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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시우(時雨)
작품등록일 :
2014.12.26 22:17
최근연재일 :
2014.12.28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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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2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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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4권] 4_2

DUMMY

지우는 무릎을 꿇고 멍하니 애니를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행동은 호흡이 섞여 독이 넘어갈까 걱정한 것일 터였다. 애니의 마지막 말도 리레이쉰을 대적하면 살아남지 못할 테니 복수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렸다.

지우는 난생처음으로 이성으로부터 판단의 권리를 박탈했다. 애니의 말이 범인은 리레이쉰이 아니라는 뜻이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도 않은 것이다. 애니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미인계를 완수하려 했을 가능성은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 오직 마지막 순간까지 애니의 진정을 믿지 않았던 자기 자신, 그래서 구할 수도 있었던 애니를 잃었다는 사실, 그녀를 죽인 건 다름 아닌 지우 자신이라는 사실에 분노를 가눌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했고, 그에게서 여자를 두 번이나 빼앗아간 리레이쉰보다 적합한 대상은 있을 수 없었다.

지우는 바닥에 겉옷을 깔고 그 위에 애니를 바르게 눕혔다. 남자 화장실에 두고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욱 화가 났다. 작별 키스도 하지 않았다. 애니의 걱정대로 독이 퍼지면 복수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애니의 핸드백에서 총을 꺼내 양손에 들고 화장실을 나섰다. 이제 그는 무사가 아니었다. 복수의 화신에게는 총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했다.

화장실 입구에는 어느새 경찰이 진을 치고 있었다. 리레이쉰이 뉴욕 뒷골목을 누비던 시절부터 함께 하던 심복은 경찰이 들것에 실어 옮기고 있었다. 지우는 왼손에 든 애니의 총으로 그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넣었다. 전화기가 그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총을 겨누고 있던 경찰은 방아쇠를 당기지도 못하고 놀라 몸을 숙였다. 지우가 입을 열었다.

“경찰용 38구경 리볼버. 처음 두 발은 공포탄이지. 세 발을 쏠 때까지 내 총에 맞지 않을 수 있을까? 부모 형제와 처자식을 생각해.”

지우가 한 걸음 옮기자 경찰들은 바닥을 기다시피 좌우로 흩어졌다. 지우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덧붙였다.

“공포탄을 소모하지 않고 실린더를 돌려서 실탄을 장전하는 방법도 있어. 나중에 문책을 당하겠지만, 눈앞에서 살인범을 놓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아니, 아닌가? 복지부동 공무원 나리들께는 다른 논리가 적용되나? 네놈들이 그 모양이니까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거다. 쓰레기들.”

괜한 화풀이만은 아니었다. 상대를 자극해 도주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려는 심리전이었다. 과연 지우의 도발에 말려든 혈기 넘치는 경관 하나가 실린더를 빼서 돌렸다. 지우는 실린더가 빠지는 소리를 듣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팔을 뒤로 뻗어 방아쇠를 당겼다. 동시에 경관의 손에서 총이 박살 나며 날아가 버렸다.

“하란다고 또 한다. 병신들.”

지우는 그렇게 말하며 비상계단으로 나가 문을 닫고 구두를 벗어들고는 위층으로 달렸다. 5층에 들어선 지우가 존에게서 빼앗은 전화기를 꺼냈다. 그는 아직 수신목록에 기록된 통화 상대가 한스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통화연결음이 한 번 채 울리기도 전에 제우스가 전화를 받았다.

“뭐 하다가 이제 전화해? 어떻게 됐어?”

지우는 대답 대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스 목소리가 아니었고, 상대는 아직 존이 죽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지만, 이 정도로 정보를 더 캐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상대는 아마도 애니가 말한 ‘새 보스’일 테고, 한스를 밀어낼 정도의 인물이라면 결코 만만한 자는 아닐 터였다.

지우의 한숨은 순수한 한숨 그 자체였다. 애니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얻게 된 것이다. 애니는 지우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한스는 그래서라도 미인계를 반대했을 것이고, 지금 이 보스라는 자가 애니를 미끼로 지우를 제거하려 한 장본인이며, 미끼의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지우가 대답하지 않자 제우스도 낌새가 이상했는지 말을 아꼈다. 지우는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존은 죽었어.”

제우스가 코웃음 쳤다.

“서지우냐? 네가 죽였다는 얘기군.”

“아니면 내가 어떻게 이 전화를 갖고 있겠냐?”

“그래서? 애니는?”

“지금 구하러 갈 거야. 한스 바꿔.”

“나한테 얘기해. 내가 책임자야.”

“그건 니들 사정이고. 한스 바꿔. 작전은 한스하고만 이야기한다.”

제우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 한스와 지우가 통화하게 되면 자기의 치부가 드러날 염려가 있었다. 그러나 지우는 한스와 작전을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통화만 허락하면 그를 원하는 곳으로 유인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제우스가 결단을 내렸다. 시간을 끌면 언젠가는 드러날 일이었고, 기회가 있을 때 지우를 제거하는 게 최선이었다.

