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2_5
“정수진 알죠?”
“그 신입생? 걔가 왜?”
“같은 학교니까 경호를 오빠한테 맡기고 싶대요.”
“뭐? 걔가 뭔데?”
“홍콩 삼합회 간부 촹치롱(鄭奇隆)의 사생아. 한국인 현지처가 낳은 딸이에요. 산모가 출산 중에 사망해서 불쌍하다고 한국에서 아주 금이야 옥이야 키운 거죠. 덕분에 싸가지가 아주 그냥…… 아, 촹치롱 장인이 삼합회 장로거든요. 그래서 본처 무서워서 홍콩으로 데려가지도 못한대요.”
지우가 얼굴을 감싸며 생각에 잠겼다.
‘쟤 말하는 걸로 봐서는 수진이랑 둘이 서로 잘 아는 사이야. 쟤가 도쿄대에서 편입을 한 거나, 수진이가 우리 학교에 들어온 게 모두 우연일 리가 없어. 그런데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현재로서는 공통분모가 나밖에 없잖아? 나한테 그만한 가치가 있나?’
서연은 재일교포 3세라고 했다. 그리고 이쪽 또한 최소한 정부 기관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삼합회도 아니고, 마피아도 아니다. 그렇다면 야쿠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삼합회와 야쿠자가 한국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일의 중심에 지금 지우가 있었다.
신입생 환영회 날 수진이 했던 고백도 서연이 처음에 했던 행동과 일맥상통한다. 수진도 자기가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게 틀림 없었다. 그 충격으로 한동안 접근하지 못했는데 그 틈에 서연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얼추 퍼즐이 맞춰졌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 대단한 삼합회 간부의 사생아가 아무것도 아닌 지우에게 접근을 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야쿠자와 삼합회가 벌이는 서지우 쟁탈전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퍼즐은 완성되지 않는다.
‘현재 나의 소유권은 야쿠자에게 있다고 봐야 해. 소말리아에서 빼온 게 이쪽이니까. 그래서 수진이가 미인계를 쓴 거야. 서연이는 수진이가 실패하는 걸 보고 더 약 오르라고 원래 계획에도 없었던 연인이라는 설정을 포함시킨 거겠지.’
문득, 수진이 듣고 있는데 복도에서 친구들과 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우가 서연의 돈을 보고 사귀는 거라고 오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렇게 억울할 것도 없는 오해이지만 수진으로서는 서연이 반칙을 했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삼합회의 요청은 오늘 있었던 일하고는 상관 없는 거 아냐? 그냥 자기들끼리 파워게임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자 모든 일이 하찮게만 여겨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우는 그저 두 여자 아이의 자존심 싸움에 휘둘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오늘 확인한 바, 지우가 리레이쉰을 보호한다는 것은 아빠를 지켜주겠다고 나서는 다섯 살짜리 꼬마 아이만큼이나 귀여운 이야기였다.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이상 더 깊이 생각할 것도 없고, 쓸데 없이 애를 태울 필요도 없었다. 지우는 서연이 늘어놓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TV 리모컨을 찾았다. 차라리 TV나 보는 게 낫겠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갑자기 TV를 켜는 지우를 보고 서연이 눈을 흘겼다. 그러나 불만을 터뜨리지는 못했다. 오늘 방송국에서 있었던 투신자살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던 것이다. 선정적인 보도로 유명한 방송사의 뉴스여서 사망자 사진과 인적 사항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었다.
서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 나 저 사람 알아요.”
지우는 이제 무슨 일이든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서연이 말을 이었다.
“큰오빠가 한때 한국군 최고의 스나이퍼였다면서 오빠 대신 데려다 쓰라고 권했던 사람이에요.”
그쯤 되자 지우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많은 정보가 담겨있는 한 마디였다.
‘큰오빠에게 그 정도 인사권이 있다고? 이 녀석도 수진이랑 비슷한 상황인가 보군. 집안의 천덕꾸러기 같은 거. 뭐, 그건 차차 확인할 일이고……’
지금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지우가 짐짓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한국군 최고라고? 그 기준이 뭔데?”
