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토리얼
***
모래시계를 연상 시키는 네오-미디블1000의 대륙은 중앙의 병목구간을 기점으로 주인이 나뉜다.
남쪽을 지배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북쪽의 지배자는 신비다.
몬스터, 마법, 저주, 멸망한 고대 문명의 유적과 유물 등 온갖 신비로운 것들이 대륙 북쪽에 펼쳐져 있다.
인간은 그 신비의 대지를 마경(魔境)이라 불렀다.
그 신비를 연구하기 위해 모인 마법사와 그들에게 고용된 탐험가, 돈 냄새를 맡은 상인들에 의해 세워진 도시가 바로 자유도시 마경관이다.
네오-미디블1000의 주인공은 도시 소속 마경수비군이 운용하는 형벌부대의 신참 소년이었다.
아비의 노름빚에 팔려 온 소년은 빚을 탕감하기 위해 첫 번째 임무에 나선다.
부대원과 함께 마경 1구역에 진입해 몬스터를 토벌하는 임무였다.
얼핏 순조롭게 보이던 임무에 문제가 생긴 것은 몇 시간쯤 마경 안쪽으로 나아갔을 때였다.
“커헉!”
“기습이다!”
“야, 약탈자다!”
부대가 약탈자에게 공격당했다.
몬스터 대신 인간을 사냥하는 놈들답게 약탈자의 기습은 은밀하고 치명적이었다.
제대로 된 훈련 없이 실전에 투입된 범죄자 출신의 부대원들은 별다른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적의 기습에 놀라 당황하던 그는 보급받은 칼을 뽑기도 전에 적에게 가슴을 걷어차여 날아갔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빈민가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소년은 강한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뻐근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이를 악물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피 묻은 칼을 든 약탈자가 소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네오-미디블1000의 첫 번째 이벤트 신(event scene)이다.
영상이 끝난 뒤 주인공 캐릭터를 조종해 달려드는 약탈자를 처치하는 것이 게임의 튜토리얼.
‘이게 뭐야?’
내가 소년의 몸에서 정신을 차린 것은 바로 그 튜토리얼이 시작된 시점이었다.
놀랍게도 나는 소년의 몸에 빙의해 있음을, 내가 게임 속 캐릭터가 되었음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질적이어야 할 소년의 육체는 날 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움직였다. 피 튀는 전장도 당황스럽긴 하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게임 속 캐릭터가 되었다는 것도, 그 사실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도.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모니터의 그 괴상한 빛 때문인가? 아니, 이게 진짜 현실이긴 해?
고민할 시간은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튜토리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 여기 하나 남았네?”
주저앉은 내 앞으로 가죽 갑옷을 입은 남자가 롱소드를 쥔 채 걸어오고 있었다.
빠진 앞니와 건들거리는 자세가 모니터 너머로 보던 튜토리얼 상대와 똑같았다.
문제는 놈과 달리 내가 머릿속까지 게임 속 캐릭터는 아니라는 점이다.
30년 가까이 현대인으로 살아온 나는 달려드는 적을 향해 칼을 뽑아 맞서는 선택지를 쉽게 고르지 못했다.
결심이 느리니 행동이 굼떴다.
게임에서와 달리 적은 내가 전투태세를 갖출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잘 가라. 흐흐.”
내가 채 일어나기도 전에 약탈자의 칼날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늦었다.
이제와 몸을 날려도 어디 한 군데 떨어져 나갈 게 분명하다.
칼을 들고 맞서기도 어렵다. 상대가 훨씬 빨랐고 위치도 유리했다.
그랬기에, 내가 허리춤의 칼자루를 뽑아 휘두른 것은 반쯤은 자포자기의 심정이었고 나머지는 그저 발악이었다.
그런데······.
서걱.
반짝이는 금속 조각이 허공을 빙글빙글 돌다 바닥에 떨어졌다.
약탈자 놈이 헛숨을 토하며 물러섰다.
놈의 손에는 칼날이 매끈하게 잘린 롱소드가 들려 있었다.
***
나는 검술을 배운 적이 없다.
검도는커녕 남들 다 다니는 태권도 도장도 다니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손에 든 칼이 상대의 것보다 날카로운 것도 아니다.
형벌부대 보급품 칼은 낡고 이마저 드문드문 빠져 있었다. 애초에 게임 초반에 지급되는 기본 장비라 품질이 좋을 리 없다.
그런 칼로 상대의 검을 잘랐다.
피륙도 아니고 금속을 매끈하게 베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미친! 뭐야?”
약탈자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내가 전혀 놀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편안해.’
놀라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근래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마음이 차분했다.
지난 몇 년간 나를 좀먹던 죄책감과 불안감은 씻은 듯 사라지고, 나 자신과 주변 환경 모두 완벽히 안정적인 상태로 인식된다.
‘검을 쥐어서······ 인가?’
원인은 하나였다.
검. 내가 검을 들고 있다는 사실이 안정의 이유였다.
감각, 근육, 뼈 등 신체적인 부분은 물론 정신까지 완벽하게 나라는 자아에 제어되고 있다는 안정감.
그것이 검을 쥔 손으로부터 전해져 왔다.
“이, 이 새끼, 무슨 사기를 친 건지 모르겠지만, 죽여주마!”
그래서 약탈자가 잘린 칼을 버리고 손도끼와 방패를 앞세워 달려들었을 때도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놈이 치켜든 도끼의 속도, 그것을 든 손과 그 아래 위치한 팔과 어깨 근육, 지면을 박차는 놈의 발바닥과 몸의 움직임.
주변을 지나치는 산들바람과 거기 실린 혈향, 잘린 육신이 토해놓은 오물 냄새까지.
근처 모든 것이 내 통제하에 있다는 지배감을 느끼며 나는 한 걸음 내디뎠다.
갑자기 줄어든 간격 탓에 적의 도끼가 타점을 잃었다.
적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당황은 이내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몸을 가린 방패 덕분이었다.
둥글게 깎은 나무 주변에 두꺼운 금속 테두리를 두르고 가운데에 징을 박은 방패는 일견하기에도 견고해 보였다.
이 빠진 아밍소드로 부딪히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다름없었다. 아마 일반적으로는 그랬을 터였다.
나는 개의치 않고 검을 그었다.
검술을 조금이라도 익힌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괜찮았다.
이상하게도 내 칼이 막히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해가 뜨면 지는 것처럼.
칼이 방패를, 그 너머 있는 적의 몸까지 베어 주리라는 믿음이 내게는 있었다.
칼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슥.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얕은 절삭음과 함께 방패가 사선으로 반듯하게 잘렸다.
그 뒤에 숨은 적의 윗도리가 방패와 꼭 같은 모양으로 베여 나풀거린다.
“마, 말도 안 되는······.”
단말마의 비명 대신 불신 가득한 유언을 남긴 채, 약탈자가 벌어진 가슴팍으로 속에 든 것을 게워 낸다.
허투루 날아간 도끼가 바닥에 떨어진 뒤에야 숨이 끊어진 약탈자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칼슨이 당했잖아?”
“저 새끼 건들거릴 때 알아봤다니까. 킬킬.”
“뭘 시시덕거려? 몬스터 꼬일라, 어서 처리하고 튀자고.”
남은 약탈자들이 여상한 목소리로 떠들며 다가왔다. 저들에게 죽음은 일상이었다.
“주, 죽어라!”
“그만! 다가오지 마! 커헉!”
“씨발, 어디서 이딴 괴물이······.”
그래서 나머지 모두에게도 공평하게 일상을 선물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게임 속 세상에서 눈뜬 지 5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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