼지야, 돼지. 꿀꿀.”
평생 들어온 놀림을 마지막까지 들어야 한다는 게 억울했다. 다이어트로 얻은 건 괴로움과 죽음밖에 없었다.
“중국놈들은 돼지를 싸게 팔 줄만 알았지, 비싸게 팔 줄은 몰라. 옛날 ‘비단이 장수 왕 서방’ 같은 장사꾼 재주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원.”
그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말했다.
“난 말이야, 재주가 있어. 비싸게 팔. 그래서 나에게 넌, 그냥 돼지가 아니야. 황금 돼지. 꿀꿀. 좋지?”
라이타가 번쩍 불을 발했다. 천장의 갈고리가 요요로이 빛났다.
“이제 가자.”
‘어디로?’
남자의 말에 정희는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천국? 지옥? 집? 하지만 쓸데없는 의문이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통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도마였다.
그 끔찍한 테이블을 보자 하체가 탁 풀려버렸다. 아까부터 마렵던 소변이 시원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여자는 시원한 줄도 몰랐다.
“썅, 더럽게……. 하긴 내가 먹을 것도 아니니까 뭐.”
오덕춘이 물을 한 바가지 퍼서 사타구니에 부었다. 차가운 줄도 몰랐다.
“좀 나은 줄 알았더니, 똑같구만.”
그가 다가왔다.
“인간은 말이야. 이기적인 괴물이야. 살고 싶어서 남을 죽이지. 난 그냥 공급업체 직원일 뿐이야. 혼자 일하면서 사장이라 하기도 우스우니.”
그가 이정희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 세웠다.
“내 주된 고객이 누군지 알아? 놈들은 감추고 싶어하지만, 난 다 알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사회 지도층이야. 소위 말하는 귀족.”
그때 이정희가 입을 벌려 오덕춘의 어깨를 꽉 물었다. 하지만 그는 한번 움찔했을 뿐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여자의 입에 피 맛이 느껴졌다. 남자는 끝내 여자를 끌어다가 도마 위에 눕혔다.
“가진 게 많은 놈들은 이 세상을 떠나기 싫거든. 안락하고 좋은 게 많은데 왜 떠나? 그 많은 재물과 권세를 쌓아놓고 죽는 건 억울하지. 그래서 몸에 좋다는 건 뭐든지 먹어. 돼지까지. 꿀꿀.”
그가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래도 얼굴은 멀쩡할 거야. 항상 뇌만 사던 영감이 죽은 뒤론, 아무도 뇌를 사지 않거든. 그 영감, 뭘로 죽었는지 알아?”
정희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 혼자 킥킥거리며 답했다.
“뇌암. 웃기지? 뇌를 먹어서 뇌암에 걸린 건지, 뇌암에 걸려서 뇌를 먹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골 때리더라고.”
호쾌한 웃음과 함께 그녀의 영혼에 절망이 내리꽂혔다.
몇 시간 후, 폐쇄 SNS에 최신 글이 등록되었다.
-예약 먼저, 입금은 10분 이내.
-품목 : 꽃돼지(암컷)
-연령 : 27개월
-건강상태 : 양호(적당한 지방질)
-도축일 : 오늘
-내장에 기름이 풍부해 별미입니다.
-주의 : 염통은 선약되어 있습니다.
-가격은 통상적인 암퇘지에 준합니다.
***
임주임이 죽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국정원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정부 기관의 습격사건은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다. 덕분에 알렐루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었다.
일주일간 임주임을 추모한 알렐루는 오랜만에 부모님을 뵙기 위해 집에 가기로 했다. 그동안 효진이 많이 회복되었기에, 알렐루는 함께 부모님을 뵙자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갑작스레 남자친구의 집에 가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언젠가는 맞닥뜨릴 통과의례였지만, 되도록 뒤로 미루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를 사랑했지만, 아직 결혼하기에는 어렸다.
잠시 조르던 알렐루가 홀로 떠난 후, 효진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에 몰두했다. 둘의 장밋빛 미래를 노닐던 상상은 점점 현실성을 갖추며 알렐루가 정부의 공격을 받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었다. 새로운 두려움이 밀려든다. 그가 상처 입을까 봐, 그가 떠날까 봐 두렵다.
단지 생활비를 벌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군대가 공격해도 끄떡없다고 자신했다. 그렇다고 그에게 본인을 신고해서 포상금을 타자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사기 또는 자신의 능력으로 부정하게 돈 버는 것이라 여길 게 분명했다. 그래서 몰래 혼자 일을 벌였다. 모르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넘어 공포였지만, 돈이 필요하다는 동기로 공포를 극복했다.
혼자 살려고 하는 게 아니다. 함께 살기 위해서다. 자신만 위한다면, 지금이라도 구재신과 사귀면 된다. 후계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그 정도 위치라면 호화로운 생활은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것은 돈 많은 부자나 신분 높은 귀족이 아니었다.
착하고 정직한 슈퍼 히어로, 하지만 융통성 없고 생활력 없는 한심한 남자였다. 그러니 그보다는 생활력이 조금 나은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고마워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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