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복수의 화신 / 20화
능력을 얻은 이후, 처음으로 목표를 놓쳤다.
***
“쯧쯧, 멍청하기는.”
백색 양복이 혀를 찼다.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검은 양복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놈은?”
“어깨를 다쳤습니다만, 목숨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그에 대한 공포심이 큰 것 같습니다.”
백색 양복은 이마를 찌푸렸다. 눈치를 살피던 검은 양복이 말했다.
“폐기할까요?”
“됐어. 그녀와 함께 있는 놈이 호 카테콘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도 공이라면 공이지. 뭐 호 카테콘을 상대로 살아 돌아온 것도 능력이고. 일단 하던 일에나 집중하라고 해. 겁먹었다면 그럴 리도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놈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하고. 나중에 미끼로는 써먹을 수 있겠군.”
검은 양복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나저나 호 카테콘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그들은 아직 그와 접촉할 상황이 아닙니다. 그때까지는 알 수 없을 겁니다.”
검은 양복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시간이 없으니 조금 빨리 움직이도록 하지. 그리고 위대한 순교자의 형님께 무슨 도움이라도 드려야 하지 않겠나?”
“우효진의 정보를 줄까요?”
“호 카테콘이 누군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으니 그거라도 줘야지. 동생의 헌신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말이야.”
검은 양복은 깊이 숙여 인사한 후, 뒤돌아 나갔다.
“잠깐.”
백색 양복이 불러 세웠다.
“그, 화이트 페이스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해커는 어떻게 되었지?”
“실력이 좋아 추적에 애를 먹었습니다만, 아지트로 예상되는 곳을 열다섯 군데로 줄였습니다. 조만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국내는 몇 곳이야?”
“네 곳입니다.”
“그럼 그 넷 중 하나겠네. 애들 되는 대로 풀어봐.”
“알겠습니다.”
***
오랜만에 등장한 그로 인해 양천경찰서는 시끄러웠다.
“이봐요, 이 형사. 당신 정신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유일한 증거를 그따위로 관리하면 어떻게 해!”
김두환 검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씨, 무슨 말이세요. 제가 지난번 보고할 때 증거까지 모두 줬잖아요.”
이 형사가 눈을 부라렸다.
“장난합니까? 지난번 보고서에는 검사결과서만 첨부되어 있었어요. 피해자의 사고현장 주변에서 나온 혈흔과 오덕춘의 혈액이 일치한다는.”
“그게 있으면 됐죠, 뭘 가지고 그러시는 겁니까? 네?”
이 형사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작 혈액샘플은 없었습니다. 현장에서 찍은 혈흔의 사진도, 현장에서 채취했다는 혈액샘플도! 조작인지 아닌지도 모를 이따위 보고서 한 장으로 재판이 될 것 같아요?”
“아이, 씨. 그러니까 내가 그때 다 드렸다니까요?”
“말이 됩니까? 중요 증거를 왜 제게 줍니까? 증거보관실에 넣어야지! 당신, 증거 조작하고 나에게 떠넘기는 거 아냐?”
“제발 좀요. 왜 이러십니까? 그때 김! 검사! 님께서 제게 증거와 검사결과서, 사건 보고서 모두 제출하라고 말! 하셨잖아요. 그래서 제가! 검사님께 갖다 드렸고요.”
“말도 안 됩니다. 전 기억도 없고, 검사 결과서 외에 증거는 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규정상 증거 보관실에 보관해야 할 증거를 내게 가져오라고 했을 리도 없습니다. 이번 건은 당신이 책임져야 할 겁니다.”
“아놔, 진짜. 아!”
이 형사는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했다. 그런 그를 향해 마지막 카운터가 날아들었다.
“증거가 없으므로 오덕춘은 풀려날 겁니다.”
“뭐라고요?”
이 형사가 사고 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오 반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이 형사나 박 형사는 입만 크게 벌리고 말도 못 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증거도 없이 어떻게 잡아둡니까? 재판은커녕 불법 구금으로 우리가 달려 들어가게 생겼습니다.”
“아! 씨! 썅!”
이 형사가 책상을 두드리며 성질 냈다.
“일단 풀어주고, 증거는 다시 수집하세요. 증거 없이는 절대 기소 못 합니다.”
김두환 검사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박 형사가 말했다.
“우와! 저 쌍놈이 증거를 없애고 우리한테 이 지랄 하는 거 아니에요?”