서연은 지우가 같은 저격수로서 호승지심(好勝之心)이 발동한 줄 알고 속으로 가만히 웃었다. 여자가 남자를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은 남자의 바로 이런 면 때문이다. 서연은 지우가 자기 직업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서연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죽은 저격수의 실력을 자기 일처럼 자랑하기 시작했다.
“UDT 최고의 저격수였던 사람이래요. 실전 경험도 풍부한 진짜 프로라고요. 한 마디로 말해줄까요? 오빠보다 훨씬 비싸게 주고 사온 사람이에요.”
그 말을 들은 지우의 반응은 서연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는 것이었다.
지우는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깍지를 끼고 뒤통수를 받쳤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천장의 어느 한 점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지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약이야?”
“네?”
“그런 프로가 표적을 마주보고 네 발이나 쐈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뜻이야. 아니, 그 실력으로 첫 발이 그렇게 빗나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본인도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난사를 한 거겠지. 실수와 미친 짓, 둘 다 마약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어.”
서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마약 해봤어요?”
“처음 저격 임무 받았을 때 몇 번. 흔한 일이야. 두려움이 없어지고 집중력이 좋아지거든. 마약의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그래요. 그런 프로가 마약을 했다면 바로 그런 목적이었겠죠. 심신미약 상태로 임무에 나서진 않아요.”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그 정도 프로라면 총알이 표적을 꿰뚫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어. 그런데, 귀에 들리는 소리와 눈에 보이는 장면이 서로 맞지 않다면?’
지우는 아까 자기라도 한두 발쯤 더 쏴보고 싶을 거라고, 미지의 저격수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이해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꼈던 것이다.
지우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 발코니로 걸어갔다. 찬바람에 머리를 좀 식혀야 할 것 같았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지만 다행히 유혹에 넘어갈 만큼 담배 가게가 가깝지는 않았다.
발코니에서는 호수 위의 놀이공원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휴관일이어서 불빛은 하나도 없었다. 자유낙하의 짜릿함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놀이기구가 멀리 을씨년스럽게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순간 지우의 머리털 한 올 한 올이 곤두섰다. 하루의 피로와 니코틴 금단증상으로 오감이 정상이 아니었지만, 서연이 초감각적 지각이라고 불렀던 여섯 번째 감각이 지우의 시선을 놀이기구 꼭대기로 이끈 것이다.
지우는 급히 팔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다음 순간, 팔뚝을 스친 총알이 등 뒤의 발코니 유리를 박살냈다.
거리는 약 3백 미터. 총알이 날아오는 데는 0.3초가 채 걸리지 않겠지만 총알을 재장전 하는 시간이면 몸을 피하기에 충분하다.
“무슨 일이에요?”
“입 다물고 엎드려!”
지우는 방 안의 전등을 모조리 끄고 TV도 꺼버리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 듯, 서연을 데리고 소파 뒤에 숨어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야간에 저격을 하겠다고 나선 상대이므로 적외선 스코프를 구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오빠……”
“도청 가능성도 있어. 입 다물어.”
서연이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그 귀에 지우가 속삭였다.
“챙겨가야 되는 물건 있어?”
서연이 가만히 고개를 젓자 지우는 반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각도에서 총알이 또 날아올 확률은 매우 낮았다. 저격수는 벌써 이동을 시작했을 것이다. 전장에서도 위치가 드러난 저격수는 즉시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 전장이 아니더라도, 범죄 현장에 오래 머물고 싶어하는 범죄자는 없다.
그러나 신중해서 나쁠 건 없었다. 잠시 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두 사람은 천천히 바닥을 기었다. 그들을 노리는 게 그 한 명뿐이지는 않을 것이다. 표적이 된 이상 가능한 한 멀리 도망쳐야 한다. 그리고 그렇다면 저격수도 한동안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런데 지우가 갑자기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서연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왜요? 어디 다쳤어요? 많이 아파요?”
지우는 가만히 손을 들어 서연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불빛이 새어 들어오는 발코니 옆 벽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서연도 지우의 시선이 향한 곳을 살피다가 총알이 박힌 자국을 발견했다. 지우의 팔을 스치고 지나간 총알이었다. 그러나 서연은 놀이기구 꼭대기에서 날아온 총알이 발코니에 있던 지우의 팔을 스쳐 유리를 깨고 그 벽에 박히려면, 총알이 거의 직각으로 휘어야 한다는 사실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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