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3_3
순식간에 동료 둘을 잃은 건달들은 일제히 칼을 꺼내 들고 전의를 불태웠다. 둘 다 방심하다 당했을 뿐, 자기들이 소년 하나를 당해내지 못할 리 없다고 믿은 것이다. 리레이쉰은 꼬마 아가씨가 피를 보지 않도록 조심조심 셋을 상대했다. 그게 실수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서연은 리레이쉰이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자 피투성이가 된 또 한 사람의 기사가 머리에 떠올랐다. 서연은 앞뒤 가리지 않고 수풀 속으로 뛰어들어 이미 숨이 끊어진 경호원을 흔들어 깨우려 안간힘을 썼다.
셋이서도 리레이쉰을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걸 느끼던 건달들은 그 소리를 듣고 서연을 인질로 잡기로 마음먹었다. 건달 주제에 호흡도 잘 맞아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녀석이 서연에게 달려가고, 나머지 둘이 리레이쉰의 진로를 막았다.
다급해졌다. 리레이쉰도 더 사정을 봐줄 수 없었다. 그는 뻗어오는 칼날을 살짝 피하며 손목을 잡고, 그대로 또 한 놈을 향해 뻗어 배에 칼을 찔러넣어 버렸다. 하나가 쓰러지고, 또 하나는 손목을 비틀고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꼼짝 마! 아름다운 약혼녀 얼굴에 칼집을 내고 싶진 않겠지?”
건달은 서연을 붙잡고 얼굴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리레이쉰이 입술을 깨물며 손을 놓았다. 잠시 손목을 어루만지던 건달이 돌아서며 리레이쉰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리레이쉰은 저항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구타당했다. 서연이 울며 소리쳤다.
“그만 해요! 그 사람 보내줘요. 내가 따라갈게요. 그 사람은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러나 이 조숙한 여섯 살짜리 소녀의 외침에 흔들릴 깡패들이 아니었다.
“싫은데? 너도 죽이고 쟤도 죽일 건데?”
그 말에는 리레이쉰은 물론 주희도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주희는 칼을 든 건달의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있는 힘껏 칼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알 수 없는 힘에 칼을 놓친 건달은 깜짝 놀라 허리를 숙여 칼을 집으려 했다. 주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서연을 옆으로 2~3미터쯤 날려버렸다. 건달은 서연이 몸을 날린 줄 알았고, 서연은 건달이 자기를 내팽개친 줄 알았으며 리레이쉰에게도 그렇게 보였다.
다음 순간, 쓰러진 리레이쉰의 얼굴로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묵묵히 맞아주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발은 이상한 각도로 허공을 가르며 리레이쉰의 얼굴을 피해 지나갔다. 그 힘에 건달이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리레이쉰이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 바닥에 떨어진 칼로 서연을 붙잡았던 건달의 목을 꿰뚫어버릴 심산이었던 주희는 깜짝 놀라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레이쉰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날아와 막 칼을 집어든 건달과 서연 사이를 막아섰다. 건달은 너무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발작적으로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는 더욱더 크게 놀라야 했다. 꿈속에서 괴물을 상대하는 것처럼, 칼은 상대의 몸에 맞지 않고 그 주변을 이리저리 휘저을 뿐이었다. 리레이쉰은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리레이쉰이 천천히 서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얘 좀 봐. 내가 이러면 겁먹을 줄 알고 이러나 봐.”
서연은 그 말을 믿고 안심했다. 그러나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또 다른 건달은 동료가 괜히 겁을 주느라 쓸데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 전 헛발질을 하며 느꼈던 게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칼을 휘두르는 동료의 표정도 절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리레이쉰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미 이렇게 많이 맞았고, 또 네 친구도…….”
“죽었어요.”
서연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리레이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됐구나. 그러니 이놈들은 겁이 많을 뿐 착한 놈들은 아니야. 내가 혼내줄게.”
리레이쉰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건달로 향하며 살기를 발했다. 건달은 몸이 얼어붙어 리레이쉰이 천천히 손을 뻗어 목을 움켜쥐는 걸 피하지 못했다. 건달의 손에서 힘이 빠지며 칼이 스르르 떨어졌다. 리레이쉰이 왼손으로 칼을 받아들었다. 상대의 목을 조르는 오른손에서는 힘을 조금도 빼지 않았다.
그때 리레이쉰을 두들겨 패던 건달이 뒤돌아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리레이쉰은 몸을 틀며 왼손으로 힘껏 칼을 던졌다. 맞지 않으면 잡고 있는 놈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달려가서 잡아죽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등을 노리고 던진 칼이 뜻밖에도 목덜미에 꽂혀버렸다. 예상한 궤적도 아니었으며, 자기가 던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빨리 더 멀리 날아갔다. 자기가 아는 자기 힘이 아니었다. 리레이쉰은 이미 숨이 끊어진 건달의 목을 움켜쥔 채로 엉뚱한 가설을 세웠다. 자기 몸 반경 1미터 안에 한정되어 있던 그의 힘이, 이 귀여운 소녀를 지키지 못할 뻔했다는 자책감이 분노로 표출되어 순간적으로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발현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반복되지 않았지만, 이는 훗날 리레이쉰이 말도 안 되는 저격에 종종 성공하는 저격수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능력을 의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으로 두르가의 도움을 받은 게 바로 그날이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생각에 잠긴 리레이쉰의 바지를 서연의 고사리손이 잡아 흔들었다.