박 형사는 정말 화가 났는지 이 형사가 해야 할 말을 대신했다.
“증거가 없잖냐, 증거가. 어찌됐든 규정을 어긴 것도 이 형사고.”
오 반장의 말에 이 형사의 광분만 심해졌다.
***
집으로 돌아온 알렐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김성환과 같은 느낌, 그 의미를 생각했다.
‘김성환의 단독 범행이 아니었어?’
어쩌면 김성환은 비밀조직의 행동대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소름이 돋았다. 그처럼 미친 인간이 수두룩한 조직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자신에게 수치심을 주면서까지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너덜너덜한 복장으로 돌아와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골몰하는 그를 보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냐. 그냥 테러범이었나 봐.”
혹시라도 김성환과 관련이 있다면 효진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잡았어요?”
오붓한 시간을 방해했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렀길 바랐다.
“……놓쳤어.”
효진의 눈이 불안하게 커졌다.
“녀석이 사람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바람에 그걸 막느라 놓친 거야. 괜히 걱정하지 마.”
그제야 효진의 얼굴이 풀렸으나, 약간의 의문은 남았다. 효진은 다시 질문을 떠올렸다. 그때 알렐루가 벌떡 일어서더니 누더기가 된 상의를 펄럭이며 방으로 향했다.
“옷 갈아입고 나올게.”
방에 들어간 알렐루는 잠시 서랍을 뒤적였다. 오랫동안 꺼둔 휴대폰을 켰다. 다행히 아직 배터리가 남아있었다.
윈도우즈 로고가 지나가고 부팅이 완료되자 그동안 밀린 문자가 홍수처럼 몰려왔다. 알렐루는 재빨리 매너모드로 바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한참 후, 문자 수신이 완료되자 그제야 숫자 1을 꾹 눌렀다. 잠시 후 신호음이 울렸다. 하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혹시 살인마가 모인 사교집단이라도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려던 알렐루는 ‘정작 필요할 때는 연락도 되지 않는다’며 투덜거렸다. 오랫동안 연락을 끊어버린 자신의 탓이 크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기에, 잠시 후 다시 걸어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침대 위에 전화를 던져놓고 옷을 갈아입은 알렐루는 잠시 전화기 옆에 걸터앉았다. 문밖에서 효진은 자신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질문을 피해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기만 하여 도무지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뒤늦게 도착한 문자에 전화기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밖에 나가기 싫었던 알렐루는 전화기를 들어 문자들을 확인했다. 밀린 문자만 100개가 넘었다. 방금 도착한 문자부터 확인한 알렐루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이젠 이 폰도 폐기해야 할 때입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당신 덕분에 잠시나마 ‘나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틀 전에 보낸 문자였다. 그는 빠르게 문자를 뒤로 넘기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중간중간 다른 범죄자들에 관한 정보와 개인적인 신세 한탄, 다시 연락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부탁 등이 섞여 있어 필요한 정보만 얻어내는 게 쉽진 않았다.
- 제가 당신의 개인 휴대폰으로 직접 연락하지 않는 이유는,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화해서 도와달라면 당신은 반드시 달려오겠지요. 그게 바로 화이트 페이스니까요.
하지만 전 큰 실수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당신은 제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전 당신에게 도움만 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 문자를 본다면, 여전히 저는 당신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겠지요.
하지만 못 보거나 너무 늦게 본다면? 당신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당신을 귀찮게 하지도 않을 겁니다. 이건 전적인 제 의지에요. 결코, 당신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늦게 보더라도 자책하지 마세요. 전 제 운명을 받아들일 겁니다. 당당하게. 그게 임주임입니다. (죽음 앞에서 벌벌 떨던 예전의 임주임은 잊어주세요.^^)
- 부탁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제 더는 피할 수 없습니다. 이 문자를 보시면 도와주세요. 하지만 못 보시더라도 괜찮습니다.
- 제가 가진 자료는 모두 폐기했습니다. 절대로 복원할 수 없게 조치했으니 걱정마세요. 사실은 많이 울었습니다. 고작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것들이 제 인생의 전부였으니까요.
솔직히 일부는 동영상이나 음악파일에 숨겨두고 싶기도 했지만, 만의 하나라는 가능성도 남길 수 없더군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화이트 페이스의 비밀은 꼭 지킬 겁니다. 당신은 내 영웅이며,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 지금부터 24시간 후, 서버의 모든 자료를 폐기할 예정입니다.(백업 포함) 그동안 보내드린 이메일도 모두 사라질 겁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지금 다운받아 놓으세요. 삭제되면 복원할 수 없습니다.