“기다려. 불러올 테니까.”

지우는 새 보스라는 자가 한스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눈을 빛냈다. 잠시 후 한스가 전화를 받았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존은 왜 죽여!”

“존이 애니를 죽였으니까.”

흥분해 소리지르는 한스를 지우가 한 번에 잠재워 버렸다.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한스에게 지우가 결정타를 날렸다.

“존이 레이의 첩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 레이가 반대파와 캄보디아 놈들을 숙청하는 김에 NSA에도 선물을 하나 주려고 애니를 데려오게 한 거야.”

“너……. 너 이 새끼……. 그걸 알고도…….”

“사람 무시하지 마. 내가 한 놈한테 여자를 둘이나 바칠 것 같냐? 말해두는데, 지금부터 이 백화점에 있는 놈들은 삼합회, 캄보디아, 야쿠자, 그리고 NSA를 막론하고 눈에 띄는 족족 다 죽인다. 일단 옥상에 갈 거야. 거기 있는 놈들부터 치워.”

지우는 그렇게 자기 할 말만 다 하고 전원을 꺼 버렸다.

전화가 끊어지자 한스는 깁스한 손으로 제우스의 턱을 돌려 버리고는 깔고 앉아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화들짝 놀란 요원들이 달려들어 그를 간신히 뜯어말렸다. 제우스는 피투성이가 되어 겨우 몸을 일으키면서도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미친놈……. 네가 네 무덤을 파는구나.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하극상이라고? 다들 뭐 하는 거야? 저 새끼 빨리 격리수용해!”

한스가 숨을 헐떡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존이 리레이쉰의 첩자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그냥 내버려둔 건 그놈이 사실은 네놈 심복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무덤은 네가 판 거다. 다들 잘 들어! 지금부터 나는 내 방에 격리수용된다. 내 발로 들어갈 거야. 그리고 재판 때는 저 새끼가 우리 애니를 고의로 희생시키면서까지 무리한 작전을 추진했다는 걸 알릴 거야. 무슨 얘긴지 알겠지? 내가 재판 전에 죽으면 범인은 위대하신 제우스 킴 요원이라는 뜻이다. 그렇게들 알아.”

한스는 말을 마치고 휙 돌아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제우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엉망으로 깨진 얼굴은 사색이 되어도 쉽게 눈치채이지 않았다.

제우스는 부상이 심해 더 서 있지 못하겠다는 듯, 비틀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코뼈가 부러지고 이빨도 두 개쯤 깨진 것 같았다. 그러나 진짜 치명상은 얼굴이 아니라 경력에 입게 생긴 셈이었다. 애니 살인죄는 성립되지 않겠지만,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한스가 저렇게 나온 이상 그를 제거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우선 작전을 성공시키고 볼 일이었다.

‘피에르가 고용한 놈들이 죽어나가고 있다지? 리레이쉰이 보낸 자객일 거야. 피에르도, 서지우도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눈치야. 두르가라는 얘기지. 리레이쉰은 서지우가 애니 때문에 눈이 돌아갔다는 걸 아직 몰라. 두르가는 그 자식을 보호하려 할 거야. 무엇보다도 윤태영이 있으니까.’

제우스는 피에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굴이 온통 부어올라 한 단어 발음할 때마다 비명이 섞일 정도였지만 상황을 전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서지우가 옥상으로 간다. NSA는 철수시킬 거야. 서지우를 쳐. 단, 절대로 죽여선 안 돼. 리레이쉰의 부하 하나가 서지우를 구하러 갈 거야. 그놈, 아니 그년을 죽여. 그년을 죽이기 전까지는 절대 서지우를 죽이면 안 돼.”

제우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방을 나서 옥상의 NSA를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요원들의 눈빛엔 증오와 경멸이 가득했으나 명령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제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제길. 하나같이 한스와 애니를 위해 증언할 놈들뿐이군. 오늘 두르가를 끝장내지 못하면 나도 끝나 버리겠어.’

카드가 한 장 있기는 했다. 두르가의 정체를 알아낸 것만 해도 큰 공로일 테니까. 하지만, 정보를 감추어 요원을 잃고 위기를 자초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내부의 첩자를 걱정해 은밀히 추진했다는 변명이 통하려면 역시 두르가의 시체가 필요했다.

‘피에르로는 역부족일 거야. 하지만, 서지우라면 얘기가 다르지. 뭔지는 몰라도 두르가와 비슷한 힘이 있고, 또 상대는 서지우를 제거하기는커녕 보호하려 할 테니까. 서지우라면 두르가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몰라.’

지우를 죽이려고 시작한 일에서 그가 유일한 희망일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였지만, 이쪽 일은 원래가 아이러니로 점철되어 있다. 아군도 적군도 없는 복마전 속에서 그때그때 최상의 흐름으로 갈아타는 것이 이 세계에서 말하는 능력이다. 제우스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부족해 보였다.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생애 최고액의 판돈이 걸린 도박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또 하나의 카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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