“그 사람 벌써 죽은 것 같은데.”
리레이쉰이 화들짝 놀라 손을 놓으며 대답했다.
“응? 아, 아니야. 자는 거야.”
서연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내가 어린애로 보여요?”
“내가 어린애랑 데이트하겠어?”
리레이쉰은 웃으며 그렇게 되물었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일에 이렇게 무감각한 꼬마를 보며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 또한 그런 꼬마였고, 베트남에는 비슷한 친구들이 아주 많았지만, 겉으로 보기에 서연은 그들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리레이쉰은 현장에서 자기와 서연의 흔적을 지우고 걸음을 옮겼다. 서연이 뒤를 따르며 물었다.
“데이트는 어디로?”
“공주님 집으로 가는 길이 데이트 코스지 뭐. 집이 어디야?”
“못 가요. 오늘은…….”
“왜?”
“외할아버지가 내일 오시거든요. 오늘 가면 큰오빠가 날 죽일 거예요.”
그 말을 듣자 리레이쉰도 내막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물었다.
“외할아버지 이름이 뭐야?”
“오카다 츠지야마. 난 강서연. 오빠는요?”
리레이쉰의 표정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백설공주를 구해준 왕자님 이름 알아?”
“응? 뭐였지?”
“신데렐라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서연은 약간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하나도 몰라요…….”
“그렇지? 왕자님은 이름을 남기지 않는 법이야.”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랑 어떻게 결혼을 해?”
“정말 나랑 결혼하려고?”
“외할아버지가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한댔어요. 나랑 결혼하기 싫어요?”
“그럴 리가!”
“근데 뭐가 문제람?”
“네 맘이 변할 테니까.”
“한 번 뱉은 말은…….”
리레이쉰은 엉뚱할 정도로 진지한 꼬마 숙녀에게 푹 빠져서 자기도 모르게 똑같이 진지해져 버렸다. 그리고 훗날 땅을 치고 후회할 한마디를 더해버리고 말았다.
“말보다 마음이 더 중요한 거야. 좋아, 이렇게 하자. 나도 약속할게. 연애도 안 한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네가 결혼할 나이가 될 때까지 결혼 안 하고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반드시 약속을 지킬 거야. 하지만, 만약에 어른이 된 네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면 깨끗이 물러나지. 어때?”
“쓸데없는 얘기네요. 난 절대 마음이 변하지 않아요.”
“수많은 연인이 그렇게 말하지. 뭐 어차피 변하지 않을 거라면 그러기로 해도 되잖아? 네 말대로 쓸데없는 한마디가 되겠지만.”
서연은 생명의 은인에게 시집간다는 데 아무 거부감이 없었다. 강하고 잘생기고 재미있는 오빠이기도 했다. 그 결혼을 막을 수 있는 게 자기의 변덕뿐이라는 데야 걱정할 것도 없었다.
“좋아요. 대신 결혼할 때는 이름도 가르쳐줘야 해요.”
리레이쉰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네 외할아버지한테 허락받으려면 그전까지 아주 유명한 이름으로 만들어 둬야겠지만.”
“외할아버지 알아요?”
“이 세계에선 모르기 어려운 이름이지. 발을 빼려고 했는데 그럴 운명이 아니었나 보다.”
서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내일 나랑 같이 외할아버지한테 가서 오빠가 나 구해줬다고, 나중에 결혼하겠다고 하면 안 되나?”
리레이쉰이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남자가 목숨을 걸려면 가치 있는 일에 걸어야지. 확률도 높아야 할 거고. 난 오늘부터 너와 결혼하기 위해 살겠어.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서연은 리레이쉰이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하얀 가루가 든 봉지를 꺼내 연못으로 던져버리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주희도 나무 위로 옮겨다니며 그 모습을 보았지만 그게 뭔지 알게 된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리레이쉰은 그날 센트럴 파크에서 하기로 했던 마약거래를 포기하고, 그에게 마약을 공급하던 조직에 정면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어린 서연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무엇으로부터도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자기가 판 마약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괴감만을 느끼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주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서연과의 결혼은 리레이쉰이 추구하는 모든 것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게 집착이 되어 있을 무렵에는 이미 그 꿈을 실제로 이룰 수 있을 만큼의 힘을 손에 넣고 있었다. 그러고도 남을 힘이었다.
주희는 리레이쉰이 서연을 오토바이에 태워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러, 삼합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리레이쉰을 다시 만났을 때도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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