- 해외탈출 실패했습니다. 놈들이 제 탈출로를 봉쇄했습니다. 국정원에 정체불명 조직까지……. 세계 최고의 천재라 그런지 어려움도 남다르군요.
- 내일 동남아로 뜰 겁니다. 자리 잡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조만간 제 위치가 드러날 것 같습니다. 며칠 내로 해외로 떠야 할 것 같습니다. 걱정 마세요. 탈출로는 이미 오래전에 확보해 두었으니까요.
- 국정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실력도 비교 불가고요. 미국이나 중국도 아닙니다. 도대체 누가?
- 녀석들, 제법이네요. 벌써 제 트릭을 반이나 해체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세계 최고의 해커 임주임이 이렇게 당하고 있을 리는 없죠. 큰 거 한 방 준비하고 있습니다.
-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니 국정원인가 봅니다. 저 말고 다른 솜씨 좋은 해커들을 영입했나 보네요. 물론 제 실력에는 미치지 못합니다만. ㅎㅎㅎ
- 얼마 전부터, 누군가 절 찾고 싶어 합니다. 국정원은 완전히 떨쳐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을까요? 아니면 다른 친구들?
- 전 세계적으로 활동했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활동이 우리나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일루미나이트가 한국지부라도 세우려는 걸까요?
- 아마도 사교(邪敎)집단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조직으로 보이는데, 허접한 사교집단이라니……, 상상력이 빈약하네요.
-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지 도무지 정보를 빼낼 수가 없네요. 이렇게 철저한 녀석들은 처음이라 승부욕을 자극하네요.
- 이상한 조직을 발견했습니다. 이게 당신의 흥미를 끌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더 조사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미 늦었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가봐야 했다. 알렐루는 문을 열었다. 언제 나올지 기다리고 있던 듯 효진의 시선이 알렐루의 얼굴에 꽂혔다.
“미안해. 급히 가야 할 곳이 생겼어.”
“어디요?”
혹시 자신을 피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하듯 효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임주임 씨가 위험하대. 금방 다녀올 테니 문 잠그고 있어.”
알렐루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즉시 밖으로 달려나갔다. 서운한 듯 잠시 얼굴을 찡그렸던 효진은 얼굴을 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휴대폰을 켰다.
***
김두환 검사는 발신자 불명의 문자를 하나 받았다. 문자에는 하나의 주소와 이름, 그리고 사진이 담겨있었다. 사진의 얼굴은 연예인처럼 아름다운 젊은 여자였다.
김 검사는 서류를 뒤적여 사진이 프린트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조악한 CCTV 영상이었지만, 얼굴이 정확하게 찍혀 있었다.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직접 본다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는 휴대폰의 사진과 프린트된 사진을 비교했다.
‘상도동, 우효진이라…….’
얼굴로 보아 동일인이 분명했다. 전화가 걸려온 곳도 상도동이었다. 사진 하나로 신원을 조회하려니 막막한 면이 있었는데, 누군가 먼저 신원을 파악하여 알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자의 신원을 쉽게 알아냈다는 것에 기뻐할 수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의 설계대로 끌려가는 것 같아 불쾌했다.
***
울산에 도착한 알렐루는 기억을 더듬어 임주임의 아지트를 찾았다. 이틀이나 지난 데다 아직 그곳에 있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일단 직접 확인해야 했다.
‘도와달라 했으니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텼을 거야.’
아니면 자신이 그를 찾을 수 있는 힌트라도 남겼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달렸지만, 막상 도착한 현장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거실은 가재도구와 빈 캔, 과자 봉지 같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고, 소파도 거의 해체되다시피 뼈대를 드러냈다. 작업실로 쓰인 큰 방을 열자 컴퓨터 몇 대가 빈 깡통처럼 신경질적으로 뒹굴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의자는 가죽이 벗겨진 채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침실로 쓰인 작은 방도 마찬가지였다. 헤집어진 세간살이가 방문자들의 짜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불청객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알렐루는 범죄 더듬이에 집중했다. 크고 작은 신호가 항상 잡히다 보니 이젠 의식하지 않으면 흘려보낼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감지 범위 내에서는 살인, 강도 수준의 범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도망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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